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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나와라 뚝딱" 남대문시장에 가면 한국사가 보인다

"물건 나와라 뚝딱" 남대문시장에 가면 한국사가 보인다

Posted March. 06, 2014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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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앞 저자가 이른 새벽 열리어/칠패 사람들의 말소리 성 너머로 들려오네./바구니 들고 나간 계집종이 늦는 걸 보니/신선한 생선 몇 마리 구할 수 있겠구나.(다산 정약용의 시 춘일동천잡시 중)

서울 중구에 있는 남대문시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이다. 점포 약 1만 개가 밀집해 1700여 종의 상품을 취급하며, 하루 평균 이용객만 40만 명이 넘는다. 남대문시장엔 고양이 뿔 빼고 다 있다고도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최근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남대문시장을 발간해 이 시장의 남다른 역사를 조명했다.

남대문(숭례문) 주변은 조선 건국 때부터 인근 종로 시전행랑()의 영향으로 크고 작은 장이 섰다. 본격적으로 시장 공간이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였다. 조선 후기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한양 장시(정기시장)는 4곳. 현 종각 주변인 종루가상()과 종로4가 부근 이현(), 서소문 바깥 소의문외(), 그리고 남대문의 칠패()였다.

칠패란 원래 왕을 호위하던 어영청 소속 군인을 일컫는 말. 이들 초소가 남대문 근처에 있어 남대문시장을 칠패장이라 불렀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소금과 자기, 볏짚이나 싸리, 대나무 제품과 젓갈류를 많이 취급했다.

난전() 성향이 강했던 시장이 지금 위치에 정착한 건 1897년 도시근대화사업의 하나로 선혜청 창고 터에 창내장()이란 시장을 만들면서부터다. 현 남대문시장 A동과 B동 사이쯤이다. 윤남률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매일 새벽에 열리던 아침시장()과 구분되는 근대적 상설시장이 최초로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개항 직후라 해외 상인도 몰렸는데 1907년 기준 조선인 50%, 일본인 30%, 중국인 20%로 구성됐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시장 규모 2위였던 동대문시장보다 거래액이 2.6배 이상 컸다.

융성하던 시장도 일제강점기는 비켜가지 못했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시장규칙을 반포하면서 구식시장이라며 남대문시장의 해체를 시도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시장이 살아남은 건 친일파 덕분(?)이었다. 매국노 송병준(18581925)이 운영하던 조선농업회사가 운영권을 따내며 허가 취소를 막은 것. 그 대신 엄청난 자릿세를 뜯어갔다. 이후 남대문시장은 일본인 전직 관료나 경제인이 관리하며 이권을 챙겼다.

광복 이후에도 고초는 이어졌다. 625전쟁과 1000여 점포가 전소한 1954년 대화재도 한몫했지만, 깡패조직 명동파의 지류였던 엄복만파가 상인들의 고혈을 짜냈다. 1922년생으로 알려진 엄복만은 대화재 때 전국에서 보낸 성금까지 착복할 정도였다. 1957년 서울시가 남대문시장상인연합회에 운영권을 이양하며 주먹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 남대문시장은 양키시장 도깨비시장으로 불리며 발전했다. 도깨비방망이처럼 뭐든 구할 수 있고, 단속반을 피해 잽싸게 치고 빠진다는 명성을 얻었다. 1967년 동아일보 횡설수설은 외국 언론이 (남대문시장을) 악마의 골목(devils alley)으로 번역해 소개했다고 전했다. 월남한 실향민이 다수 정착해 아바이시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1968년 남대문시장은 또다시 화재를 겪었지만 발 빠르게 회복하며 지금 모습으로 자리잡아갔다. 1980년대에는 주방용품 주단포목 공예품 골목이 형성되며 전문상가 중심 시장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윤 학예사는 1990년대부터 외환위기와 동대문시장의 성장으로 부침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전통과 영향력을 지닌 남대문시장은 한국을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