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애절한 정조의 思父曲
  최
근 대법원에서는 매우 인상적인 판결을 내렸다. 「법에 보장된
권리일지라도 천륜에 반 할 수는 없다」는 요지였다.
주위에 그 판결 을 마뜩찮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는 게 퍽 다
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되돌아보 는 기회가 됐다. 이를
계기로 모처럼 화성과 수원 일대를 둘러봤다. 이곳에는 조선 문예
부흥기의 주역이던 정조의 눈물겨운 효심이 발길 닿는 곳마다 어려있기
때문이다.
열살 때 아버지 의 억울 한 죽음을 목격했던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먼저 사도세자의 존호(尊號)를 장헌 (蔣獻)이라 하고, 묘호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바꿨다. 재위 13년(1789) 에는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휘경동)에 있 던 묘를 지금의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에 위 치한 화산으로 옮기고 묘호를 다시 현륭원 (顯隆園)이라고
했다.
효심이 남달랐던 정조는 영릉(英陵·세종릉) 을 천장(遷葬)할 때부터
사라진 묘제(墓制)를 되살려 어느 원(園)보다 정성스럽고도 화려 하게
현륭원을 꾸몄다. 봉분에는 모란과 연 꽃이 화사하게 조각된 병풍석을
둘렀는데, 이처럼 추존왕의 봉분에 병풍석을 두른 예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능 앞의 팔각장명등 (八角長明燈)에 새겨진 구름무늬와 매화-난
초-국화무늬도 화려하기 그지 없다. 또한 추 존왕의 묘인데도 능 앞의
좌우에 장검을 쥔 늠름한 무인석과 금관을 쓴 문인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 점도 이채롭다.
반면에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인 건릉(健 陵)은 소박한 편이다.
융릉과는 달리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기 때 문.
그러나 석물의 형태와 조각, 봉분 주변에 아늑하게 둘러쳐진 곡장(曲墻),
합장릉이면서 도 상석이 하나만 놓여있는 점 등은 융릉을 그대로
닮았다. 이처럼 부자(父子)의 유택(幽 宅)을 비교해 보면 정조의 효심과
정성이 얼 마나 극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생전에 아버지를 몹시 그리며 자주 능행길에 나섰던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 곁에 묻히기 를 원했다. 마흔아홉의 한창 나이로 재위 24년만에
정조가 승하하자 생전의 원대로 융릉 근처의 동쪽 언덕에 모셔졌다.
그러다가 순조21년(1821)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지금의 자리로 옮겨
합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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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심의 선돌 용주사 입구의 길가에 늘어서 있는 선돌.
이 선돌의 앞면마다 「부모은중경」이 한 구절씩 새겨 있어 부모님의 가없는 은혜를 되새기게 한다. |
융건릉에서 약 오리쯤 떨어진 용주사(龍珠 寺)에도 정조의 효성스런
마음이 구석구석 서려 있다. 원래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창건 된
갈양사가 있었다. 그러나 전란으로 소실 된 뒤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정조 14년 (1790)에 용주사로 거듭났다.
145칸에 이르는 대찰을 다시 세운 정조는 이곳을 현륭원의 능사(陵寺)로
삼아 아버지의 넋을 위로했다.
용주사는 옛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데, 왕명으로 세워졌기
때문인지 절의 구조 나 건물의 형태가 여느 사찰과는 사뭇 다르다. 먼저
천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궁궐 이나 관청의 대문 같은 삼문(三門)이
설치돼 있다.
삼문에서 천보루(天寶樓)로 이어지는 길가에 큼직한 선돌(立石)이 주욱
늘어선 풍 경도 매우 이채롭다. 선돌마다 앞면에는 「부
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 한구절씩 새겨져 있는데, 걸음을 옮길
적마다 한 구절씩 읊조 리며 부모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라는 뜻인
듯하다. 대웅전 앞에 서 있어야 할 석탑이 천보루 앞에 있는 점도
특이하다. 또한 궁궐 의 누각처럼 웅장한 천보루의 양 옆에는 사
대부집의 행랑채 같은 요사채가 길게 늘어서 있다.
