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를 타고 아래로 휘어지는 계곡과 울창한 수목에 휩싸인, 사 층의 막사건물이며 흰색 바탕의 예비군 회관과 붉은 벽돌의 취사장 건물 따위가 산뜻하고 정갈해, 멀리서 조망하면 마치 하계 휴양시설처럼 보이는 동원 예비군(動員 豫備軍) 훈련장에서, 희한한 사건이 터진 것은 훈련 사흘째가 되는 날 저녁이었다.
대지를 무차별적으로 달구는 거칠고 흉포한 폭염 속에서, 고된 훈련중의 하나인 각개전투를 별 사고없이 마치고 돌아온 오 병장(吳兵長)은, 석식을 마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잡담을 나누다가, 어둑할 무렵, 계곡에서 더위에 녹초가 된 몸을 씻고는 나른한 피로를 등에 지고 휘적휘적 언덕을 기어 오르고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 웅크리고 있는 초소의 외등 불빛이 언덕 경사면을 비스듬히 적시고 있었고, 언덕 좌우로 시립한 자작나무의 기다란 잔가지가 그 불빛을 갈기갈기 잘라 오 병장의 얼굴에 가느다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오 병장이지?”
오 병장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 오른 날카로운 목소리에 흠칫 놀라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획 틀었다. 언덕길을 벗어난 어둑한 잔솔밭에 세 명의 사내가 길다란 그림자를 안고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등뒤에서 뿌려 대는 보안등 불빛 때문에 그들의 얼굴엔 시커먼 가면을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다. 오 병장은 손바닥으로 눈을 반쯤 가리고 시야를 좁혀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오 병장 맞지?”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재차 물어왔다.
“누구 신지?”
“나야! 허 중사! ”
“허 중사님요?”
“그래! 이리와 봐!”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오 병장에게 빨리 뛰어오라는 표시의 손짓을 했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이 깔려 있는 몸짓이었다. 오 병장은 물기가 발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는 슬리퍼를 찍찍 소리내어 끌면서 언덕길을 버리고 잔솔밭으로 들어섰다. 오 병장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은 도로 방향을 바꾸어 오던 길을 되짚어 빠르게 언덕으로 올라가 버렸다. 오 병장은 은근히 불안해졌다.
오 병장이 물기가 흥건한 슬리퍼에 황토흙 고물이 달라붙어 엉망이 된 발로 언덕을 기어오르자 그들은 군사도로가 뚫린 신작로에 떡 버티고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신작로 위 예비군회관 외등 불빛에 그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들은 허 중사와 최 병장 손 병장이었는데, 오 병장과 같은 3중대 소속 예비군들이었다.
허 중사는 바짝 치켜 깎은 상고머리에 살 껍질이 새카맣게 말라붙어, 말가죽처럼 딱딱해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워낙 단단하고 강파르게 보여 현역 군인이라 해도 믿을 만한 외양이었다. 딱딱해 보이는 걸음걸이와 단단해 보이면서 똑똑 끊어지는 말투는 영락없는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대한지가 십 년 가까이 되는 예비역 중사였다. 육군인 것은 분명하나 병과며 보직이 어디였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힌 바가 없고, 다만 특수부대라는 것만 그가 언젠가 슬쩍 흘린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구태여 상고머리를 고집하는 것은 아직도 군에 대한 향수가 남아서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회에서 만나면 늘 어눌하고 주눅든 표정이든 그가 이렇게 훈련만 들어오면 활기를 되찾고 쾌활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물고기가 제 물을 만난 듯 훈련장만 들어오면, 그는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우며 거드름을 피웠고, 병 출신 예비군들에게 말을 할 때도 현역 중사가 병에게 그러하듯이 실팍한 위엄을 실어 명령조로 내뱉곤 했다. 그러면서 은근한 쾌감을 즐기는 듯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쾌활하던 허 중사가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말가죽같이 얇고 딱딱한 안면 표피를 잔뜩 찌푸린 채 입 언저리를 연신 실룩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울적한 모습은 예비군 훈련장에서 그의 본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다른 예비군들도 표독스러운 인상을 풀지 않고 송충이를 번데기인 줄 잘못 알고 우걱 씹어댄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일전(一戰)을 앞둔 병사들처럼 비장한 결심을 다지고 있는 듯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오 병장은 직감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어디 갔다 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풀지 않은 채 허 중사가 침중하게 물었다.
