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지리산이나 설악
산 같은 명산의 어느 한자락에 파묻혀 사는
산장지기를 꿈꾸게 마련이다. 세속의 영욕과
인연을 털어버리고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산
장지기의 삶은 산꾼들뿐 아니라 모든 도시인
들이 동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얻
기보다 버리기가 더 어려운 게 인간사인지
라, 세속의 모든 영예와 관계를 끊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산장지기를 꿈꾸는 이는 많
아도 그 꿈을 이룬 사람은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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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 ‘산꾼’
향적봉 산장 앞에서 등산객들과 함께 일출을
감상하고 있는 허의준씨(맨 오른쪽). 잿빛 구름과 소백산맥의 중첩된 산자락 사이로
펼쳐진 햇살이 황홀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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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德裕山) 향적봉(1614m) 기슭에 자리
잡은 ‘산악인의 집’ 관리인 허의준씨(70)는
그런 꿈을 이룬, 몇 안되는 산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이 산장의 관리인을 처음 맡
은 것은 향적봉에 유인대피소가 세워진 1983
년 9월.
“그전에는 관공서에 윤활유 등을 납품하는
사업을 했는데, 같은 일을 오래 하다보니 뭔
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지더군요. 사업을 정리한 뒤 마음도 추스리
고 새로운 일도 구상할겸 해서 1년간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때 지리산 어느
산장에 들렀다가 덕유산에 유인대피소가 들
어설 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됐지요.”
지리산에서 돌아오자마자 허씨는 대한산악연
맹 전북지부를 통해 산장 관리인을 자청했
다. 산에 대한 그의 열정과 고집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신혼시절부터 체
득한 아내는 그의 선택을 반대하지 않았다.
허씨도 아내보다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생전에 꼭 하고 싶
은 일을 하다가 죽고 싶다”는 소망이 더 간
절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산에 미쳐 있었던
상태”였다.
그가 산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고향인 황해도 금천에서 초등학
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5학년 때 개성으로
전학했는데, 당시 큰형님과 함께 개성 송악
산을 오르내리면서 산의 넉넉함과 산행의 즐
거움에 매료됐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한동안 산을 잊고 지낼 수밖에 없었
다. 해방 직후에 고향 땅의 논밭을 모두 몰
수당해 지주 집안이던 그의 가족들은 갑자기
생계가 막막해졌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서울에 정착한 그는 낮에는 돈
벌이가 될 만한 일을 하고, 퇴근후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러
다 6·25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군에 입대했
고, 55년 대위로 예편할 때까지 산행할 기회
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결혼 이듬해에 시작
한 사업이 웬만큼 자리를 잡자 ‘산행병’이 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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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길어오는 허의준씨
향적봉 산장의 관리인 허씨가 산장에서
200m쯤 떨어진 샘터까지 내려가서 물을 길
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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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산에 올랐다. 서울 근교의 북한산 도봉산은
말할 것도 없고, 지리산 설악산 두타산 태백
산 소백산 등 전국의 명산이란 명산은 죄다
섭렵했다. 그는 특히 지리산의 웅장함과 설
악산의 수려함에 매료돼 각각 250여차례나
오르내렸다. 70년대 후반부터 8년 동안 한국
산악회의 일반지도위원장을 맡으면서 '허대
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처럼 그는 이미 산에 푹 빠져 있었기에 바
깥세상에는 아무런 미련도 두지 않고 덕유산
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산장지
기 생활을 해보니 생각했던 만큼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하염없이 가슴을 파고드는 외로움
과 고립감이었다.
“처음에는 어찌나 외롭고 쓸쓸하던지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그래도 견
딜 만한데, 어쩌다가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찾아왔다가 훌쩍 떠나버리면 괜히 눈물이 나
더라고요. 사실 산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자
기와의 싸움입니다. 그 싸움에서 이기려면
뭔가 늘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사진촬영이었다. 예전에
도 산행할 적마다 카메라를 들고 나서기는
했지만 그저 기념사진이나 찍는 수준이었다.
