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1호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남자의 숨소리였을까? 코끝에 진한
화약냄새가 진동했다.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탱크와 헬리콥터가 전시된 마지막 방을 지나 전쟁기념관
밖으로 나왔다.온몸에 기운이 빠진다.야외 잔디밭에 전시된 탱크 옆에 길게 눕는다.어렴풋이 목탁
소리와 엄마의 염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코끝에 맴돌던 화약냄새는 어느새 연한 향냄새로 바뀌어
있었다.기념관에서 보았던 장검이 섬광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간다.날렵하고 섬세한 칼날,그 끝에 정교하게
새겨진 호랑이 문양,아름답고 영예로운 칼.나는 그 아름다움에 무릎꿇고 쇳내 나는 칼날을 개처럼
핥는 꿈을 꾸었다.혓바닥을 저릿저릿 자극하는 것은 비릿한 강철 냄새 같기도 했고 향냄새나 화약냄새
같기도 했다.
"부검을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노환에 의한 자연사로 잠정결론 내렸습니다.신도들이
부검을 반대하고 나와서….하긴 죽기 전에 스님은 거의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답니다.뭐 땜에 자기가
죽였다고 우겼는지 모르지만 김형자 씨 덕택에 괜한 사람들만 고생했지 뭡니까."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말하는 문형사의 말은 공복에 피우는
새벽 담배처럼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아침이라 경찰서는 한가했다.그럼에도 문형사는 부산히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내 시선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럼,엄마가,스님을,죽이지 않았단 말인가요?"
"그렇다니까 그러네요.어제 김형자 씨는 구치소에서 풀려났습니다.집으로
갔겠죠."
문형사는 바쁜 일이 있다며 총총히 사라졌다.나는 경찰서 입구 층계에
앉아 분주히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신발 부리를 바라보았다.미아가 된 기분이다.엄마가 떠난 길목을
바라보며 한복집 앞에 꼼짝도 못하고 있던 그날처럼.
간질발작이 다 나은 이상 엄마와 나는 더 이상 미륵암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먼지를 뒤집어쓴 한복집 셔터를 올리면서 미륵암에서의 모든 일들을 기억 속에서 삭제시키기로
했다.내가 죽인 고양이,스님과 함께 했던 차시간,짙은 향냄새까지도.엄마에게 한복 만드는 법을
배워 엄마처럼 고운 옷을 만들리라,실톳에 밑실을 감거나 옷감 물들이는 일부터,앞섶의 날렵한 선을
박음질 할 수 있을 때까지 엄마 곁에 꼭 붙어 있겠다,그것이 내 생각이었다.그러나 엄마는 달랐다.엄마는
나흘동안 숯물 들인 무명 동방의와 바지, 치자물 들인 가사를 만들었다.풀을 먹이고 다듬이질까지
완벽히 끝났을 때 엄마는 내게 겨자색 보자기에 둘둘 말린 것을 꺼내 놓았다.엄마가 준 보자기에는
꽤 많은 돈 뭉치가 들어 있었다.그리고 엄마는 스님의 옷을 들고 집을 나섰다.'나는 그곳으로
가야겠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었다.
스님을 죽인 것은 엄마가 아니다.엄마가 스님을 죽였다고 생각한 것은
기념관에 전시된 무기들처럼 실현 불가능한 살의였는지 모른다.하지만 많은 전쟁들이 미화되어 있었듯이,스님의
아름다움을 지켜 주기 위해 누군가가 사건을 은폐시켰을 수도 있다.나는 미륵암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숲에 둘린 미륵암은 스스로 숲이 된 듯 고요하다.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다.대웅전과 미륵전은 커다란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져 있다.마당에는 마른 솔잎들이 잔뜩
쌓여 폐가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요사채로 들어가는 대문 역시 빗장이 질러져 있다.나는 헐거워져
달그닥거리는 감정의 나사를 단단히 조인다.대문 옆에 버려진 나무 궤짝에 올라가 요사채 안을 넘겨본다.미륵암은
기괴할 정도로 깊은 정적에 빠져 있다.그 많던 고양이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손을 뻗어 안으로
잠긴 빗장을 푼다.
부엌은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수챗구멍에 밥알 하나조차
남아 있지 않다.식칼이나 길고 뾰족한 젓가락,무쇠로 만들어진 솥,아궁이 속에서 불타는 나무,한
번의 점화로 요사채를 날릴 수 있는 프레온 가스….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살인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그러나 엄마가 스님을 죽였을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엄마와 내가 머물었던 방으로 들어간다.엄마가 입었을 듯한 옷가지와
이불이 눅눅한 냄새를 풍기며 구석에 처박혀 있을 뿐 가구 하나 없이 휑하다.창가에 놓인 라면
박스 위에는 엄마가 매일 읽었을 예불책과 짚으로 만든 바느질 그릇,반쯤 쓴 싸구려 화장품 등이
얌전히 놓여 있다.바느질 그릇을 뒤집어 바닥에 쏟아낸다.흰색 실패가 도르르 굴러간다.단추와 초크
줄자 등을 넣어 놓은 봉투 하나,능견으로 만든 침낭(針囊) 하나,일제 기린표 금도금 바늘 한
쌈,하늘색 플라스틱 빗,검은색 머리끈이 다였다.