2층 누각인 천보루 아래의 돌계단을 밟고 올 라서면 대웅보전 영역.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대웅보전은 당당하 고 튼실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대웅보전에 서 건물 자체보다도 더 눈길을 끄는
것은 후 불탱화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화의 음영기 법을 도입해 그렸다는 이 탱화는 단원
김홍 도의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당대의 「신필」 (神筆)이라는 단원의
솜씨답게 독특한 화풍 으로 실감나게 표현된 석가모니와 제자들의
표정이 강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시-서-화에 두루 능했던 정조는 『그림에 관한 일이 면 모두
홍도(弘道)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단원을 아끼고 신임해
단원에게 용 주사에 머무를 것을 명했다. 왕명으로 용주 사에 머무르던
단원은 후불탱화뿐 아니라 「」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지 금까지 용주사의 상징으로 전해오는 「불설대
보부모은중경」판(板)은 바로 단원의 원화(原 畵)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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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의 고려범종 (국보 제120호) |
용주사에는 그밖에도 여러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여겨 볼 만한 것으 로는 고려 범종(국보 제120호)을 들 수 있다. 이
동종은 본래 갈양사에 있던 것을 용주사 가 물려받은 것인데,
우리나라의 범종 양식을 충실히 따른 종으로 평가된다.
높이 144cm에 지름 87cm로 신라 종보다는 작은 편이다. 하지만 몸체에
당초문 연화문 비천상 삼존상 등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고, 고려
종으로는 처음으로 삼존상이 새겨져 있어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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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하세요
사도세자
1735∼62. 영조의 둘째아들로 이름은 선, 호 는 의재. 영조 11년에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태어나 두살 때 세자로 책봉됐다. 어릴 적부 터
영특했던 그는 효심이 깊고 도량이 넓어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열살 때
당시의 집권 파인 노론을 비판할 정도로 정치적 안목도 성숙했으며,
영조25년에는 부왕을 대신해 서 정(庶政)을 맡았다. 그러자 그를
싫어하는 노 론과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은 세자를 무고 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부왕에게 크게 꾸 지람을 받은 세자는 정신질환을 앓기도 한
다. 마침내 1762년 5월 세자의 비행을 고발 하는 나경언의 무고와 문씨의
부자 이간책 때문에 영조는 격분했다. 영조는 세자와 영 빈의
『살려달라』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세자 를 끝내 뒤주에 가둬 8일만에
죽게 했다. 자 식을 땅에 묻고서야 뒤늦게 자신의 비정한 처사를 후회한
영조는 「죽은 세자를 생각하 며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 를 내렸다.
부모은중경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그 은 혜에 어떻게 보답할지를
설법한 불교 경전. 「불설대보부모은중경」 (佛說大報父母恩重經)
이라고도 한다. 부모의 「열가지 은혜」(十大 恩)를 제시하고, 보은의
방법과 어려움을 구 체적으로 설명했다. 보은의 방법으로는 남에 게
베풀며 진리를 구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 지만, 불효하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이 경전은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 에 특히 많이
간행됐으며, 정조는 억울하게 죽임당한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 효심을
밝 히기 위해 이 경전의 내용을 목판에 새기게 했다. 이것이 1796년
제작된 용주사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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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수원성’ 둘러보고 쫄깃한 갈비맛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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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건축 백미 수원성의 북쪽 수문인 화홍문 |
정조의 눈물겨운 효심을 추념하는 화성 땅의 답사에서는 수원성(사적 제3호)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록된 수원성은 우리나라 성곽의
백미로 꼽히는 건축 물이다.
또한 정조시대의 가장 위대한 유적 일 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
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당대의 모든 과학기술과 역량이 동원되어 착공
2년반만인 정조 20년(1796) 9월에 완공된 이 성은 다산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감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수원성의 길이는 총 5.52km인데, 지형 의 높낮이와 굴곡에 따라 장엄하게
이어지는 성벽이 아름답기 그지 없다. 특히 성의 서문 인 화서문(보물 제403호)과
성의 북쪽 수문 (水門)인 화홍문 주변의 풍광이 빼어나다. 혼 잡한 도심에 자리잡은
수원성은 성벽을 따라 도보로 둘러보는 게 편리하다. 차를 세워두 기에는
화서문과 화홍문 주변이 좋다.
한때 삼남지방의 소장수들이 몰려들 만큼 대 규모 쇠전이 들어섰던 수원에는
소갈비집이 유난히 많다. 특히 경수산업도로변의 노송지 대와 42번 국도변의
원천유원지 입구에 몰려 있는데, 삼부자갈비집 (0331- 212- 3085) 과 원
두막갈비집 (0331 -211 -8606)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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