그런 허씨가 짧은 기간에 프로급의 실력을
쌓은 것은 피사체를 바라보는 안목이 탁월한
데다, 덕유산의 변화무쌍한 풍광을 늘 가까
이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그의 카메라에 잡힌 덕유산의 아름다움은 산
악 전문잡지를 비롯한 여러 매체와 달력 엽
서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
다. 지난 94년 제1회 국립공원사진공모전에
서는 그의_작품이 대상을 받기도 했다. 적어
도 덕유산에 관해서는 최고의 사진가로 인정
받은 셈이다.
그러나 그는 “사진촬영은 취미에 불과하고
내 본업은 산장을 지키는 일”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래서 허씨는 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산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
지는 않는다고 한다. 산장을 오랫동안 비워
두면 이곳을 찾은 그 누군가가 불편을 겪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이따금씩
조난사고가 발생하는 겨울철에는 어느 때,
어떤 이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할지 몰라
산장을 비워두기 더욱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덕유산은 눈이 많이 내릴 뿐 아니라
기상변화가 유난히 심한 곳이어서 겨울마다
등산객들 중 한두명은 조난사당하곤 한다.
그때마다 조난현장에 맨먼저 달려간 허씨 덕
분에 목숨을 건진 등산객도 여럿이다.
그런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그인지라,
그의 작품 속에 담긴 피사체도 산장과 향적봉 주변
이거나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이 대부분이다.
요즘 들어 그는 카메라를 잡는 일이 부쩍 줄
었다. 제한된 공간에서 사진을 찍다 보니 더
는 찍을 만한 것도 없을 뿐더러 “이제는 모
든 일에 욕심부리지 않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허씨의 산장지기 생활은 단조롭고 여유로우
면서도 하루 일과는 대체로 규칙적이다. 새
벽 6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먼저 20ℓ들
이 물통을 지게에 지고 200m쯤 떨어진 샘터
에서 물을 길어온다. 샘터까지의 길이 멀진
않지만, 심하게 비탈진데다가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 젊은 사람들에게도 쉬운 길은 아
니다.
그런 길을 그는 잘 닦인 평지를 걷듯
오르내린다. 아침식사는 빵이나 비스켓에 커
피를 곁들여 간단히 때운 뒤에 산장과 주변
을 청소한다. 그는 향적봉 산장 주변에 펼쳐
진 자연을 자신의 정원으로 여긴다. 그러니
산장 주변은 물론이고 향적봉 정상까지도 늘
깨끗하다.
청소를 끝내고 난 뒤에는 한가로운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된다. 더욱이 등산객들의 발길
이 뜸한 요즘에는 넓은 산장에서 홀로 지내
는 날도 많다. 그런 날이면 외로움과 추위를
떨치기 위해 술잔을 기울일 법도 하건만, 그
는 산장 안에서는 좀체 술을 마시는 일이 없
다. 찾아오는 손님이 있든 없든 이 산장이
자신의 직장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간혹 산장에서 하룻밤 묵는 등산객들이 술잔을 권
하는 경우에도 그는 ‘근무중’임을 내세워 정
중히 사양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이 산장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은 술을 아예 끊을 수밖
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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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내 친구
눈 덮힌 덕유산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허의준씨. 중봉 삿갓봉 무룡산 남덕유
산으로 이어지는 덕유산 능선뿐 아니라 지리
산 반야봉까지도 저 멀리 아스라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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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으로만 따지면 이 산장이 그리 좋은 직
장은 아닐 성싶다. 요즘처럼 등산객의 발길
이 뜸한 철에는 하루 매출액이 5만원을 넘지
못하는 날이 다반사다. 더구나 국립공원관리
공단에 지불해야 하는 임대료가 1년에 400여
만원이나 되고, 매점의 물건을 인력이나 헬
기로 운반할 때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밖에 전기료와 전화료까지 모두 제하고 나
면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인건비도 되지 않
는다. 그러니 세속의 잣대와 욕심을 모두 버
리지 않으면, 또 산에 미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허씨는 “그래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행복이 아니겠는가”고 반문하면서 “이 생활
이 정말 편안하다”고 했다. 그런 허씨를 보
면서 문득 덕유산의 크고 넉넉한 산세가 떠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