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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평자들은 김영하의 장편에 등장하는 몇몇 `댄디적 성향'이라 지칭될 수 있는 것의 사례가 단순히 이 시대의 대중문화적 정보의 나열이 아닌 작품의 유기적 구조에 기반한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물론 그러한 이해는 문학작품이라는 하나의 텍스트는 성공적으로 흡수한 사회적 가치와 맥락으로 인해 문화적이라는 관점 에서 긍정적 태도를 취한다.한편 작가중심적 관점을 취한다면 김영하의 대중문화적 요소를 끌어들인 소설쓰기는 마치 중력의 힘과도 같은 작가의 사회적 자의식이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적 요소가 대상의 원래 모습으로 드러날 수는 없기에 차용의 곤혹스러움이 빚어진다. 대중문화의 대사들은 셰익스피어의 그것들처럼 빈번하게 인용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김영하는 가령 `쳇 베이커'의 의미를 의도한 대로 조작한다. 이렇게 마련된 소설의 배경은 오히려 작가 자신이 경계하는 스노비즘에 근접한다. 역설적으로, 자연스럽고 대등한 관계를 통한 창조성을 위해서 대중문화의 요소는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정보를 전달하는 듯한 설명적인 형상화는 텍스트를 건너뛰어 독자를 의식하는 작가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문제는 단순한 문화적 요소가 아닌 소설쓰기의 도구로서의 그것들이다.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풀어 본다면, `기호의 추출보다 산출되는 기호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소설 속의 캐릭터와 사물, 그리고 그것들 상호간의 관계에 녹아드는가'가 문학의 대중문화적 요소의 수용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이다. 비평의 차원에서, 단순히 문화적 기호를 추출하는 것과 기호·주제간의 관계에 긴장된 의미의 공간을 부여하는 것,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희생해야 하는가는 적어도 독자의 성향을 넘어서서 문학적 소통의 가능성을 기준으로 할 때, 보다 명백해진다. 실제로 독자는 자세히 읽기를 통해 기호의 추출을 넘어서 좀더 풍부한 텍스트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읽기의 경계가 텍스트의 내적 질서를 넘어선다면 그 곤혹스러움은 스노비즘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대중문화적 요소가 단순한 문화적 배경을 넘어서 소설에 관여하는 방식에 있어서 조율을 필요로 하는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낸다.
… 내 차에 올라탄 그녀는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시동을 걸자 쳇 베이커의 거친 저음이 깔려나온다. / -이 사람 알아요? / 그녀는 아주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땅 속에서 내 몸을 잡아끄는 것 같네요. 깊이깊이 꺼져버릴 것 같아요. / -쳇 베이커라는 재즈 뮤지션이죠. 별볼일 없는 인생을 살았지요. 이름을 날린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재즈사에 남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죠.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트럼펫 연주가 탁월했던 사람도 못 됐죠. …(62∼63쪽)
작가가 가상 인터뷰 형식의 한 글 에서 밝힌 바 있는 `조심스럽고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진 대목이다. 인용한 부분은 그 대목의 첫 부분인데, 쳇 베이커의 음악은 유디트로 하여금 "깊이깊이 꺼져버릴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작가의 의도는 유디트가 죽음에 이르는 서사적 설정을 한 예술가(쳇 베이커)의 음악을 통해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자살 안내업자가 소개하는 쳇 베이커 의 죽음은 유디트의 죽음과 혼돈을 일으킬 뿐이며, 이 대목이 그저 죽음의 모티프(자살의 경우) 하나를 상기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소설의 짜임새에 대한 설득력은 부족하다. 몇 걸음 물러서서 보더라도 쳇 베이커와 유디트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찾아지는 공통점은 오직 의미를 상실한 `태도'에 한정된다. 상실한 `의미'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권태는 더 이상 내 사랑이 아니다'(93쪽)라는 랭보의 싯구만이 에피그램으로 떠돌아다닐 뿐이다.
