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 인제군 남면 부평리에 사는 박광준씨(46)는 소양호에서 민물고기를 잡는 어부다.
열두살 때부터 어부생활을 시작했다는 그가 소양호 언저리의 이 마을에 뿌리내린지는
올해로 25년째. 그가 이곳에 정착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기구한 세상살이는 가히 한편의
드라마라고 할 만하다.
원래 박씨는 운길산(610m) 기슭에 자리잡은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시우리에서 태어났
다. 첩첩한 산자락에 둘러싸인 궁벽한 산골
마을이었지만 그의 집은 경제적으로 여유로
운 편이었고, ‘배울 만큼 배운 부모’의 보살
핌도 각별했다. 하지만 그처럼 단란했던 집
안은 그가 세살 때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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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터전 소양호
인제군 남면 부평리에 사는 어부 박광준씨가 피라
미와 끄리를 잡는 낭장망을 끌어올 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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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어머니마저 네
형제를 남겨둔 채 가출했던 것.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된 사형제는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
졌다. 두 형은 큰집으로 들어가고, 두살 아래
의 젖먹이 동생은 어느 집엔가로 입양됐다.
박광준씨는 서울 근교의 한 고아원에 맡겨졌
다.
“서오릉 부근의 고아원에 있었는데, 학교 갈
나이가 돼도 공부는 안시키고 맨날 장사만
시켜요. 주로 구파발에서 서대문이나 광화문
까지 오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왔다갔다 하면
서 차 안에서 껌을 팔았지요. 하루에도 매를
맞지 않는 날이 없는데다, 하루 두끼를 멀건
강냉이죽만 먹고 껌을 팔러 다니니 늘 배가
고프더라고요. 그래도 눈에 띄지 않게 감시
하는 사람이 늘 따라붙기 때문에 몇년 동안
은 도망칠 생각조차 못했어요.”
그러다 마침내 열살 되던 해 세명의 동갑내
기 원생들과 함께 탈출을 감행했다. 일행 중
한명은 다시 고아원으로 붙들려 갔지만, 탈
출에 성공한 세 사람은 제각기 살길을 찾아
헤어졌다. 그는 두 형이 있는 고향의 큰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숯과 장작 따위의 땔감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큰집에서의 생활은 고
아원보다 나을 게 없었다. 눈만 뜨면 산에서
싸리나무를 베어다 숯포대를 엮거나, 사촌형
제들과 함께 서울 남대문시장까지 숯과 장작
을 짊어지고 나가서 팔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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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틀녘의 절경
동틀녘의 소양호 풍경. 동이 트기도 전에 호수 복판으로
달려온 남면 부평리의 어부 이형규씨(46)가 빙어잡이
낭장망을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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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배고픈 생활을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열두살 때에 다시 무작정 큰집을 뛰쳐나와
북한강변의 강촌(江村)인 송촌리로 갔다. 거
기서는 민물고기 잡는 어부를 따라다녔는데,
그에게 고기잡이는 “그때까지 해본 일 중에
서 가장 편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배를 곯지
는 않을 것 같은 일”로 여겨졌다. 그때로부
터 어부의 삶이 시작됐다.
그러나 두어해 뒤에 상수원보호구역인 송촌
리에서는 더 이상 고기를 잡을 수가 없게 됐
다. 그래서 옮겨간 곳이 남한강을 사이에 두
고 이포나루와 이웃한 여주군 대신면 천서
리. 당시 여울이 많은 그곳에서는 배터리를
사용하는 불법어로가 성행했다.
여울 위쪽에
서 ‘빳데리조(組)’가 물고기들을 기절시키면
아래쪽의 「그물조「가 물 위에 떠내려오는 고
기들를 떠담는 방식이었다. 그물조의 일원이
던 박씨도 “불법이라는 것은 알지만 남들도
똑같이 저지르는데다 당장에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터라 별다른 죄책감없이” 7년 동안
그 일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경찰의 단속망에 걸렸는
데, 다른 일행은 모두 달아나고 박씨만 「억울
하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가 경찰서 유치장
에 갇힌지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그와 함께
고기잡던 어부 하나가 면회를 왔다. 박씨를
화장실로 데려간 그는 “여기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어디로 멀리 달아나라”면서
돈 만원을 손에 쥐어줬다. 화장실 창문을 통
해 경찰서를 빠져나온 박씨는 정신없이 동쪽
으로 내달렸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길도 없는 산
등성이만 타고 걸었어요. 꼬박 이틀 동안을
아무 것도 못먹고 걷다 보니 더 이상은 배가
고파 못가겠더라고요. 그래서 뭣 좀 먹으려
고 산 아래쪽의 마을로 내려왔지요.”
