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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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저녁놀과 함께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오희삼씨가 윗세오름 중봉의 정상에 솟은 바위에 올라서서 선작지왓 일대를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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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구벽 아래의 광활한 평원에는 진분홍빛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어찌나 꽃빛이 붉고 선명한지 꽃밭이 아니라 숫제 불바다를 방불케 하는 장관이다. 더욱이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과 대비를 이룬 철쭉의 붉은빛이 섬뜩하기까지 하다.
가없이 드넓은 철쭉밭을 이러 저리 쏘다니다가 문득 "천지간에 어디엔가 선계가 있다면 바로 이런 데가 아닐까"하는 억측과 함께 "이런 데에서 살다보면 언젠가는 우화등선(羽化登仙)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라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소속된 청원경찰들은 바로 이런 선경(仙境)을 일터로 삼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된 업무는 한라산국립공원의 곳곳을 주기적으로 순찰하면서 한라산에 자생하는 희귀식물인 주목 한란 돌매화 등의 불법 채취와 밀반출을 막고, 노루와 꿩 등의 야생동물에 대한 밀렵행위를 단속하는 일이다.
이들 청원경찰은 사법경찰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현행범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할 수 있다. 그밖에 등산객이 조난당했다는 신고가 접수되면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 구조활동을 펼치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그야말로 사람이나 동식물 구분 없이, 한라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키는 '한라산 지킴이'인 셈이다.
"전에는 한해에 몇번씩 꼭 사망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눈속을 헤치며 수색작업에 나서기도 하고 부상자나 사망자를 산 아래까지 들쳐메고 내려온 적도 숱하게 많았습니다. 요즈음에는 등산로도 넓고 겨울철에 적설량도 많지 않아서 인명사고는 거의 없어요. 그러나 희귀식물을 노리는 도채꾼들은 지금도 일년에 한 두차례씩 적발되곤 합니다. 주로 주목을 몰래 캐 가려고 들어오는 사람들이죠."
올해로 한라산 청원경찰 직무를 수행한 지 23년째 되었다는 신용만씨(48)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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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이 만개한 장구목 일대를 순찰하는 신용만씨(왼쪽)와 오희삼씨. 한라산국립공원의 청원경찰인 이들은 한라산에 서식하는 동식물에 대한 불법채취와 밀렵을 단속하기 위해 근무시간의 80% 가량을 산중에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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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포함해 한라산을 지키는 청원경찰은 모두 23명. 한라산국립공원의 전체 면적은 133㎢인데, 공원 면적에 비하면 인원이 부족한 편이라 일요일에도 쉬는 날이 드물 정도로 해야 할 업무가 많다.
이들의 고유업무는 산악 순찰활동. 일주일 가운데 2, 3일은 각자의 근무지인 관리사무소(어리목)와 지소(영실 관음사 성판악)에서 가까운 숲속과 도로변을 도보나 차량으로 순찰한다. 그리고 나머지 4, 5일은 해발 1700m 이상의 고지대를 순찰한다.
하만에 등산로도 없는 계곡과 산비탈을 거슬러서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가 반대방향으로 하산하는 일도 허다하고, 한달에 너댓번씩은 2인1조를 이루어 2박3일 동안 한라산 정상과 고지대에서 야영하거나 대피소에서 먹고 자면서 순찰근무를 한다.
이처럼 순찰업무가 많다 보니 근무시간의 80% 이상은 산중에서 보내게 된다. 마침 2박3일간의 고지대 순찰에 나서는 신용만-오희삼씨(33) 조와 동행하면서 그들의 일상적인 순찰활동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오전 9시30분경에 어리목을 출발한 두사람은 약 1시간40분만에 해발 1700m에 위치한 윗세오름대피소에 도착했다. 모처럼만의 쾌청한 날씨에다 철쭉꽃이 한창 절정에 이른 때라, 대피소는 많은 등산객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에서의 업무는 등산객들에게 등산코스나 자연에 관해 안내도 하고 출입금지구역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등산객들마다 신씨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묻곤 했다. 같은 말을 수십번씩 되풀이하는 데도 그의 말투는 여전히 공손하고 친절했다. 더군다나 그의 대답은 등산객들의 어떠한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다. 등산코스는 물론이고 한라산의 자연생태에 관련된 전문적인 내용을 매우 다양하면서도 쉽게 설명했다.
이에 대해 그는 "적어도 한라산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한라산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어떤 사람에게도 정확한 내용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평소의 지론이라고 했다.
실제로 신씨는 한라새우난 흰좀양지꽃 은빛복수초 검은삿갓나물 등의 희귀식물을 발견해 학계에 처음으로 보고한 적도 있거니와 한라산 생태에 관해서는 이미 전문가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라산의 자생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치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그는 한라산의 자생식물을 카메라에 담아 '한라산의 꽃'이라는 도록을 펴내는가 하면, 지난해 여름에는 오희삼씨를 비롯한 여러 동료들과 함께 한라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주제로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등산객들의 발길이 뜸해지는 오후 3시30분, 신씨와 오씨 두사람은 대피소 주변에서 대민업무를 마치고 순찰근무에 나섰다. 장구목과 윗세오름 상봉의 남쪽 기슭을 거쳐 방아샘까지 간 다음 다시 백록샘과 윗세오름 중봉 사이의 선작지왓 평원을 가로질러서 윗세오름대피소로 되돌아오는 것이 그날의 순찰 코스였다.
대부분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구역임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사진작가나 무속인, 또는 돌매화나 주목을 몰래 캐가려는 도채꾼들이 잠입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도채꾼들을 막기 위해 통상적인 순찰활동 이외에도 이른바 '취약지구'에서는 2, 3명의 청원경찰들이 철야로 잠복하기도 한다.
그날 순찰근무를 하는 도중에도 영실지소에서 올라온 잠복근무조를 만났다. 조장 한재근씨(52)를 비롯한 세 사람은 도채꾼들의 잠입을 막기 위해 사나흘에 한번씩은 야영을 하며 철야근무를 한다고 했다. 영실지소뿐 아니라 각 지소별로 취약지구마다 텐트를 쳐놓고 지속적으로 잠복근무를 한다.
신씨와 오씨의 순찰조는 잠복근무조와 함께 대형 지도를 펼쳐 놓고 취약지구를 점검한 뒤 다시 선작지왓을 가로질러 윗세오름대피소로 향했다. 정신없이 그들의 뒤를 쫓다보니 내내 뜨겁게 내려쬐던 햇살이 어느덧 평원 너머로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현란한 저녁놀과 함께 땅거미가 깔리자 제법 서늘해진 바람이 옷섶을 파고들었다. 오씨는 "바로 이 바람 때문에 한라산에서 일하는 맛이 난다"면서 "1700고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다보면 모든 삶의 찌꺼기가 다 날아가버린다"고 했다. 산 아래의 고달픈 현실도, 산중에서의 육체적인 어려움도 바람결에 모두 잊혀진다는 것이다.
한줄기의 바람에다 삶의 애환을 날려버릴 줄 아는 그들의 멋과 한라산에 대한 깊은 애정이 퍽 부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천상 한라산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 수 없을 성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