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 횡성군 갑천면 포동리의 작은 골짜기 '고래골'에는 늘 희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골짜기의
나직한 산자락에 등을 대고 앉은 숯가마들이 뿜어내는 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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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 만들기
고래골에서 숯을 굽는 서석구씨는 숯가마에서 끄집어낸 숯을 흙으로 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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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아홉개의 숯가마가 들어서 있고,
목상(木商·목탄업자) 최흥원씨(60) 밑에 딸
린 ‘숯쟁이’들이 그 숯가마들을 하나씩 맡아
일년 내내 숯을 구워낸다. 더 정확하게 말하
면, 이곳은 ‘강원 참숯’의 사장인 최씨에게
고용된 아홉명의 숯쟁이들이 숯을 생산하는
곳이다. 30여년 숯일을 해온 서석구씨(63)도
그중 한사람인데, 오랫동안 그를 겪어본 최
씨는 “숯굽는 일에 관한 한 강원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전문가”라며 서씨를 치켜
세웠다.
서씨는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덕유산 자락
에 자리잡은 산골에서 태어나 열여섯살까지
그곳에 살았다. 하지만 그에게 고향은 아름
답거나 따뜻한 곳으로 기억돼 있지 않다.
"세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갖은
설움을 다 받고 컸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들어간 초등학교도 중도에 그만두고 열여섯
살 되던 해 홀로 고향을 떠났다. 부평초 같
은 뜨내기 삶이 시작됐다.
그가 타향살이의 첫발을 내딛은 곳은 인제군
원통.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한 덕택에
돈도 얼마쯤 모았다. 웬만큼 생활기반이 잡
히자 스물일곱살 때엔 또래의 처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에 작은
가게도 하나 얻었다.
그러나 “성격도 잘 맞
지 않는데다 애도 생기지 않아서” 결혼한지
3년만에 갈라섰다. 첫 결혼이 실패한 뒤로는
“정나미가 떨어져서” 더이상 원통에 눌러 살
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래서 새 일자리
를 찾아 원주로 갔다.
“그때 원주나 횡성에는 이 산 저 골짜기마다
숯가마가 흔했지만, 숯굽는 일이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고달픈 데다 숯쟁이가 천대받던
시절이라 숯일 하려는 사람이 드물었지요.
그러니 우리같이 가진 것 없고 많이 배우지
도 못한 사람한테는 숯일이 가장 쉽고 배우
기도 쉬운 일거리였지요.”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한곳에 눌러앉는 게
아니라 숯감_나무를 구하기 쉬운 산자락들
을 수시로 옮겨다니며 숯을 구웠다. 그러니
목상을 따라 어느 산골짜기에 들어선 숯쟁이
들은 먼저 자신이 거처할 움막부터 지어야
했다. 팔뚝 굵기의 통나무로 집 틀을 대충
엮은 다음 억새 지붕을 올리고 밑바닥에 온
돌과 아궁이를 설치하면 한동안 지낼 수 있
을 움막이 완성됐다. 그러고 나면 곧바로 숯
가마를 짓는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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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 열풍에 일할 맛 나죠”
서씨가 동료의 도움을 받아 참나무를 숯가마 안에 차곡차곡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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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가마는 흙과 돌로 벽을 쌓고, 흙으로 지붕
을 덮은 다음 창굴 세개와 굴뚝 두개를 뚫어
놓은 형태다. 앞쪽의 벽에는 숯감 나무를 넣
거나 숯을 끄집어내는 아궁이를 만들어야 한
다. 숯가마를 지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붕이 내려앉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먼저
굵은 통나무로 창틀을 세운 다음 자잘한 나
무 걸대를 걸쳐서 철주를 매달아야 한다. 그
리고 철주 위에는 철망을 깔고, 그 위를 나
뭇가지로 덮은 뒤 흙으로 초가지붕처럼 도도
록하게 입혀야 지붕이 내려앉지 않게 된다.
대략 사방의 너비가 7, 8자에 높이가 6, 7자
쯤 되는 규모의 숯가마를 짓는 데 보름쯤 걸
린다.
사실 숯굽는 일은 단순노동이라 별다른 기술
이 필요없지만 숯가마를 짓는 일만은 아무나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고래골
에 새 숯가마를 들이면 경험 많은 서씨가 숯
가마 짓는 일을 주도하게 마련이다.
숯가마를 다 지은 숯쟁이들은 숯감 나무를
베어내고 져 날라야 했다. 예전에는 왼종일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숯감 나무를 베
고 옮기는 일까지 모두 숯쟁이의 몫이었다.
서씨는 숯굽는 일을 시작한지 얼마 뒤에 지
금의 부인과 재혼해 다시 가정을 꾸렸다. 그
러나 집 한칸도 얻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처지라, 남들처럼 단란하고 살가운 신접살림
은 꿈꿀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처자식들
을 데리고 산중의 움막을 옮겨다니며 숯을
구워야 했다.
그런 숯쟁이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횡성 원
주 일대의 산골짜기 치고 밥솥 한번 걸어보
지 않은 데가 드물었고, 멀리 충주 김천 동
두천 등지의 낮선 산자락에까지도 고달픈 삶
의 자취를 남겼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즈음에 살림집을 하나 얻은 뒤로는 온 가족
과 함께 떠도는 생활도 끝나긴 했지만, 지금
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오고 가
족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라고 했다.
