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된 약물[이은화의 미술시간]〈416〉

현대인에게 몸은 끊임없이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영양제로 활력을 채우고 수면제로 밤을 달래며, 질병의 고통과 불안을 잠재우려 기꺼이 화학물질에 의존한다. 우리는 스스로 건강을 관리한다고 믿지만, 실상은 약물과 처방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없이는 단 하루도 온전할 수 없는 깊은 종속 상태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규제 물질 단서 페인팅’(1994년·사진)은 바로 이 지점을 시각화한다. 흰 캔버스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색점들은 얼핏 단순한 추상 회화 같지만, 각각은 실제 약물 이름과 연결된 기호다. 제목의 ‘규제 물질’은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된 약물을 뜻한다. 작품은 회화라기보다 현대 약물 체계의 서늘한 도식에 가깝다. 흥미로운 점은 이 철저히 통제된 화면을 작가가 직접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허스트는 의사 처방 참고서(PDR)에서 약물 이름들을 발췌해 규칙만 설계했을 뿐, 붓을 든 것은 조수들이었다. 이 기계적 생산 방식은 예술과 자본이 결탁한 블랙코미 자세히 보기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