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다스 칼럼/“밤새 내 목은 안녕하신가?”

도스토예프스키 글 속엔 여기저기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일상에 파묻혀 행복한 단잠을 자고 있는 나의 영혼에 아픈 쇠못을 박습니다. 뭉크의 그림에 나오는 일그러지고 고통스런 얼굴들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스토예프스키는 광야에서 외칩니다. 아니 울부짖습니다. "인간이란 혼돈이다. 규정할 수 없다. 장마때의 강물처럼 온갖 쓰레기가 나뒹구는 흙탕물 그 자체다. 그러나 그 흙탕물도 일정한 성질은 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어리론가 끝없이 흐른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뒤엉켜 아우성치고 나뒹굴며 결국은 바다로 가서야 조용해진다는 것 이다."

이태백이의 허풍식으로 말한다면 삶은 '썩은 고름'입니다. 에스프리의 천재 이태백은 황하 를 지구의 몸덩어리에서 나오는 '누런 고름'이라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삶은 어디로 흘러 갑니까? 뒤엉켜 아우성치며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 곳은 죽음의 바다입니다. 그 곳에 가 야 비로소 조용해집니다. 잔잔한 바다같은 평화를 얻습니다. 자유를 얻습니다. 그래서 공동 묘지는 고요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아우성치던 그들도 죽어서는 조용합니다. 몇 명만 모여 도 목울대를 불끈거리며 핏발선 눈을 부라리던 그들도 이젠 소근소근 산 자들의 귀에 들릴 까 목소리를 낮춥니다. 노자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뿌리로 돌아가면 고요해집니다(歸根曰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신경림 시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세상은 온통 / 크고 높은 목소리만이 덮어 / 어느 것이 참이고 / 어느 것이 거짓인 줄을 / 가릴 수 없는 세월이 많다. / 밤차를 탄다. / 산바람 엉키는 간이역에 내리면 / 감나무에 매달린 새파란 그믐달 / 비로소 크고 높은 목소리 / 귓가에 걷히면서 / 작고 낮은 참 목소 리 / 서서히 들리기 시작한다. / 속삭임처럼 흐느낌처럼 /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한 다." (「밤차」전문)

생산! 생산! 곳곳에서 등 떼미는 나팔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 세상밖으로 내모는 시계 우는 소리'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듭니다. 밥 먹는 시간도 똥 누는 시간도 줄여야 한다고 다그칩니다. 자본은 결코 쉬는 꼴을 못 봅니다. 더구나 노는 꼴은 더 욱 더 못 봅니다. 머슴들은 잠시도 쉬어서도 놀아서도 안됩니다. 인간은 자본의 머슴이 되었 습니다. 자본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게 되었습니다. 도시를 좋아하는 자본을 위해 정 든 고향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이젠 자본 맘대로입니다. 자본의 칼은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 뒷덜미를 뎅강 쳐 버릴지 모릅니다. 아침마다 목을 한번씩 만져 봅니다. 밤새 내 목은 안녕하신가?

제발 천천히 좀 살고 싶습니다. 느릿느릿 황소 걸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하지않 고 몇 날 며칠 실컷 자고 싶습니다. 시간은 돈입니까? 시간은 자본입니까? 좋습니다. 그렇다 칩시다. 그러면 그 시간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것도 자본의 것입니까? 조직의 것입니까? 그 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자본의 것일 수도 있고 나 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욕망의 뿌리를 단칼에 베어 버리면 그 순간부터 시간은 나의 것이 됩니다. 반대로 욕망의 품안에 안기면 그 때부터 시간은 자본의 코뚜레에 꿰이게 됩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시간 은 누가 뭐래도 내 것입니다. 내 시간 내 맘대로 쓰는 것 여기에 사는 맛이 있습니다. '빨리 빨리' 개처럼 뛰어 가며 천년을 산들 뭐가 그리 즐겁겠습니까? 슬리퍼 신고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돌아 다니는 맛, 정말 꿀맛입니다.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을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슬슬 도는 맛도 깨소금 맛입니다. 똥개 복돌이와 함께 뒷산에 느릿느릿 올라가는 것도 새콤달콤 그만입니다. 물론 걱정되는 것도 있습니다. 곳곳에 눈을 부라리고 서 있는 안드로 메다 군인들이 주민등록증 좀 보자고 한면 어떻게 합니까? 긴급조치 시절 일정한 직업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자는 영장없이 체포한다는 포고령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민시대입니다. 설마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YS도 수십 년 동안 '일정한 직업없이 정치권 을 배회'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한없이 느려터진 독일 사람들이 '느리게 살기 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우리눈엔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지금보다 더 느림보가 된다면 뭐 어쩌자는 겁니 까? 몇십 층 건물도 눈깜짝할 새 뚝딱 해치우는 우리로서는 속이 터져도 몇 번 터질 일입니 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독일인들은 지금 혁명을 하고 있습니다. 삶의 녹색혁명. 잃어 버린 자기 시간을 찾기 위해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시간의 주인은 난데 왜 내가 시간에 쫓겨 살아야 되는가?" 소리없는 함성이 귀에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왜 시간에 쫓겨 삽니까? 왜 늘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합니까? 왜 늘 허둥지둥 합니까? 소설의 주인공 모모가 속삭입 니다. "시간은 삶이다. 그리고 삶은 마음 속에 산다. 시간은 아끼면 아낄수록 시간은 그 사 람에게 오직 줄어들 뿐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런면에선 독일 사람들 저리가라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게으름증으로 죽은 사람 봤는가? 도대체 죽어라 일만 하다 헉헉거리며 죽는 개미가 나은가. 아니면 조금 가난하더라도 즐기며 사는 베짱이가 나은가. 그들은 기꺼이 베짱이에 표를 던집니다. 로마 시내에서 오가는 우편물이 4∼5일 걸려도 시민의 80퍼센트 이상이 '만족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게으름 속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천하태평입니다. 충청도 처사 윤재철 시인의 기분도 알 것 같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마음을 놓아 버리니까 참 편안합니다.