“보다시피 목간하고 옵니다.”
오 병장은 어색하게 히죽 웃으며 목에 두른 수건을 들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어쩔 겁니까?”
허 중사 옆에 서서 잔뜩 얼굴을 구기고 서있던 최 병장이 언성을 높였다.
“씨발, 열은 받는데......”
가래침을 바닥에 거칠게 뱉고 나서 허 중사가 고개를 획 젖히며 중얼거렸다.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고요. 생각해 봐요. 제대한지가 언젠데 예비군에게 폭력을 행사합니까? 그것도 중사한테. 말이 됩니까?”
최 병장이 강한 눈길로 허 중사를 쏘아보며 추궁하듯이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오 병장이 불쑥 끼어 들었다. 중사가 누구한테 맞았다는 것 같았는데, 사실이라면 그건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었고, 지겹디 지겨운 훈련 속의 예비군들에게 이러한 사건은 필시 왁자지껄한 소란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무료와 권태에 찌든 예비군들은 흐물흐물해진 의식을 곧추세울 이런 일들을 내심 기다려 오지 않았던가. 오 병장은 귀찮은 일이 벌어졌다고 순간 생각하며 최 병장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최 병장이 대꾸를 해 왔다.
“그렇지. 오 병장도 우리편이지. 다름이 아니고 글쎄 우리 노병이신 허 중사 님이 중대장한테 맞았다 이겁니다. 그것도 수치스럽게 뺨을. 이게 말이나 됩니까?”
오 병장은 감이 잡히지 않는 으스스한 전율에 약간 떨고는 심호흡을 크게 해 천천히 숨을 몰아 냈다. 최 병장이 정색을 하고 사건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해 왔다.
......허 중사가, 개도 안 걸린다던 여름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오들오들 한기가 밀려와, 평소 친분이 있던 예비군 조교의 상의 전투복을 뺏어 입고, 등이 깨져 어둑어둑한 맨 우측 현관을 막 빠져 나오고 있었다. 산책이나 할까 싶어서였다. 사위가 완전히 어둠으로 깔린 저녁 여덟시 무렵이었다. 가벼운 술기운에 마음이 들뜬 허 중사는 숫제 휘파람까지 휘휘 불며 현관문을 발로 툭 차고 막 연병장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그 때 난데없이 어디서 바람처럼 나타난 3중대장인 이 대위가 허 중사의 뒷덜미를 별안간 움켜잡더니 다짜고짜 따귀를 몇 차례 후리더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청천날벼락이었다. 눈앞이 갑자기 번쩍번쩍 하더니 머리 속이 텅 빈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캄캄한 곳인데도 두 눈에 무수한 별들이 번쩍번쩍하고 부셔졌다. 엉겁결에 당한 일이라, 허 중사는 잠시 정신을 놓고 얼떨결에 뺨을 몇 차례 더 이 대위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 대위가 또 손을 들어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허 중사가 누구인가. 가까스로 정신이 번쩍 든 허 중사는 벽력같이 고함을 내지르며 무자비하게 뻗어 오는 이 대위의 손목을, 그 어두운 곳에서도 동물적인 감각으로 불끈 낚아챘다. 특수부대 출신인 허 중사로서만 가능한, 날렵하고 기민한 동작이었다. 허 중사가 이 대위의 손목을 비틀어 잡고, “뭐야? 뭐? 내가 누군데? 왜 지랄이야? 응? 내가 누군 줄 알아?” 하면서 이 대위를 밝은 곳으로 끌고 나오자, 이 대위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어이쿠! 이거. 미안합니다. 난 조굔 줄 알았네!” 하고는 능청을 떨더라는 것이었다. 이 대위는 곧 이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고 했다. 