'머리카락을 넣어 두면 바늘이 녹슬지 않아.' 엄마는 침낭을 열어
머리카락을 넣을 때마다 그렇게 말했었다.엄마의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은 동그랗게 말린 채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때로 뭉텅으로 빠지는 뻣뻣하고 두터운 내 머리카락도 엄마는 정성스럽게 넣어 주곤
했다.나는 엄마의 침낭과 바늘쌈을 바지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엄마는 이제 바늘이 필요 없을 것이다.이
바늘들은 내가 가지고 가 아름다운 문신을 그리는 데 쓸 것이다.승전품(勝戰品)을 얻은 것처럼
바늘을 주머니에 넣었지만, 심장은 격렬한 박동질을 하고 있었다.
김사장이 데리고 온 사람은 평생 화투판을 전전했다는 사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유난히 숱이 많은 머리를 새카맣게 염색을 하고 송아지처럼 커다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남자의
어깨에는 푸른색 닻이,가슴팍에는 커다란 사각형이,배에는 다섯 개의 직사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이기는 내가 외항선 탈 때 단체로 그린기고,이 네모는 'ㅁ'자
데이. '마산대표'라고 쓸라캤는데 문신하던 놈이 'ㅁ'자만 쓰고는 딸려가뿟다. 'ㅁ'자를
이리 크게 써 갖고 우예 마산대표를 다 쓴단 말이고.그때부터 내 인생은 조져뿐기다.마산 대표도
몬 하는 기 무신 성공이고 성공은."
남자는 밑그림만 덩그러니 남은 문신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다섯
개의 직사각형은 오광을 그리려 한 것이라고 했다.부적처럼 가슴에 품으면 없던 끝발이라도 세울
수 있으리라는 남자의 희망은 공허한 몇 가닥 선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미륵암에 다녀온 이후 두어 번 문신을 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문신을 해줄 수가 없었다.김사장만 아니었다면 며칠째 계속 방안에 틀어박혀
생수와 고기만 먹으며 지냈을 것이다.김사장은 때로 이런 식으로 불시에 손님을 데리고 와 문신을
요구하곤 한다.그가 데려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추잡한 문신을 교정하거나 하루를 꼬박 바늘을 쥐어야
할 복잡한 그림을 원한다.심지어 자신의 성기에 사무라이의 검을 그려 달라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는데,그런
무리한 요구에도 난 거부할 수가 없다.
김사장은 내게 바늘 다루는 법을 알려 준 사람이다.엄마가 떠나고
한복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가 김사장을 만났다.김사장의 쇳덩어리 같은 팔뚝에 새겨진 푸르스름한
자국을 보았을 때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철공소에서 용접을 하는 사람에게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났다.쇠의 비릿함과 땀내가 섞인 그런 냄새.김사장의 팔뚝에 그려진 칼은
아름다웠다.김사장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엄마가 바늘을 가지고 옷감에 수를 놓았다면 나는 인간의
연약한 육체에 수를 놓겠다.김사장은 내 탈피를 도와줄 빛이었다.
남자의 가슴팍에 새겨진 마산대표의 'ㅁ'자는 글자라기보다는 작은
액자처럼 보인다.육체에 새겨진 글귀는 그걸 새겼을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노력'이나
'저축'과 같은 글귀가 그렇다.한번 열심히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와 결의가 살을 파는 아픔을 이겨내게
만들었을 것이다.역으로 문신에는 앞으로 감수해야 할 삶의 시련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육체와 그
위에 새겨진 글귀 사이에 공존하는 어떤 것.그것은 아름다운 상처,혹은 고통스러운 장식이다.
남자의 작은 액자에 호랑이 한 마리를 그려 준다.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로 눈을 부라리고 있다.참숯을 곱게 갈아 몸통 깊숙이 줄무늬를
새겨 넣는다.사각형 안에 갇힌 호랑이는 고작 마산대표가 아니라 조선시대 무관을 대표했던 흉배문양이
될 것이다.그리고 다섯 개의 사각형 안에는 일,삼,팔,비,똥,다섯 개의 광을 그려 넣는다.남자는
어느 화투판에서도 느긋할 수 있는 오광을 몸 안에 숨기고 있게 되었다.인생에 있어 그렇게 막강한
숨긴 패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여유롭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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