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다스 칼럼/“밤새 내 목은 안녕하신가?”

지방 출장을 다니다 보면 "서울만이 한국의 중심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지방이 상대적으로 문화예술 공간이 부족한 것은 그만두고라도 어쩌면 하찮게 여길 수 있는 부분에서 마저 편차를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교통 신호등과 이정표이다. 통일되지 않은 영문 표기며 제 자리에 서 있지 않은 이정표, 그리고 버젓한 네거리에도 생략된 신호등이 쉽게 눈에 띈다. 현지인에게야 그리 큰 불편이 아닐 수 있겠지만 외지인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자제 시행 이후 지자체에서는 다투어 지역 개발에 열심이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재정 자립도를 높여 나가기 위한 자구 노력은 진정 지역사회 주민을 위한 복지행정을 실행하는 것이며 이제는 적당주의와 주민위에 군림하는 구태를 벗겠다는 공무원 사회의 환골탈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도 별 수 없어'라는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많다. 표지판의 영문표기 혼선, 엉뚱한 길목의 이정표 등이 바로 그 예이다. 이러한 것들은 마냥 아량으로 넘길 대목만은 아닐 듯 싶다. 어쩌면 그런 '어설픈 아량'이 오늘의 우리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 지도 모른다.

어느 지방을 취재하면서 느낀 일이었다. 요즘 웬만한 지방 중소도시만해도 신시가지 개발이 활발하다. 이에 맞춰 도시정비 또한 깔끔하게 돼 있다. 도로 포장은 물론 이정표며 신호등도 잘 갖춰져 있다. 하지만 운전자가 미리 알아볼 수 있도록 삼거리나 교차로 전방에 세워져 있어야 하는 이정표가 엉뚱한 곳에 위치해 있거나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한 지역을 취재할 때면 해당 자치단체의 역점 사업이나 주요 관광지에 대한 홍보 내용을 듣기 위해 시·군청 공보실을 찾게 된다. 이럴때면 간혹 기자 나름대로 느낀 개선점을 공손한 어투로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대다수의 공보 관계자는 진심이건 인사치레건 '고맙다'는 반응들이다. 헌데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한 공보담당자는 '우리는 할만큼 했는데요?'라는 의외의 반박성 대답을 해왔다. 물론 그 지역에는 이정표도 많이 세워져 있었고, 나름대로 도로 시설물이 잘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세워놓은 교통 시설물이 제자리에 서 있지 않은 경우가 군데군데에서 발견되었다면 이는 결코 '할만큼 한 것'도 아닐테고, 예산낭비에 다름아니다 . 공무원 한 사람의 어이없는 대답이 우리 나라 공무원들의 전체 의식을 대변할 수는 없겠으나 그 여운이 남긴 것은 '거꾸로 가는 시계바늘' 그 이상이었다.