석식 후 병력이동을 엄금한 자신의 명령을 조교가 건방지게 어기고 예비군 대대 막사를 어슬렁거리는 줄 알고 화가 치밀어 앞뒤 가리지 않고 실수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설사 그런 명령을 이 대위가 엄명했고, 건방진 신세대 조교가 그 명령을 어겼다고 해도 조교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서 응분의 조치를 취하는 게 마땅하고, 또한 아무리 어두워도 기간병의 전투복을 걸쳤다는 이유로 사십이 다 된 예비역 중사와 팔팔한 현역 군인을 착각했겠나 싶었다. 게다가 이 대위의 입에서 확 끼쳐 오는 역한 술 냄새를 감안한다면, 필시 술기운을 빌어 자신에게 묵은 감정을 풀기 위한 술책을 부림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 현장에서 주먹으로 본 때를 보이고 싶었지만 허 중사는 꾹 참았다고 했다. 특수부대에서 익힌 일타필살의 강권으로 주먹을 휘두른다면 이 대위쯤이야 골통을 깨뜨려 버릴 수도 있었고 슬쩍 옆구리를 수도로 내질러도 갈빗대 서너 대 정도는 우지끈 부러뜨려 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허 중사는 냉철하게 머리를 굴렸다. 치욕에 떨면서도 허 중사는 어찌 대처할 것인가를 그 와중에도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노회(老獪)한 허 중사의 차디찬 침착성 같았다.
“뺨을 맞았습니까?”
허 중사의 뺨을 유심히 살피며 오 병장이 물었다.
“여기 봐라. 시퍼렇지 않나?”
허 중사가 오른편 광대뼈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퍼렇게 볼이 부어 오른 것도 같았다. 그러나 어둑한 불빛에 그늘진 자국이라는 생각이 들 지경으로 상처가 분명하게 부각되어 드러나진 않았다.
“왕복으로 네 대나 맞았다니까. 씨발......”
“조금 표시가 나는 것 같은 데요?”
“조금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아프다니까? 씨발놈......”
최 병장은 흥건하게 물을 뿌려 놓은 내무반 침상 복도에 서서 2소대 대원들에게 허 중사가 당한 어처구니없는 폭행건(暴行件)에 대해 광분에 가까운 말들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까 오 병장에게 설명한 것보다 더욱 장황하고 그럴듯한 내용이었다. 허 중사의 고달픈 군대생활이 장교들과 연관되어 첨가되었고, 더 비약해 폭력이 미치는 사회전반의 영향에 대해 두서 없이 지껄였다. 최 병장은 한껏 들떠 있었다. 입술 주위에 마른 거품이 돌돌 말려 기어 나왔고, 둥그런 얼굴엔 비지땀이 송알송알 맺혀 있다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매끄러운 볼을 타고 주루루 흘러 내렸다.
최 병장의 왈패 같은 큰 목소리에, 시간을 버릴 장소를 찾던 예비군들이 싱글싱글 웃으며 주위에 둘러서기 시작하자 금새 내무반은 읍내 우시장처럼 왁자해졌고, 다른 내무반 대원들도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초저녁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한잔 걸친 모주꾼들은 신바람이 나서 목청을 버럭버럭 키우며, "끌어내 개 패듯이 팹시다!" "참모총장이 와도 안 무서운 게 예비군인데 일개 대위가 감히 예비군을 패? 까불고 있어? 그런 싸가지 없는 놈은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패야지!" "그런 작자들은 본 때를 보여야 합니다! "라고 부질없는 울화를 돋우었다.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들어온 자들인지는 모르나, 예비군들은 일단 군복을 걸쳤다 하면 모두가 한량이고 불한당이었다. 그것이 산 속에 틀어 박혀 있어 오지와 다름없는 이 곳 예비군 대대의 특색이었는데, 그들이 사회로 복귀해 넥타이를 목에 멋지게 훌쳐 매고 점잖게 양복을 척 걸쳐 버리면, 훈련장에서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온순한 일개 시민으로 환원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까 예비군 훈련장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인간의 본질에 숨겨 둔 나태와 무기력, 폭력성, 따위를 맘대로 꺼내 맞교환하는 장소인 셈이었다. 