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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천운영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거미를 그려달라고 했다.남자가 가져온 인쇄물은 거미라기보다는 커다란 홍게처럼 보였다.새를 먹는 골리앗거미.세상에서 가장 큰 거미의 이름이다.

"이 완벽한 대칭 좀 봐.꼭 반으로 접어 찍어낸 것 같지 않아?"

남자는 인쇄물 속의 골리앗거미를 노려보며 말했다.

"똑같이,똑같이 그려 줘.몸을 덮고 있는 이 보송보송한 털까지."

남자가 원하는 것은 거미의 털이나 대칭으로 잘 뻗은 다리가 아니다.남자는 협각류의 외피를 원한다.거미가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물에게 위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단단한 외피를 획득한 탓이다.나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서 협각류의 단단한 외피를 얻으려 한다.인간의 살갗은 오히려 과일에 가까워 쉽게 상처가 나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인간의 살에 거미의 외피를 그릴 수 있다.

침대에 수건을 까는 동안 남자는 웃옷을 벗고 거미 사진을 이리저리 대보며 문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었다.남자의 등과 가슴에는 길이 30㎝의 거대한 거미가 줄을 칠 자리가 없어 보인다.배꼽을 중심으로 화려한 무늬를 가진 나비의 날개가 펄럭이고 있다.손목에서부터 어깨까지 타고 올라간 대나무는 남자의 팔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알코올램프에 불을 켜고 향을 태운다.송진내를 품은 연기가 유령처럼 방안을 떠돈다. 향내가 사라지면 바늘을 손에 쥔 채 발작을 일으킬 것만 같다.작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여러 번 향을 덧꽂을 것이다.바늘집에서 5호 바늘을 꺼내 알코올램프에 달군다.불꽃 속의 바늘이 거뭇거뭇해지다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요즘은 에이즈 때문에 다들 기계 문신을 하지.색도 고르게 나오고 훨씬 안전하거든.근데 나는 네가 해주는 바늘 문신이 좋아.기계 문신은 치과 병원 의자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어.마취 주사가 잇몸을 뚫고 들어오는 기분 알지? 벙벙하니 떫은감을 물고 있는 기분인데,의사들은 마취를 해 놓고는 꼭 옆에 환자를 먼저 치료한단 말야.그때 들리는 기계 소리.소름이 돋아."

남자는 바늘이 소독되는 걸 지켜보며 느릿느릿 말을 한다.바늘을 내려놓고 소독 솜으로 남자의 허벅지와 내 손을 닦아낸다.나는 문신을 하는 동안에는 말을 삼간다.나는 평소에도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내 의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발설의 욕구는 일종의 충치 같은 거였다.혀끝에서 거치적거리며 고통을 주는,그러면서도 잇몸 깊숙이 박혀 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충치.그것을 뽑아 세상에 보이려 하면 이미 더러운 냄새를 풍기며 바스라져 버리곤 했다.

남자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나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말들을 계속할는지도 모른다.나와 두 번의 거래를 통해서 깨우칠 만도 했지만 거미나 전갈 따위를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남자는 두려움을 침묵으로 이겨내지 못했다.남자에게 독한 코냑을 얼음 없이 한 잔 가득 따라 준다.약이나 대마초는 내 앞에서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통을 이겨내는 사람만이 혐각류의 외피를 얻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남자는 긴장하고 있다.내가 유성펜으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바로 바늘로 그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나 또한 착색하는 과정보다 처음 밑그림을 그릴 때 더 조심스럽다.피가 나지도 않고 발갛게 부풀어오를 정도의 얕은 상처.지울 수 없는 문신의 문양이 여기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바늘을 들고 남자의 무릎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거미의 몸통을 그리기 시작한다.몸통은 정팔각형 모양이다.몸에 사방무늬가 있지만 일단 실루엣만 그리면 된다.몸통 밑에 꼬리 부분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한없이 실이 뽑아져 나올 것 같다.다섯 쌍의 보각(補角)은 남자의 말대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바늘 끝을 따라 거미가 조금씩 형태를 드러낸다.

남자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있다.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올리고 다리는 어정쩡하게 벌린 상태로 누워 있는 남자의 몸은 체념이 무엇인지 아는 듯한 자세다.바늘이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공격을 가한다면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처럼 힘 한 번 못 쓸 것 같다.

허벅지에 문신을 새기는 작업은 등이나 가슴 쪽보다 훨씬 신경이 쓰인다. 상대의 종아리에 올라탄 채 팬티 사이로 비어져 나온 털을 보면서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내 고른 숨소리와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뜻한 바람은 남자의 사타구니를 데우기 충분하다.남자의 성기는 내가 바늘을 댄 순간부터 조금씩 단단해지기 시작해 밑그림이 끝날 즈음이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이 나기 마련이다.그러나 내가 문신을 시작한 이래 내게 성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일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네가 조금이라도 예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그림을 그리고 나면 그게 간절해지거든.근데 넌 문신 기술은 좋지만 도저히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하긴,그림을 그려 준 그 많은 놈들이 너한테 덤벼들었다면 너는 매일 항생제를 달고 살아야 했을 거야."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뭉뚝한 발가락….남자가 말한 전혀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게 하는 이유들이다.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추하다는 추상어가 명백히 눈앞에 펼쳐져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을 느꼈다.거기에 나는 말까지 더듬는다.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 바늘 끝에서 나오는 문신을 보고 추함과 연결시키는 사람은 없다.

거미 문신에 색을 넣기 위해 염료가 진열된 장식장 앞에 선다.거미 몸통의 암홍색을 위해서 베네티안 레드와 인디아 잉크,징크 옥사이드를 고른다.털이 북슬북슬하게 난 거미 다리는 크롬 그린과 암청색 인디고 염료를 사용하면 될 듯하다.남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털은 티타늄 정도로 하면 느낌이 살아난다.티타늄은 제트기나 로켓의 재료가 되는 금속인데 안료로도 쓰인다.은백색의 반짝거림이 있기 때문에 금속성의 칼이나 활 등을 문신할 때 종종 사용한다.골리앗거미처럼 털이 부스스 일어난 경우에도 그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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