당시 그가 당도한 마을은 소양호를 끼고 있
는 인제군 남면 남전리였다. 그곳에서 만난
어부에게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매달렸다. 남면 어촌계
장이던 그는 박씨의 간청을 받아들여 인적
드문 강가에 움막을 짓고 살게 했다.
박씨는
염소를 치거나 그물 걷는 일을 도와주면서 3
년을 숨어 살았다. 공소시효가 끝나자 그는
어촌계장이 마련해준 내수면 어업권과 노를
젓는 거룻배 한척을 움켜쥐고 다시 바깥 세
상으로 나갔다. 얼마 뒤에는 일곱살 아래의
고운 처자와 만난지 한달만에 가정을 꾸리는
경사가 뒤따랐다. 비록 강가의 허름한 움막
에 꾸린 신접살림이었지만, 박씨로서는 실로
20여년만에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두른 셈이
었다.
소양호를 새로운 생계의 터전으로 삼게 된
그는 여주에서 7년 동안 남한강의 여울목을
오르내리며 사용했던 동력선을 갖고 돌아왔
다. 남면 어촌계원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동
력선을 타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다른 어
부들도 너나없이 동력선을 들여왔지만, 유일
하게 동력선을 갖고 있던 그 시절은 “남들은
모두 권총 가지고 싸울 때 나만 기관총 들고
싸우는 격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곳에서의 어로작업은 총성없는 전쟁
이나 다름없다. 수면과 어족자원은 한정돼
있는 반면 고기 잡는 어부들은 넘쳐나기 때
문이다. 그러니 ‘누가 어느 지점에 그물을 쳐
서 크게 재미봤다’는 소문이 퍼지면 수십개
의 그물이 그 지점에 집중적으로 설치된다.
심지어 그물을 아슬아슬하게 타넘지 않고서
는 배가 지나갈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그물
이 밀집되기도 한다.
그러나 물고기들의 습성과 길목을 잘 아는
노련한 어부들은 다른 사람들의 그물이 밀집
해 있는 곳에는 그물을 드리우지 않는다. 그
런 곳에서는 작업하기도 수월하지 않을 뿐더
러 배의 스크류에 그물이 손상될 우려가 있
기 때문이다. 더욱이 박씨처럼 경험 많은 어
부들은 계절과 어종에 따라 고기들이 잘 꾀
는 포인트와 길목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므로
굳이 남들을 쫓아갈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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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인생 25년
소양호의 어부 박광준씨. 열두살 때부터 어부생활을 시작
했다는 그가 소양호 언저리에 뿌리내린지는 올해로 25년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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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획량이 아무리 많은 철에도 소양호
의 어부 한사람이 한꺼번에 여섯개 이상의
그물을 설치할 수는 없다. 그뿐 아니라 어종
에 따라 각기 형태가 다른 그물의 그물눈도
치어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가 돼야 한
다.
또한 일부 어종에 대해서는 금어기도 설
정돼 있다. 이를테면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
까지 한달간은 쏘가리를, 4월1일에서 10월30
일 사이에는 빙어를 잡을 수 없다. 도한 천
연기념물로 지정된 황쏘가리는 사시사철 포
획이 금지된다. 금어기는 아니지만, 장마철이
코앞에 닥친 6월에도 그물을 설치하기 어렵
다.
장마철과 집중호우에 대비해 수위를 크
게 낮추는 바람에 소양호의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집중호우가 잦은 7, 8월에는 갑자
기 불어난 물에 그물이 떠내려가는 일이 흔
해 한두 개의 그물만 설치한다. 물에 젖은
그물의 무게는 하나에 1t 가량 되는데, 집중
호우로 물이 갑자기 불어날 때 그물을 재빨
리 거둬들이지 못하면 순식간에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사정을 두루 감안하면 일년 중 너
댓달은 고기를 잡기가 어렵다. 박씨가 고기
잡이로 얻는 수입은 한해에 대략 2000만∼
2500만원 가량 되는데, 그 가운데 반은 겨울
철의 빙어잡이로 벌어들인다. 하지만 올 겨
울에는 예년에 비해 절반밖에 벌지 못했다고
한다.
빙어는 날씨가 춥고 얼음이 두껍게 얼
어야 많이 잡히는데, 올 겨울은 유난히 푸근
한 날이 계속되는 바람에 어황이 썩 좋지 않
았다. 그래도 박씨는 "처자식 먹여살리고 애
들 가르치기엔 별 어려움이 없다"면서 "허리
가 끊어지게 배고프고 힘겨웠던 어린시절에
비하면 요즘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며 웃
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