사회에서는 온순하고 착실한 회사원이고 가장이고 우애 있는 형제고 시장표창을 받을 만한 효자라고 해도, 일단, 군복을 입고 이 곳에 들어오기만 하면 누구나 할 것없이, 여태껏 교육받아 온 사회질서나 도덕적 양심 따위를 미련 없이 훌렁 벗어버리고, 그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무질서 속의 질서와 방탕에 탐닉되곤 했다. 그 무질서가 여기에서는 선(善)이었다. 그 선을 최대한 누리는 게 여기서는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통했다. 그 선이 지나쳐도 비난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영웅대접을 받았다. “괴짜야 괴짜!”라거나 “저 친구 물건은 물건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여기서는 크나큰 그들만의 훈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현역시절 같으면 꿈도 꿀 수 없는 방종이었다. 장교들의 경외에 눌려 무조건적인 굴종이나 수동적인 비겁으로 일관하기 십상이었고, 언감생심 중대장인 대위에게 뻑 하면 대들고 그의 명령을 지나가는 개소리보다 하찮게 여기는 그 따위의 행동을 감히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분위기가 무르익자 대원들은 침상에 큰 원으로 둘러앉아 술추렴으로 들어갔다. 예비군 훈련 5일 동안 저녁마다 빠짐없이 치러지는 술추렴이었는데, 오늘처럼 볼만한 사건이라도 생기면 그 술자리는 금새 달아오르고, 흥청망청, 질펀하게 술자리가 녹아나게 마련이었다. 그야말로 건수가 생긴 것을 빌미로 제대로 된 술자리가 열리는 것이었다.
내무반 구석구석에서 중대장의 눈을 피해 숨겨 둔 사 홉들이 소주병이 튀어나오고, 오징어 땅콩, 새우깡, 초코파이, 산도 따위의 과자 부스러기가 꾸역꾸역 기어 나왔다. 조금 있으려니 훈련장 밑 산간 동네에서 반입한 통닭과 오리 고기가 한 상 올라왔다. 예비군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신나는 저녁이 이어질 판이었다.
그런 소란한 분위기와 달리, 아무렇게나 구겨 버려진 휴지조각처럼, 얼굴 살을 콧쪽으로 한껏 접은 침울한 표정의 허 중사는 말도 없이 거푸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다른 예비군들이 닭다리며 갈비 살을 북북 찢어, 번들번들하게 기름기 범벅이 된 입으로 그것을 연신 가져가도 그는 깡소주로 쭉 일관했다. 왼쪽 눈자위 밑이 약간 부어 있었는데, 상흔임에 분명한, 파란 기운이 어렴풋이 감돌았고, 네모난 강퍅한 턱 옆으로 손톱에 긁힌 자국이 두 줄 희미하게 그어져 있었다. 고양이 발톱에 긁힌 실 자국 같은 그 희미한 선에 분홍빛의 혈선(血線)이 보일 듯 말듯 했다. 매정하지만 날카로운 이성을 가진 학사 장교 출신 이 대위의 폭행 흔적치곤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허 중사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십 여명의 예비군들은 그의 생채기를 흘끗흘끗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손으로 입을 가려 몰래 히죽거리기도 했다. 예비군들은 허 중사처럼 심각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남들이 차려 놓은 술판에 꼽사리로 끼어 앉아 뱃속에 기름기와 후끈한 알코올을 들이 채우면 그게 최선이었고, 그게 현명한 생각이었다. 무료한 시간들, “제발 저 좀 죽여주세요”, 라고 하소연을 떨어 대는 그 지겨운 시간들, 그 늘린 시간들을 소각장에 쓰레기 버리듯이 휙 술상 위로 던져 버리면 되는 게 예비군들이었다.
허 중사는 반쯤 남은 술잔을 입안에 훌쩍 털어 넣고 무거워만 보이던 입을 열었다.