"아프니까 편하다 / 아무 것도 안 보고 / 아무 생각도 안 하고 / 휴일 식구들 놀러가는 데도 빠져서 / 혼자 그냥 누워 있으니 참 편하다 / 아픈 몸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도 모르 겠다 / 아프자면 아프자 / 나자빠지니까 참 편하다 / 아픈 것도 결국 혼자겠지 / 죽는 것도 결국은 혼자겠지 / 욱신욱신 철도 아니게 걸린 안질 / 안약 넣고 마이신 먹고 / 힘이 스르 르 빠지니 참 편하다 / 모든 것 포기하고 / 아프기만 하기로 하니까 참 편하다" (「아프니까 편하다」전문)

여성을 성폭행 임신케 한 흉악범에게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시신은 곧바로 부검되었습 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그의 고환엔 정자가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정자 상 태였습니다.

학자들은 왜 그런지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사형수에게 흔히 있는 죽음에 대한 극도 의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정상적인 생식기능을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스 트레스는 핵폭탄보다 무섭습니다. 핵폭탄은 인간의 마음까지는 빼앗지 못 합니다. 그러나 스 트레스는 순식간에 사람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일시적 무정자증은 사형수에게만 보이는 것 이 아닙니다. 극한 상황까지 갔다온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령 바다 속에 서 10시간 이상 떠다니다가 구조된 선원. 탄광 속에서 며칠씩 갇혀 있다가 구출된 광원. 태 평양 전쟁때 무인도에 홀로 남아 몇십 년씩 혼자 살아온 일본군. 전쟁 포로. 사형장에 끌려 갔다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 또 있습니다. 해발 8,000미터 이상의 높은 산을 오른 사나이. 아 무리 강철같은 산사나이라 하더라도 거의 1년 동안은 아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만약 아기 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는 거의 기형아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청소년들이 뽑은 지구 대통령 마이클 조던. 33세. 발목, 무릎, 허리를 연결하는 유니버설 조인트가 360도 전방위로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발과 다리, 상체가 각각 따로따로 놉니다. 상체가 오른쪽으로 쏠리는가 싶으면 발놀림은 어느새 왼쪽으로 나아갑니다. 왼발이 오른쪽으로 가는가 했더니 오른발은 어느새 왼쪽으로 틀고 있습니다. 허공을 걸어 다니는 그의 체공력은 한 마리 새 바로 그것입니다. 그의 슈팅은 항상 마지막에 이루어집니다. 허공을 맘껏 날다가 지상에 막 착륙할 때. 바로 그 때가 슛을 날리는 타임입니다. 조던의 슛을 막기 위해 허공을 같이 날던 수비수들의 발은 이미 땅에 닿아 닭 쫓던 개처럼 조던의 묘기를 멍하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용용 죽겠지. 조던의 혀가 한 자쯤 낼름 나옵니다. 그 때 공은 이미 그물을 출렁입니다. 놀라워라. 조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물에 걸리는 바람처럼 조던은 분명히 있는데 그의 슛 은 어디서 터질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의 경공술은 아무도 따를 수 없습니다. 강호에 내로라 하는 고수들도 최소한 세 사람은 따라 붙어야 그의 꼬리를 잡을 수 있습니 다. 조던은 자신만만 합니다. 어떠한 위기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전체팀 득점의 30퍼센트 가량을 혼자 넣었습니다. 그러나 건방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망나니 같은 '벌레(worm)로드맨'도 그의 앞에선 다소곳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공을 독점하기 때 문에 동료들은 조던을 암살자라고 부릅니다. 물론 뼈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 간에 해결사로 나설 사람은 조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동료들은 그를 믿고 존경합니다.

