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호/200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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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준 기자의 세상 속으로]

벌써부터 ‘창심’(昌心)인가

박근혜 의원이 지난 2월28일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이날 모든 언론은 그의 탈당 기자회견 모습을 자세히 보도했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은 박의원과의 인터뷰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 일부를 삭제하거나 생략한 채 보도했다.

“이총재에게 하고 싶은 말은?”이라는 기자 질문에 박의원은 “(이총재의) 지지도가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은 국민이 뭔가 할 말이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라고 답했다. 대부분 언론의 보도는 여기서 멈춰 있다. 그러나 박의원의 말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의원의 다음 말은 이렇다. “정치보복은 대통령이 아니라 측근들이 하는 것이다. 나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안다.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으면 정치는 만날 그렇다. 정치보복금지법 같은 것을 만들어도 소용이 없다.”

상당수 언론에서 이 부분을 삭제하거나 생략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자의 판단으로 이 대목은 박의원의 탈당을 이해할 수 있는, 더 나아가 박의원의 ‘소신’과 정치철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사실 군사 쿠데타에 의한 5·6공 정권이 지나간 이후 권력의 전횡은 대통령 자신보다 대통령 주변부의 소위 ‘실세’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김영삼 정부 때 그러했고, 현재의 김대중 정부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다. 호랑이의 탈을 쓴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뽐내듯(狐假虎威), 대통령 측근 인사들이 대통령의 의중인 듯 말을 흘리면서 권력을 행사하고 다니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이 서로 견제하게끔 만들어 어느 한쪽에 힘이 몰리지 않게 하는 용인술은 김대중 대통령도 ‘박통’(박정희 전 대통령)만큼이나 탁월했지만, 야당 시절과 달리 구중궁궐 심처(深處)에서 첩첩이 에워싸인 ‘인의 장막’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싶다.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현 정부 들어 권노갑씨 주변에 ‘권력의 불나방’들이 잔뜩 몰린 것도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가 ‘김심’(金心)을 대변한다고 사람들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 공천을 앞둔 한나라당에서는 벌써부터 ‘창심’(昌心·이회창 총재의 뜻) 논란이 한창이다. 경북도지사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한 한나라당 권오을 의원은 3월4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당직을 맡고 있는 모 의원은 ‘총재의 뜻이 현 지사를 합의 추대하는 것’이라며 ‘창심’(昌心)을 빙자하여 출마 포기를 종용하는가 하면, ‘왕따시키겠다’는 협박까지 했다”고 밝혔다. 권의원은 또 “총재는 경선에서 중립적인 입장인데, 총재 의견과 달리 밑에서 그렇게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국민경선제 원칙 등을 당헌 당규에 애써 규정해 놓고도 최근의 한나라당에서는 단체장 후보 공천 추대론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경선이 아닌 ‘담합’에 의해 단체장 후보를 ‘간택’하는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창심’이 등장할 것이며, 서로 다른 ‘창심’이 맞붙어 시끄러울지 모를 일이다.

박근혜 의원이 지켜보았을 권력 내부 암투

아직 집권하기 전인 야당에서도 이럴진대 집권당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보복은 대통령이 아니라 측근들이 하는 것”이란 박의원의 ‘진술’은 결국 ‘권력은 대통령 본인보다 측근들이 휘두르는 것’이란 말로도 들린다. “나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안다”는 그의 부연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어려서부터 청와대에서 자랐으며 육영수 여사 서거 후 5년2개월 동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던 그의 입장에서는 ‘남다르게 보았던’ 권력 세계 내부의 비정한 암투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으면 정치는 만날 그렇다”는 박의원의 진단이야말로 너무나 정확하다. 근본적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현재의 사당(私黨) 체제로는, 아무리 개혁을 부르짖는다 해도 권력자에게 힘이 집중돼 나타나는 수많은 폐해와 또 다른 ‘김심’ ‘창심’ 논란이 그치지 않을 것으로 그는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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