“내가 7년 동안 군 생활했소. 그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오늘처럼 황당한 일은 첨이요. 내 쪽팔려서...... 씨발, 제대하고 보니까 붉은 별판을 단 승용차를 봐도 저게 똥별이지 싶더라고요. 군 생활 할 때 저것들 때문에 애간장 녹은 것 생각하면 지금도 쪽팔린다 이 말인 기라요. 이 나이에 별도 아닌 대위한테 얻어터지니까 정말 콱 죽고 싶더라 이기요.....”
허 중사는 자신의 말에 도취되었는지 흐느끼듯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죠. 대위정도면 제대한 우리 입장에서 보면 개똥밭의 참외 꼴이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허 중사님이 그런 똥 묻은 참외에게 얻어터졌으니 정말 억울하겠군요.”
허 중사 옆자리의 사내가 말했다. 그러자 한 쪽 구석에서 누군가가 쿡 하고 웃었다. 참외한테 맞았다는 말이 웃기는 모양이었다. 그 옆에 웃통을 아예 벗어제친 사내가 불룩불룩 살이 접히면서 튀어나온 아랫배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통신병으로 군대 생활을 했는데, 사단장 통신병이었거든요. 그래서 훈련을 뛸 때는 사단장 똥구멍을 바짝 따라 다녔죠. 그러니까 사단장이 방귀라도 뀌면 고스란히 독가스에 몰살당할 만큼의 거리로 바투 접근해 다녔습니다. 어느 해 추운 겨울 산골짜기였어요. 눈이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 무렵, 저녁 식사를 할 때였죠. 야산에 텐트를 치고 길다란 탁자에 사단장이 중앙에 앉고 사단 참모들이 그 옆으로 길다랗게 앉았죠. 밥을 막 먹으려니 눈이 펑펑 내리더군요. 그런데 사단장이 밥을 한참 먹다가 돌을 씹은 겁니다. 인상을 팍 쓰면서 갑자기 사단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취사 책임자를 부르는 겁니다. 취사 책임자는 소령이었어요. 엿 된 거죠.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판이었죠. 사단장 성깔이 더럽거든요. 무식하고. 괴짜고. 하여튼 사시나무 떨듯이 소령이 사단장 앞으로 불려 갔는데, 성질 더러운 사단장이 소령의 따귀를 서너 대 올려붙이는 거예요. 게다가 조인트까지 깠어요. 고추처럼 매운 날인데 살점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아니었겠어요? 소령이 푹 쓰러지더니 정강이를 마구 손가락으로 비비더군요. 정말 초라한 모습을 보이더군요. 약한 모습을요. 멀찍이 병들이 식사하고 있었지만 그 장면을 다 볼 수 있었거든요. 나중에 보니까 저희 소령 동기들끼리 모여서 뭔가를 쑥덕대고 있대요. 가만히 다가가 훔쳐 보니까 아까 그 소령이 훌쩍거리며 울고 있고 다른 동기들이 그를 달래고 있더라고요. 웃음이 갑자기 터지려고 해서 혼났어요. ”
“소령이 울어요?”
최 병장이 사내에게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예에, 울었어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허기야 장교들도 저들끼리는 엄격하다니까 뭐. 병들 몰래 얻어터지기도 하겠네요.”
“하늘보다 높게만 보이던 소령이 훌쩍대는 것을 보니까 정말 혼자보기 아깝대요. 우는 것도 꼭 계집애처럼 울어요. 쭈그리고 앉아서 헉!헉! 하면서 말이죠. ”
심각한 와중에도 허 중사는 배불뚝이 사내의 얘기를 듣고는 피식 웃는 여유를 보였다.
“제 친구가 전방에 대위로 있는데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까, 장교들 군기가 병들보다 더 세대요. ”
다른 사내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는 아까부터 말할 틈을 찾지 못해 안달을 하던 자였다.
“대책은 있소?”
통로에 우두커니 서서 둥그런 무리 쪽을 유심히 바라보던 거구의 사내가 대화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둥그렇게 스크립을 짠 무리들의 엉뚱한 대화가 못내 못마땅한지 눈살을 찌푸리고 서 있던 자였다.
“대책을 세워야지. 잡담만 할 게 아니라.”
