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 꽃샘바람 잦아드는 이맘때면 고창 선운사 동백숲엔 양갓집 규방의 색시 같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이른 봄에 기운차게 꿈틀대는 대지의 자양분을
가득 머금었다 피는 꽃이라,
진홍의 꽃빛이 유난히 선명하고도 탐스럽다.
때마침 선운사 동구 밖에는 눈이 부시도록
화사한 벚꽃터널이 생겨나고, 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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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하게 고생스런 실뱀장어 잡이
칠산바다에 저녁노을이 드리워질 무렵 실뱀장어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는 이동섭씨(48) 내외.
하루 두번씩 물때에 맞춰 바다에 나가느라 차로 5분거리인 선운사의 동백꽃을 구경할 짬조차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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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곳곳에는 상춘객들의 발길이 넘쳐난다.
그러나 동백꽃 벚꽃 만발한 선운사의 봄날이
아무리 곱고 화사해도, 정작 선운사의 지척에
사는 어민들은 꽃구경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다. 하루에 두번씩의 물때에 맞춰 밤낮
없이 실뱀장어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기 때문이다.
1kg에 200만원 안팎을 받고 양만장
(養鰻場)으로 팔려나가는 실뱀장어는 이곳
어민들의 주 수입원. 곰소만을 끼고 있는 고창군
심원면 상전마을의 이동섭씨(48) 내외도
요즘은 뭍에 머무는 시간보다 바다에 떠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이씨의 실뱀장어
잡이 자릿그물(定置網)은 곰소만의 한가운데
에 설치돼 있는데, 그 지점의 바다는 간조
때마다 강줄기처럼 좁아진다.
상전마을을 비롯한 곰소만의 여러 갯마을에
는 선착장이 드물다. 그토록 광활하던 곰소
만의 바다가 하루에 두번씩 바닷물이 썰 때
마다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넓은 개
펄과 실낱 같은 물길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
니 실뱀장어가 들어오는 밀물때에 맞춰 바다
로 나가려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위
에 배를 정박할 수밖에 없다. 이씨 소유의
0.6t짜리 FRP보트도 마을에서 15분 가량 떨
어진 얕은 바다 위에 떠 있다. 그런데 배가
있는 데까지 들어가는 일부터가 고역이다.
보름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의 해거름
녘, 야간작업을 하러 바다로 나가는 이씨 내
외를 따라나섰다. 맨땅처럼 다져진 개펄 위
를 얼마쯤 걸어가니 어느새 바닷물이 발목을
지나 허리까지 차올랐다. 물이 가슴께에 이
르러서야 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다시 5분쯤 더 내달린 끝에 이씨네 바
지선에 닿았다. 그물 근처의 바다에 띄워 놓
은 바지선에는 밀물때를 기다리는 동안 먹고
자거나 쉴 수 있는 시설물들이 갖춰져 있다.
"이 바지선 땜시 밤일도 참 편해졌당게요.
난로도 있제 '까스렌지'도 있제, 먹고 자는
건 하나도 불편한 게 없어요. 전에는 손바닥
만헌 쪽배에다 비닐천막을 쳐놓고 물때를 기
다렸는디, 파도 치고 바람 불먼 배가 어띃게
나 지우뚱거리는지 배멀미가 날 정도였당게
요. 지금맹키로 날씨나 따쉈간디요? 그물을
보기도 전에 손은 곱아불고 몸뚱아리는 뻣뻣
해지고, 참말로 그때는 징허게 고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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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리 270원
몸집이 실처럼 가늘고 작은 실뱀장어. 무게가 1kg이 되려면
6500∼7000마리를 잡아야 하는데, 요즘 시세로는
한마리에 평균 270원쯤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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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적엔 '징허게' 고생스러웠어도 벌이는 제법
쏠쏠했다. 이곳의 실뱀장어잡이는 정월
대보름 직후부터 시작해서 모내기 직전인 5월말까지
석달쯤 이어지는데, 실뱀장어잡이
20여년만에 요즘처럼 값이 헐했던 적도 없었다고
한다. 한창 좋았던 시절에는 하룻밤에
1kg(6500∼7000마리)씩이나 잡은 적도 있었는가
하면, 어느 해는 한 철에 2000만원을
벌어 1500평의 문전옥답을 장만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는 3월 내내 100만원, 4월에 들어서는
70만원(380g)밖에 벌지 못했다. 해가
갈수록 실뱀장어의 채포량(採捕量)이 감소하는데도
값이 오히려 떨어지는 이유는 중국산
실뱀장어의 수입이 크게 늘어난 탓이다.
바지선에 들여놓은 방안에서 이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밖을 내다보니 물이
쭉 빠진 개펄이 교교한 달빛 아래 드러났다.
그로부터 다시 두세 시간이 지난 뒤 바닷물
이 들기 시작하자 이씨 부부가 작업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어느새 개펄은 물속에 잠겨 버렸고,
홍수진 강물처럼 거센 바닷물이 갯고랑을
타고 밀려들었다.
바지선 근처의 두군데 물목에 설치된 이씨의
자릿그물은 열발과 아홉발짜리. 폭이 4m인
한발짜리 그물을 나란히 붙여 놓은 셈이니
전체 길이는 각기 36m와 40m나 되는 큰 그물이다.
실뱀장어의 몸집이 워낙 작고 가는
탓에 그물눈도 모기장처럼 촘촘하다. 실제로
모기장으로 만든 이 그물에는 실뱀장어보다
는 오히려 부유물이나 쓰레기, 그리고 전어
숭어 새우 뱅어 갯지렁이 등의 물고기들이
더 많이 걸려들었다.
이씨가 그물 끝에 모아진 내용물을 넓적한
쳇불(체의 바닥부분)에 쏟아내면 부인 최정님씨(43)는
침침한 불빛 아래서 실뱀장어를
골라낸다. 그물 하나에 걸려든 실뱀장어는
열마리 안팎. 실뱀장어는 조류를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밀물이 들어오는 동안에는 그물
을 거두고 다시 드리우기를 두세 차례씩 되풀이
한다.
그리고 애초에 물 밖으로 반쯤 드러나 있던
그물이 물속으로 잠기면 작업을
끝마친다. 수면 가까이에서 헤엄치는 실뱀장
어는 물속에 잠긴 그물에는 잘 걸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자리를 옮겨 열발짜리 그물을
하나씩 거뒀으나 그물마다 눈에 띄는
실뱀장어는 아홉발짜리의 반도 되지 않았다.
내내 신명나게 일하던 이씨 내외도 조금은
지친 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찬바람을 맞으며 배 위에 서 있는 시간이 서
너시간쯤 지나자 손발이 몹시 시려웠다. 물에
젖은 장갑을 낀 채 작업하는 이씨 내외는
오죽할까. 최씨더러 춥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춥긴 춥죠. 허지만 '히라시'(이곳 주민들이
실뱀장어를 지칭하는 말)가 많이 잽힐 때는
아무리 추워도 추운지 몰라요"라고 했다.
거세게 밀려들던 조류도 눈에 띄게 흐름이
약해졌다. 내심 '끝났으면' 하던 참에 이씨가
"그만 돌아가자"면서 뱃머리를 육지 쪽으로
돌렸다. 바닷물이 허리쯤 차오르는 지점에
이르자 다시 배에서 내려 물속에 잠긴 뻘밭
길을 걸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우뚝한
선운산이 실루엣을 드러내고, 가로등 불빛만
아스라히 보이는 상전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