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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혹은 시간의 담론-
‘봄날은 간다’
  - 이재현


7.

그러나 단지 과거의 지속적인 현재화로서 시간의 흐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이지만 여기서 기억의 재생산이 없다면 시간은 과거의 시점에서 중단될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현재라는 시점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현재는 과거가 귀환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시간이 현재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난다면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화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의 두 방향으로 갈려지면서 나타나고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즉 현재는 지각되는 순간 나타나고(present) 지나간다(passed). 이로 인해 영화는 무언가가 계속 통과하는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과거의 시간의 현재로 귀환하는 것이 명시적으로 드러난다면, 현재의 계속적인 갈라짐은 영화의 내적인 형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흡이 긴 롱테이크와 미디엄 샷, 롱 샷으로 구성된 장면들은 피사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현재라는 순간이 나타나고 지나가는 순간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현재는 끊임없이 갈라지기 때문에 카메라는 쉽게 다른 샷으로 넘어갈 수 없다. 즉, 영화는 가령 행위의 극적인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 시간을 자르고 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가 생성되기 위해 의미가 다가오는 순간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상우가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강릉으로 달려와 은수의 집 앞 도로에서 멈출 때, 카메라는 둘을 반응샷으로 찍지 않고 멀치 감치 떨어져서 둘을 잡아낸다. 둘이 서로를 알아보기 이전부터 카메라는 그들을 응시하면서 그들이 알아보는 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영화가 호흡을 놓쳐 어정쩡하게 되어버린 씬들이 몇 개 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현재는, 사랑은 지속으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이처럼 일상이라는 무수한 의미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순간들 ―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자신들의 모습을 바꿔가면서 생성되는 시간 속에서 사랑을 관객과 공유한다. 하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사랑의 언어가 아닌 언어 이전의 그들이 경험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총체이며 사랑 이전에 그들이 겪음직 했던 삶의 부단함과 충만함일 것이다.





(주)

1.여기서 반 박자 쯤 느리게 연출되었다는 것은 고속 촬영으로 이러한 장면들이 촬영되었다는 것이 아닌 영화의 내적인 시간에서 봤을 때 이러한 씬들이 다른 씬들 보다 심리적으로 느린 호흡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2.가령, 아침과 점심 사이의 '일상'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또한 매순간 변덕이 죽 끊는 듯한 '일상'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분리해 설명할 수 있는가?

3.가령, 내가 넘어지면서 고통을 느끼는 순간을 가정했을 때, 이미 넘어진다고 지각하는 순간 나는 넘어진 것이며 넘어진 순간의 아픔이 지나간 감각으로서 지속되어 남아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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