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33. 지리산 자락 계원마을
찻잎따다 내 청춘 다 갔지라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첫날. 차창을 비집고 들어오는 강바람이 여간 상쾌하지 않다. 섬진강은 절정의 봄빛을 지나 여름의 문턱에 성큼 다가서 있다. 화개장터를 지나 화개천과 나란히 달리는 '쌍계사 십리 벚꽃길'을 거슬러 오른다. 그 길가의 벚나무도, 멀리 바라보이는 지리산의 매숲진 비탈과 골짜기도 이미 짙은 녹음을 드리웠다.

흔히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입구에 이르는 길을 '쌍계사 십리 벚꽃길'이라고 한다. 거기에 빗대 말한다면, 쌍계사 입구에서 신흥마을까지의 길은 '십리 찻길( 茶路)'이라 일컬을 만하다. 화개천 양 옆의 산비탈과 길가 곳곳마다 윤기나는 진초록의 차밭이 줄지어 들어섰기 때문이다. 특히 쌍계사 들머리의 석문마을에는 지금까지 차의 시배지(始培地)가 남아있어 이 지역의 차재배 역사가 녹록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근래에는 '십리 벚꽃길'주변과 섬진강을 끼고 달리는 국도변에도 차밭이 부쩍 늘어났다. 게다가 제다(製茶)공장 찻집 다기점 등 차와 관련된 업소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비탈진 차밭
화개면 운수리의 비탈진 산자락에 들어선 차밭. 몸을 곧추세울 수도 없을 만큼 가파른 산비탈이라, 찻잎따는 일은 늘 긴장되고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달프다.
늘푸른떨기나무(常綠灌木)인 차나무는 습기가 많고 무덥되 늘 시원스럼 바람이 불어와 무더위를 식혀주며 아침에는 햇볕을 잘 받고 낮에는 그늘이 지는 골짜기와 산비탈에서 잘 자란다. 그런 조건들을 두루 갖춘 곳이 바로 지리산 남동쪽 자락의 화개천 유역이다.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차나무가 재배된 곳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화개면 용강리 계원마을에 사는 황인선씨(50)의 말에 따르면 차농사가 이 지역 주민들의 주된 소득원으로 자리잡은 것은 별로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찻잎을 따서 목돈을 만진지는 한 15년밖에 안됐을기라예. 그 전에도 찻잎을 따 물도 끓여먹고, 얼마간은 차로 만들어 절 근방같은 데서 팔기는 했지라. 허나 그때는 차라는 게 돈이 안될 때라서 그냥 한됫박 퍼주고 쌀이나 보리쌀로 바꿔다 먹고 했지예. 지금 같으면 몇십만원 어치는 될낀데…."

그러나 차의 상품성을 몰랐던 시절에도 차의 효능만은 익히 알고 있었던 듯 싶다. 황씨는 커다란 솥이나 주전자에다 찻잎 결명자 인동 돌배 등을 함께 넣어 푹 고아낸 물을 몸이 아플 적마다 한사발씩 들이키곤 했다는 것이다. 특히 감기기운이 있거나 배앓이를 할 때 그 물을 한사발 마시고 한숨 푹 자고 나면 몸이 가뿐해졌다. '동의보감'에도 "고다(苦茶·작설차)의 성품은 조금 차다. 그러나 맛은 달고 쓰며 독이 없다. 기를 내리고 뱃속에 오래 쌓인 음식을 소화시킨다. 또한 머리를 맑게 하고 오줌을 통하게 하며 소갈(당뇨병)을 낫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황씨의 경험방(經驗方)이 근거없는 건 아닌 셈이다.

집 뒤편의 몹시 비탈진 산자락에 들어선 황씨의 차밭은 3,000평 가량. 그중 30∼40%는 산중턱의 천둥지기(天水畓)에다 새로 조성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시배지에서 퍼뜨린 종자가 저절로 나고 자란 야생 차밭이다. 이곳에서는 대략 4월10일경부터 찻잎을 따기 시작한다.

황씨의 부인 공정희씨가 가마솥에 덖은 찻잎을 덕석에다 펼쳐 놓고 비벼 꼬고 있다. 덖고 비비고 말리는 과정을 적어도 대여섯번은 되풀이해야 차 한통이 만들어진다.
차의 이름은 제조법, 크기와 모양, 채취시기에 따라 다양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곡우 이전에 채취한 '우전차'(雨前茶)를 가장 고급차로 친다. 황씨처럼 차를 재배하는 농가는 채취한 찻잎의 일부는 집에서 직접 녹차를 만들고, 나머지는 모두 제다공장에다 판다. 우전차(생잎) 1kg을 제다공장에 파는 가격은 6만원 선.