미미는 욕조로 들어가기 전 레너드 코헨의 〈Everybody Knows〉를 틀어놓고 오랫동안 춤을 추었다. 레너드 코헨의 거친 음색과 육중한 베이스 음이 그녀의 춤과 잘 어울렸다. 욕실 쪽에서는 한껏 틀어놓은 물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물은 계속 흘러 넘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열 번쯤 〈Everybody Knows〉를 듣고 욕조로 걸어 들어갔다.(139쪽)
여기에서도 대중문화의 요소가 이미지화하고 그것이 다시 이야기의 골격으로 작용하는 짜여진 긴장감을 맛볼 수는 없지만, 소설에 영화적 감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므로 문자 기호의 영상기호 만큼이나 심원한 성격에 기댄다면, 이 대목은 어느 정도 효과적이다. 몇 줄에 걸친 하나의 고유명사와 한 곡의 노래제목 으로 지탱되는 죽음의 전야는 막연하게 드리워진다. 독자의 상상력에 긴장이 지탱되는 단계는 어디까지일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기법은 작가의 중요한 전략인 이미지가 문체로써 드러난다는 점에서 웬만큼 감각적이다. 또 다음의 대목은 발군이다.
그가 굴신을 계속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지루한 표정으로 추파춥스를 빨고 있었다. 그녀의 추파춥스가 아직 남아 있을 때, 그는 사정을 했고 그러자마자 일어나 샤워를 하러 욕실로 걸어갔다. 그는 그때 어렴풋하게 등뒤에서 낄낄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고 그 웃음소리를 듣자 모차르트를 듣고 싶어졌던 게 기억난다.(38쪽)
유디트의 지루함에 대한 C의 반응은 모차르트로 드러난다. C의 의식 속에서만 드러나는 모차르트라는 고유명사의 효과는 사실 매우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것이다. 의식의 현상에 대한 직접적 기술은 독자에게 대유로서 작용하는 시적인 것인 동시에 서사적 진술을 포함하는 전략의 핵심적 역할을 해낸다. 왜냐하면 현실적 소통의 부조리함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거부하는 캐릭터를 가진 C에게 있어 모차르트 음악의 본질로서의 `비애'나 모차르트의 천재로서의 삶은 소통 포기의 징후가 드리워진 유디트의 비웃음에 대한 방어기제로써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풀어 읽기는 독자 반응의 다양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어쩌면 새로운 텍스트만큼이나 생뚱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독의 과정은 과연 문학작품의 문화적 요소가 의식의 바깥만을 향해 열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하게 상기시키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의미의 풍요로움을 통한 텍스트와 독자간의 문학적 소통의 가능성을 내비치는 것이랄 수도 있겠다.
문학작품은 당대와의 교통에 발판을 둔다. 그러한 면에서 대중문화적 요소의 도입은 소통적이며, 따라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예술 형식의 하나로서 문학은 시대에 대한 긴밀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다시금 시대의 상황에 회귀하는 성격, 다시 말해 문화분석의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하기에 문학의 대중문화적 요소의 적극적 도입은 문학작품의 내적인 질서 속에서 그것을 압도하지 않는 채 기능해야 할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아, 김영하의 영화적 감각이 스민 댄디적 성향은 위험스럽다. 작가의 문화적 배경은 오직 화자와 캐릭터의 시선에 의해 형상화됨으로써 소설적 완성도에 기여해야 한다. 그것이 작가에 의해 교란될 때 문학은 가제트 로 전락한다. 김영하가 의도하는 `애들은 가라'식이 아닌 `조심스럽고 친절한 제시'는 보다 더 조심스러워져야 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적어도 부분적인 자전 취향의 소설이 아니라면 더군다나 그러해야 한다. 작가는 오직 독자의 반성적 읽기를 염두에 둔 예술가의 본연적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문학적 소통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