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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앞서나간 그녀들, 붓을 들다

Posted November. 19, 2022 07:20   

Updated November. 19, 2022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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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년 서울 경복궁 인근 북촌에 거주하는 여성들의 모임 ‘찬양회’가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한 지아비가 두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윤리를 거스르는 일이며, 덕의를 잃는 행위’라고 먹으로 쓴 흰 헝겊을 장대에 매단 뒤 덕수궁 인근에 세웠다. 그 옆에서는 30, 40대 여성 50여 명이 앉아 “상감(고종 황제)께서 먼저 후궁을 물리치라”고 외쳤다.

 조선사회에는 처첩제도가 있었다. 당시 여성들은 직접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때문에 첩을 두는 것이 윤리에 어긋난 일이라며 공개 시위를 벌인 건 가부장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이 시위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주일 이상 이어졌다.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인 저자는 조선시대 상언(上言·백성이 글로 임금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과 근대 계몽기 신문 독자투고를 분석해 적극적으로 사회에 정론을 외쳐온 여성들의 목소리를 조명한다. 이는 ‘유교 가부장제 사회 속 수동적인 여성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유명하진 않지만 자신의 처지에 주눅 들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글을 썼다. 국정을 기록한 ‘일성록’에 따르면 정조 재위 기간(1776∼1800)에 상언과 격쟁(擊錚·하소연할 사안이 있을 때 임금이 지나는 길가에서 꽹과리를 쳐서 하문을 기다리던 일)은 총 4427건에 달했다. 이 중 405건은 여성들이 제기했다. 이들의 출신은 양반, 평민, 기녀, 여종 등으로 다양했다. 내용도 재산, 가족, 후계 등 일상 속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근대 계몽기에는 신문이 여성들의 목소리에 공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1898년 ‘북촌의 여중군자’라고 밝힌 이들이 쓴 ‘여학교 설시 통문’이 대표적이다. 여학교의 필요성과 여성 권리를 주장한 글은 같은 해 황성신문 별보와 독립신문에 게재됐다. 1899년에는 과부라 밝힌 한 여성이 재혼을 막는 관습을 비판하는 글을 제국신문에 투고하기도 했다. 저자는 “침묵했던 목소리가 분출한 것이다. 하지만 그전까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말을 되살리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태언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