서씨가 고래골에 자리잡은 것은 20여년 전.
주로 원목을 베어 팔던 목상 최씨가 목탄업
자로 전업하며 그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한 곳에 터전을 잡으면 숯감 나무를 베어내
고 나르는 일도, 유랑민처럼 떠돌아다니는
일도 없어 그에게는 고맙고도 기꺼운 제의였
다.
그래서 “한눈 팔지 않고 남들보다 더 부
지런하게 밤낮없이 일했다”고 한다. 얼마 전
부터는 외아들 정원씨(27)도 이곳에서 그와
함께 숯일을 하고 있는데, 서씨는 내심 아들
만은 숯일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숯굽는 사
람이라고 괄대받던 기억이 여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부지런하고 능숙하
게 일하는 아들을 대견스러워하는 듯했고,
정원씨도 숯굽는 일만은 전문가로 인정받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눈치였다.
요즘에는 숯굽는 일도 수월해졌다. 숯감을
확보하고 숯을 파는 일은 목상이 알아서 하
기 때문에 숯쟁이는 그저 열심히 숯만 구워
내면 된다. 그들의 일상생활도 예전과는 크
게 달라졌다. 깊은 산중에 묻혀 일하던 때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외로움과 숯일의 고달픔
을 술로 달래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목돈이
라도 손에 쥐면 산 아래 색줏집으로 달려가
하룻밤 새에 죄 탕진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요즘의 젊은 숯쟁이들은 하루일과를
마치면 술판을 벌이기보다 제 집과 숙소에서
편히 쉬기를 더 바란다고 한다. 사람을 구하
지 못해 숯가마를 놀리는 일은 더이상 없다
는 점도 새로운 변화 중 하나다. 다들 형편
이 어려워진 요즘에는 숯일 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을 뿐더러 이 일을 천하게
여기는 이들도 없다. 특히 요즘에는 때 아닌
‘숯 열풍’이 불어 숯을 구워내기가 무섭게 팔
려나간다.
숯의 공급이 달리게 되면서부터 고래골의 숯
가마에서는 숯굽는 기간이 더 짧아지는 듯했
다. 숯감에 불을 지피고 나서 대체로 이레가
지나면 아궁이를 열고 숯을 꺼내는데, 요즈
음에는 창굴의 크기를 조절해 대엿새만에 숯
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러면
아무래도 숯의 품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차례에 하루이틀씩만 단축
해도 한달이면 한두 차례쯤 더 숯을 구워낼
수 있기 때문에 목상과 숯쟁이들은 그만큼의
이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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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익는 고래골
숯가마가 즐비하게 들어선 고래골 풍경. |
어쨌거나, 희뿌연한 연기가 푸르스름한 빛으
로 바뀌면 숯을 꺼낼 때가 됐음을 알게 된
다. 숯가마 속의 숯덩이는 아궁이를 열기 전
까지는 시커먼 색을 띠다가 공기가 들어가면
서 금세 빨간 불덩이로 변한다. 형체만 남아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숯덩이들은 '부장대'
(또는 거용대)라고 하는 긴 쇠갈고리로 긁어
내는데, 서씨의 말에 따르면 이 작업이 가장
고달프다고 한다.
“허리를 바짝 구부리고 빨간 숯덩이를 똑바
로 쳐다보며 숯을 끄집어내야 허니, 허리는
말할 것도 없고 눈도 바늘로 찌른 듯이 아파
요. 게다가 날씨가 더울 때는 숯에서 뿜어나
오는 화기 때문에 땀띠가 가실 날이 없어요.
숯일을 하기에는 겨울이 제일이죠.”
밖으로 끄집어낸 숯덩이는 곧장 흙으로 덮어
불기운이 서서히 사그라지게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일반 가정과 갈비집에서 주로
쓰이는 ‘백탄’이다. 반면에 숯가마 안에 그대
로 둔 채 불기운을 죽인 것은 '검탄'이 된다.
가스가 빠지지 않고 화력이 좋은 검탄은 주
로 공업용으로 쓰인다.
숯가마에서 구워낸 숯은 상-중-하 세 등급
으로 선별해 30㎏들이 포대에 담으면 한차례
의 숯일이 모두 끝난다. 숯가마 하나에서는
한번에 40~50포대 가량이 나오는데, 중간 도
매상과 일반 소비자들에게 상등품 1포대당 3
만2000∼3만5000원씩에 팔려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숯쟁이에게는 1포대에 7200원이 노임
으로 떨어진다. 처음 숯일을 시작했을 때에
150원씩을 받았던 서씨인지라, 그 돈이 적다
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서씨는 숯굽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는 듯했
다. 돌이키기에도 끔찍할 만큼 곤고한 시절
도 있었지만, 그래도 숯일 덕택에 자식들을
모두 거둘 수 있었고 늦게나마 집도 한채 장
만할 수 있었다. 더구나 숯일은 "일하다가도
술생각이 간절해지면 한잔 하고, 그러다가
술기운이 오르면 한숨 자도 될 만큼 자유스
러운 일"이어서 더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그는 “숯을 구워낼 만한 기력이 있을 때까지
는 숯쟁이로 남을 것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