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14·충북 괴산 화양동계곡
  세상사 훌훌 털고 우암풍류 즐기세


  충 청북도가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이라면, 그 한가운데 자리한 괴산(槐山)은 「산고수청」(山高水淸)의 고을이다. 백두대간의 허리를 떠받치는 준봉들이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며 웅장하게 솟아 있고, 그 산자락과 골짜기를 굽이쳐 흐르는 물은 거울처럼 맑다.

특히 청천면의 화양동계곡은 산고수청한 괴산의 산수를 대표하는 절승(絶勝)이다. 넓고 깨끗한 반석(盤石)과 맑은 계류, 우뚝하게 솟은 기암절벽과 울창한 수림이 한폭의 진경산수화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일찍이 청화산인(靑華山人) 이중환도 「택리지」 에서 『금강산 남쪽에서는 으뜸가는 산수』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화양동의 산수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은 조선 중기의 대정치가이자 거유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89)이다.

화양동의 아름다운 풍광에 크게 매료된 우암은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 있을 적마다 이곳에 은거하며 주자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우암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화양동 첨성대의 암벽에
새겨진 선조의 친필
화양동에서도 특히 경치가 빼어난 아홉 군데를 통틀어 화양구곡 (華陽九曲) 이라 일컫는다. 경천벽(擎天壁) 운영담(雲影潭) 읍궁암(泣弓巖) 금사담(金沙潭) 첨성대(瞻星臺) 능운대(凌雲臺) 와룡암(臥龍巖) 학소대(鶴巢臺) 파곶(巴串)이 그것인데, 이를 명명(命名)한 이는 우암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1641∼1721) 였다. 맑은 물에 구름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2곡 운영담(雲影潭)은 주자의 「천광운영」(天光雲影)이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고, 3곡 읍궁암(泣弓巖)은 효종의 휘일(諱日·제삿날)에 우암이 엎드려 통곡했던 바위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속에 금빛 모래가 깔려 있다는 4곡 금사담(金沙潭)은 화양구곡 중에서도 가장 풍광이 아름답다. 더욱이 물가의 우둑한 바위 위에 우암의 독서재(讀書齋)였던 암서재(巖棲齋)가 옛모습대로 남아 있어 우암의 자취를 더듬는 이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아담한 이와당(瓦堂)은 효종 6년(1655)에 창건된 이래로 수차례에 걸쳐 중수를 거듭했다고 한다. 와당 뒤쪽에는 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쪽으로는 시야가 훤히 열려 있어 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가 있다. 누마루에 앉아서 주변 풍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300여년 전 우암의 포부와 풍류가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하다.

화양동에서의 은둔생활을 접고 다시 중앙의 정치무대에 복귀한 우암은 부침이 거듭되는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장희빈 소생의 왕자를 세자(경종)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다 제주도로 유배됐고, 마침내 숙종 15년(1689)에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숙종20년(1694)에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사후 5년만에 우암의 무죄가 인정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전국 도처에서는 우암을 제향(祭享)하는 서원이 44개소나 세워졌다.

그중 숙종21년에 권상하 정호 등 우암의 문인(門人)들이 노론 유생들과 합심해서 세운 화양서원은 조선 팔도에서도 가장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다. 서인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은거하던 곳에 세워진 사액서원(賜額書院) 인데다 명나라의 두 임금, 곧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신종(神宗)과 마지막 임금인 의종(毅宗)의 위패가 봉안된 만동묘(萬東廟)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동묘는 우암의 유명(遺命)을 받은 권상하 정호 등의 제자들에 의해 1703년에 창건됐다. 묘명(廟名)은 화양동 첨성대의 암벽에 새겨진 선조의 친필 「만절필동」(萬折必東·황하는 아무리 곡절이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에서 따왔는데, 이 말은 주로 충신의 절개는 결코 꺾을 수 없음을 뜻한다. 곧 「대명국」(大明國)에 대한 조선의 「신하된 도리」를 결코 그만둘 수 없다는 의미다. 당시에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크게 고조되어 있던 터라 만동묘를 끼고 있는 화양서원이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며 모두 머리를 조아리게 됐다. 훗날 서원철폐령을 불러온 화양서원의 횡포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이른바 「화양묵패」 (華陽墨牌)를 발행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수탈했고 서원의 요구를 거역할 때는 가혹한 형벌을 가했던 것.