곡우가 지나면 약 열흘 간격으로 세작 중작 대작을 채취하는데, 세작은 4만∼5만원(1kg당) 선을 유지하다가 그 이후로는 거의 날마다 1,000∼3,000원씩 하락한다. 그런 추세로 가다 보면 중작은 1만원선, 대작은 5,000원선까지 떨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티백용 차의 원료가 된다는 말작은, 인건비에도 못미치는 2,000∼3,000원 선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집에서 직접 전통방식으로 차를 만들어 팔면 제다공장에 넘기는 것보다 이문이 곱절에 이른다고 한다. 가마솥에 찻잎을 덖어 손으로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먼저, 미리 데워놓은 가마솥에다 두손으로 가볍게 쥘 수 있을 만큼의 찻잎을 넣고 1∼2분쯤 계속 뒤적거리면서 덖는다. 그런 다음 덖은 찻잎을 꺼내 돗자리나 멍석에다 펼쳐 놓고 손바닥으로 슬근슬근 문지르며 비벼 꼰다. 그렇게 5분쯤 계속하다가 성긴 베 위에다 올려 놓고 말린다. 이 과정을 여러 차례 되풀이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덖은 다음에는 다른 냄새가 배지 않게 방 안에서 말린다. 원래는 '구증구폭'(九蒸九曝), 즉 덖고 말리기를 아홉번씩 되풀이해야 하지만 우전이나 세작은 너무 비비면 부서지는 탓에 대작이나 중작보다 쯟은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이렇게 생잎 1kg을 가공하면 100g짜리 차 두통을 얻는다.

황씨네가 직접 만들어 파는 차는 한해에 500통 가량이다. 그리고 찻잎을 따고 가공하는 일은 40∼50일 동안 계속되는데, 황씨네 한해 수입의 절반쯤인 1,000만∼1,500만원을 차농사에서 얻는다고 한다. 언뜻 보면, 차나무가 서식하기에 적합한 자연과 차의 종자를 퍼뜨린 조상의 음덕으로 손쉽게 돈을 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네 식구(황씨 내외와 부모)가 찻잎을 따고 말리는 일에 들이는 공력을 지켜보면 이런 생각은 잘못임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그을리면 님도 몰라본다'는 봄볕 아래 온종일 고개와 허리를 숙인 채 일하는 게 쉽지 않다. 몸을 곧추세울 수도 없을 만큼 가파른 산비탈에서 일하면 늘 긴장되고 다리조차 쥐가 날 지경이다. 게다가 해거름녘에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찻잎을 덖고 부비고 말리는 일이 야심할 때까지 계속된다. 조상 덕에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양영훈〈여행칼럼니스트〉

시 배 지

우리나라에는 이미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도당(渡唐) 유학생들에 의해 차가 들어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차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 흥덕왕 3년(828)의 일. 그해 12월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다가 돌아온 김대령이 차의 종자를 갖고 들어왔는데, 왕은 그것을 쌍계사 주변의 지리산 자락에다 파종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 뒤로도 문성왕 2년(840)에 진감국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차의 종자를 쌍계사 주변에다 심고 이 절을 대가람으로 중창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쌍계사 주변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 재배지임에 틀림없는 듯하다.

차의 이름

먼저 제조방법에 따라 불발효차인 녹차, 반발효차인 우롱차(또는 황차), 완전발효차인 홍차로 구별된다. 그리고 크기와 모양에 따라서는 참새 혓바닥처럼 가늘고 여린 작설차(雀舌茶)와 매 발톱처럼 억세고 야무진 모양의 응조차(鷹爪茶)로 나뉜다. 또한 작설차는 채취 시기와 잎의 크기 별로 다시 세작(細雀) 중작(中雀) 대작(大雀)으로 나뉜다. 채취시기에 따른 이름으로는 청명차(4월5일경) 우전차(곡우 이전) 곡우차(4월20일경) 입하차(5월6일경) 소만차(5월21일경) 망종차(6월6일경) 등이 있다.

맛깔스런 돌솥오곡밥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몰라요"
대중식당의 돌솥오곡밥. 갖은 잡곡과 견과류를 돌솥에 넣고 갓 지어낸 이 오곡밥은 밑반찬으로 나온 산나물과 함게 비벼서 먹는다.
쌍계사 들머리에 위치한 용강마을과 석문마을에는 음식점이 밀집해 있다.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 물길을 품은 곳이라, 하나같이 은어회와 산채정식이 주된 메뉴다. 그러나 석문마을의 백운장여관 옆에 위치한 대중식당(0595-883-1669)은 돌솥밥 전문점을 내세운 곳이어서 눈길을 끈다. 주인 김화순씨(53)의 시어머니가 40여년전 문을 연 뒤로 줄곧 같은 장소에서 변함없는 맛으로 손님을 끈다. 특히 흰쌀에다 흑미 차좁쌀(또는 메좁쌀) 수수 보리 대추 잣 밤 은행 완두콩 등의 갖은 잡곡과 견과류를 넣고서 갓 지어낸 돌솥오곡밤이 맛깔스럽다. 거기에다 깊숙한 지리산의 어느 산자락에서 채취한 두릅 참취 고사리 죽순 가죽(가죽나무의 여린 잎) 돌나물 등의 산나물이 밑반찬으로 나오는데, 자연산 산나물의 특유한 향취가 여독으로 깔깔해진 입안을 상쾌하게 해준다. 돌솥밥(5,000원) 돌솥비빔밥(5,000원) 돌솥오곡밥(6,000원)이 있으며, 근방의 다른 음식점들과 마찬가지로 은어회와 산채정식도 내놓는다. 계원마을에서 야생 차밭을 앨구는 황인선씨(0595-883-1693)에게 연락하면 집에서 전통방식으로 만든 작설차를 구할 수 있다. 값은 2만원(중작)에서 6만원(우전)에 이르기까지 찻잎의 채취 시기와 크기에 따라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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