또다른 지방 군청 공보실 직원의 하소연에서도 제 자리를 일탈한 자들이 남기는 폐해를 엿볼 수 있다. 그는 기자와 하는 자리에서 한사코 밥값을 내려고 했다. 헌데 밥값을 내는 자의 입장이 당당해야 함에도 오히려 민망해하는 눈치였다. '제대로 대접을 못해드려 죄송하다'는 것. 누가 누구에게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지 황당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취재 편의를 위해 애써준 공무원을 위해 응당 기자가 싸구려 점심일망정 대접을 해야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 공무원은 '어디 세상이 그렇느냐'며 한사코 밥값을 내겠다고 우겼다. 지금껏 공무원이 기자를 접대해 온 것이 관행처럼 굳어져 있다는 설명과 함께. 인정이 오가는 흔연한 자리에서 부담이 되지 않는 범위의 식사 대접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혹시나 꼬투리를 잡힐 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기자를 접대하게 된다는 사실은 너무도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하소연이 이어진다. 평소 군청 출입 기자들을 잘 모셔야(?)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가 근무하는 군청에 도지사라도 오게 되면 그에 따르는 기자단 접대 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융숭한 식사와 관내 최고의 술집에서의 주연, 그리고 토산품 선물과 플러스 알파. 이 모든 것이 '홍보비'라는 명목으로 접대비에서 지출된다고 한다. 국민들의 세금이 이처럼 엉뚱한 곳에서 새나가고 있는 셈이다. 그 공무원이 기자에게 점심 대접을 융숭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책정해 놓은 접대비가 초과지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 때문일까? 기자가 군청이나 시청 공보실에 들르게 되면 간혹 그들이 기자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해당 자치단체의 홍보를 해주는 좋은 기사를 써주겠다고 찾아간 기자를 귀찮은 존재쯤으로 지레 짐작하는 것 같다. 이는 비록 단편적인 예이지만 그간 우리의 동업자인 일부 기자들이 공무원들에게 보여준 모습이 어떠했는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무원들의 시니컬한 눈초리는 그간 우리가 뿌린 자업자득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제대로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일탈해 있는 것이 단지 도로의 이정표나 맥풀린 공무원, 공짜에 익숙해진 일부 기자 집단 뿐만은 아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현장 등 그 어느 한곳 온전한 구석이 없는게, 안타깝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일반 국민들의 윤리 도덕 불감증도 마찬가지. 문민정부 출범후 개혁과 사정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지만 그 효과는 요란한 구호에 미치질 못했다. 뿐만아니라 고물가,고실업,국제 경쟁력 약화 등 이땅은 이미 살맛나지 않은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국민들은 개발독재 30년동안 민주를 헌납하며 허리띠 졸라매고 이룩한 경제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현실에 극도의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 분노의 대상은 위정자와 부패정치인 그리고 악덕 정경유착 기업가들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국민들의 분노에 대해 책임을 지려 들지 않았다. 한결같이 '왜 나에게만…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혼란정국을 수습해가는 대통령의 태도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문민정부 4년은 건국 이래로 쌓여온 만성적인 부패구조가 단 몇 년의 노력만으론 청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요즘 와서 국민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아주 명쾌하다. 개혁의 주체세력과 개혁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김영삼대통령에게 분명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칼국수 열심히 먹고 내핍하는 김영삼대통령의 지난 4년 행적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유감스럽게도 낙제점 이하다. 이는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 바로 YS 자신의 자업자득이다. 그가 대통령으로써 애써 일했다지만 제 자리를 찾지못하고 애를 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그를 둘러싼 일부 측근들 역시 제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자세를 망각한 셈이다. 알량한 직책을 남용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한 것도, 대통령에게 바른 직언과 고언을 하지 못했던 것도 제 직분을 망각한 행위에 다름아니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니 지난 95년 하반기부터 우리의 정치에서는 생산성이라는 것을 찾아 보기가 힘들었다. 국민들의 눈에는 그저 권력투쟁과 천문학적인 돈을 빼돌린 대도(大盜)들의 기록경신만 지켜 보는듯했다. 여기에는 김영삼대통령의 '착각'이 한몫을 했다는 생각이다. 그는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우월감과 건강을 과신하고 '검소' '결백'하다는 이미지만을 앞세운채, 측근들의 전횡과 어느 '통큰 재벌'의 비리에 철저히 무관심한 것은 아닐까.

대통령이 마땅히 정경유착의 근절과 국가의 장래를 위해 챙겼어야 할 세세하지만 중요한 부분들을 놓쳤다면, 이는 또다른 '직분의 이탈'이 아니겠는가. 이제 몇 개월 남지 않은 임기 동안에라도 김영삼대통령은 겸허한 자세로 제 자리에 서야 한다. 이것이 그간의 失政에 대한 대국민사과에 부응하는 것이고, 그가 중학시절 이래로 꿈꿔온 대통령으로서의 순수한 포부와 열정, 그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리라.

유치원생부터 대통령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 작고 단순하지만 이 하나의 명제가 바로 오늘의 초라한 모습을 탈피하는 가장 큰 애국의 출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