파락호(破落戶) 시절 흥선대원군도 이곳에서 큰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만동묘에 들어가거나 그 앞을 지나가려는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입구의 하마소(下馬所)부터 거쳐야 했다. 만동묘는 대원군이 실각한 뒤인 1874년에 유림들의 상소로 부활됐으나 1908년에 다시 일본통감에 의해 폐쇄됐다. 그리고 1942년에는 건물마저 철거되어 청천면 주재소를 짓는 데 사용됐다고 한다. 현재 잡초가 무성한 만동묘와 화양서원의 옛터에는 주춧돌과 계단석, 그리고 묘정비(廟庭碑)가 남아있어 오만하고도 영화롭던 시절을 짐작케 한다.



§ 참조하세요

청풍명월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는 규장각의 윤아무개라는 학사와 함께 팔도 도민들의 성품과 기질을 네 자(字)로 함축성 있게 표현했는데, 충청도는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고 했다. 여유작작하고 모나지 않으며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충청도 사람들의 성품이 청풍(淸風)과 명월(明月), 곧 자연을 벗삼아 안빈낙도하는 선비를 닮았다는 뜻이다. 흔히들 쓰는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충청북도 사람들이 자기네 고장의 빼어난 산수를 자랑할 적에 이 말을 즐겨 쓴다.

화양묵패

조선 후기 화양서원에서 검은 도장을 찍어 발행했던 공문서. 처음에는 서원의 유지와 관리 업무를 위해 발행되는 단순한 공문서에 불과했으나, 화양서원이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뒤부터는 공포의 상징이 됐다. 이 묵패가 일단 발행되면 지방 수령들도 거역할 수 없었다. 고을 수령들에게는 주로 제수전(祭需錢)을 거둔다는 구실로 보내졌는데, 이를 거역하면 통문을 돌려 관직에서 축출시키기도 했다. 일반 백성들도 묵패를 받으면 이유 불문하고 논밭이라도 팔아 바쳐야 했다. 이를 어기면 서원에 끌려가 할당된 금품이 마련될 때까지 감금되거나 죽도록 매를 맞기 일쑤였다. 이런 악행과 폐단은 수차례 단속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까지 근절되지 않았다.


각연사 향내음에 마음씻고, 선유동 옥류에 몸씻고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433호)

괴산군 장연면 대성리의 심산유곡에 자리한 각연사(覺淵寺)도 내친 걸음에 한번 둘러볼 만하다.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 고찰에서는 산사(山寺)다운 적요함과 잘생긴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433호) 을 마주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광배(光背)와 좌대(座臺)까지 완벽하게 갖춘 이 비로자나불은 9세기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원만한 상호(相好)에 인상이 준엄한데다 매우 정교하고 세련된 솜씨로 조각되어 있다. 특히 어린이의 것처럼 곱고 부드럽게 표현된 팔과 손등이 오래도록 눈길을 붙들어맨다.

화양동계곡의 상류에 위치한 선유동계곡에는 탁족(濯足)이나 물놀이를 즐기며 무더위를 식힐 만한 데가 많다. 자연 풍광은 화양동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화양동의 상류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물도 맑고 찾아오는 이들도 많지 않다.

화양동계곡과 선유동계곡은 속리산국립공원 내에 있기 때문에 취사와 야영은 원칙적으로 지정된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계곡을 따라 청주 식당(0445-32-4581) 화양식당 (0445-32-4392) 선유동휴게소 (0445-33-8008) 등 민박을 겸한 음식점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어 숙식을 해결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Copyright(c) 1997 All rights Reserved.
E-mail: newsroom@mail.dong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