농구 황제 조던. 그러나 그도 외롭습니다. 지쳐 두 무릎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히고 있는 조던. 헉헉 지친 숨소리가 들립니다. 심판에게 화를 낼 때 이마의 삼겹주름살. 어쩔 수 없는 조바심과 짜증을 읽습니다. 벤치에서 불려나가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조던. 초조감을 봅 니다. 레이저 권총을 휴대한 채 경기장에 나타나는 마이클. 겁에 질린 영혼을 발견합니다. 그렇습니다. 무대 위에 막이 내리면 배우는 허무하고 외롭습니다. 허무감과 공허감 그리고 공포 속에서 몸부림치는 농구 황제. 우승이 확정된 후 공을 부둥켜 안고 코트 바닥에서 나 뒹굴던 농구 황제. 라커룸 바닥에 앉아 엉엉 혼자 울고 있었다는 조던. 미스 코리아에 뽑혔 다고 우는 '미인의 눈물'과 어디 똑같겠습니까?

5,000만 달러짜리 집(방 12개, 차고 10개, 농구 코트 1개)과 한 해 6,000만 달러(올 예상 수입액)를 벌면 뭐합니까? 자본에 등 떼밀리는 삶. 광고주와 팬들의 벌떼 같은 성화에 잠 못 이루는 삶. 경보장치 전자알람이 없으면 화장실에도 혼자 못 가는 삶. 사랑하는 아내, 세 아들과 맘껏 같이 놀지도 못하는 인생.

미국 자본주의가 만든 황제 영웅. 마이클 조던의 인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공을 넣고 돌 아서는 조던의 등이 한없이 외로워 보입니다. 터치 라인을 따라 공을 몰고 질풍처럼 달리는 축구 선수 서정원의 두 어깨도 가슴을 찡 울립니다. 스텐레스 같은 스트레스, 쇠 같은 스트 레스, 자본은 불가근 불가원(不可近不可遠). 너무 가까이 하면 코가 꿰여 끌려 다닙니다. 너 무 멀리 하면 보통 사람이 견디기엔 너무 불편합니다.

지하철 연결 통로. 많은 사람들이 묵묵히 걷고 있습니다. 발걸음 소리만 서로 뒤엉켜 통로의 벽에 어지럽게 부딪칩니다. 나도 그 속에 묻혀 묵묵히 흘러갑니다.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유대인들 죽음의 행렬이 생각납니다. 잘났든 못났든 앞으로 100년 후면 이들 중 아무도 이 땅에 살아남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앞 쪽에 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우르르 뛰기 시작합니다. 갈아 탈 열차가 왔나 봅니다. 나도 뜁니다. 그리곤 소스라치게 놀라 발걸음을 늦춥니다. 이 속물. 난 아직 멀었습니다. 도대체 난 왜 뜁니까?

문득 돌아가신 김성칠(金聖七) 선생의 말씀이 뒷통수를 따갑게 때립니다. 40여년 전 어느 날 선생은 전차 속에서, 서로 타려고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전차 밖의 동포들을 봅니다. 하나 같이 심각한 그들의 표정을 읽습니다. "저들은 왜 그런가. 좀 기다리다 다음 전차 타면 될텐 데 왜들 그러는가. 왜들 그리 조급한가. 왜 그리 심각한가?" 선생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 은 지도자들에게 오랫동안 너무도 속아왔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고 해결할 수 밖에 없다.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선생이 느낀 4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알아서 자기의 생명을 지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가 백성들의 생명을 지켜 준 적은 별로 없습니다.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갑니다. 모두 진드기 같이 달라붙어 악머구리떼 울음을 웁니 다. 아아 진드기 삶. 시계추에 매달린 삶.

"지금 우리는 너무 /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드는 것은 아닌가 / 우리가 먹고 자고 뒹구는 이 자리가 / 몸까지 뼛속까지 썩고 병들게 하는 / 시궁 창인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 짐짓 따스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 자리가 / 암캐의 겨드랑 이나 / 돼지의 사타구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 음습한 그곳에 끼고 박힌 진드기처 럼 / 털과 살갗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길들여져서 / 우리는 그날그날 너무 쉽게 / 살아가 고 있는 것은 아닌가 / …" (신경림, 「진드기」부분)

아아 맹장 같은 인간. 김화성.

마음은 이미 육체의 노예가 되었습니다(心爲形役).

두부처럼 팅팅 불어터진 중늙은이.

아아 그래도 난 느리게 살고 싶습니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