허 중사는 당신 말이 옳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오 병장에게 불쑥 물어왔다.
“오 병장은 어떻게 생각해? 대책이 있겠나 말이야.”
“글쎄요. 데리고 와서 무릎이라도 꿇리고 싶지만...... 사과를 받아 내야겠죠. 창피한 쪽으로...... ”
“사과?”
어이가 없다는 듯 허 중사가 낯빛을 흐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 그의 내심에는 3중대장을 끌어다가 몰매라도 때려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창피한 쪽이라니?”
최 병장이 입을 비쭉이 내밀며 물었다.
“될 수 있으면 욕보이는 방향으로 대가를 받아 내자 이거죠.”
허 중사는 눈을 흉악하게 번들거리며 더 강경한 묘책을 바라는 눈빛을 최 병장에게 던졌다.
“최 병장은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솔직히 몰래 불러내 한대 쥐어박았으면 싶은데 말이죠. ”
“내 심정이 지금 그렇다니까. 복수를 해야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뇨?”
“탈리오 법칙을 말씀하시는군요. 동해보복 사상이죠.”
배불뚝이가 말허리를 자르며 아는 체를 했다. 허 중사는 배불뚝이를 흘끗 쳐다보다가 곧 말을 이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고. 하여튼 그 자식 뭘 믿고 곤조를 부리는지 정말 모르겠더라. 이번에 임자 제대로 만난 거지. 그 자식 싸가지 없는 거 최 병장도 알 거 아뇨? 지가 잘난 게 뭐 있소? 조금만 지가 양보했으면 내가 사사건건 갈구지 않는다 이거요. 새파란 놈이 나이 든 사람한테 일일이 따지고 대더니 이거 쪽 팔려서 말이오. 하여튼 이번에 싸가지를 고쳐 놔야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 이래봐도 특수부대 출신이요! 특수부대! 내가 맞고만 있을 놈으로 보이요? 죽을 고생하면서 익힌 특공무술로 그까짓 약해빠진 대위쯤이야 한 주먹에 골로 보낼 수 있다 이거요.”
허 중사가 주먹을 불끈 감아쥐었다. 그러자 병 출신 예비군들의 시선이 허 중사의 가슴팍에 박힌 공수 마크에로 일제히 쏠렸다. 그 곳엔 하얀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공수마크 위에는 검은 실로 자수를 넣은 듯 보이는 영문자 가 박혀 있었다.
“공수부댑니까?”
한 예비군이 물었다.
“공수는 아니요. 그것보다 더 무서운 부대라고만 알아두소.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특수부대가 얼마나 많은데. 하여튼 약골들이 버티기 힘든 곳이요.”
예비군들은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K.D.F는 뭡니까?”
호기심이 많은 배불뚝이 사내였다.
“허!허! 뭐 알고 싶은 게 많소? 그리 궁금해요?”
허 중사가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큰 소리로 되물었다.
“군사 비밀이 아니면 말해 봐요.”
배불뚝이가 재촉했다.
“허! 그거야. 말하지. 코리아 디펜스 포스란 뜻이오. 한국방어부대란 뜻이지. 이젠 됐소? 허허허......”
“첨 들어 보는데?”
배불뚝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특수부대가 어디 한 둘이오? 참, 당신들도 뭘 모르네......”
“어쩔 겁니까?”
아까 그 거구의 사내가 다시 불쑥 끼어 들었다. 본격적으로 모의에 가담할 양으로 사내는 엉덩이를 침상 위에 턱 걸치고 좌중을 험악하게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시간도 많이 되어 가는데 뭔가 결론이 나야죠. 잡담만 할 거요?”
사내는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죠.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인 줄 안다니까요. 본 때를 당연히 보여야죠. 방법이 문제지만......”
배불뚝이 사내였다. 그 때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허 중사는 빈 잔을 오 병장에게 건네고 술을 치면서 치밀한 계획을 세워 보라는 투로 굳센 눈길을 보내다가 입을 열었다.
“오 병장 네가 생각 좀 해 봐라.”
오 병장은 겸연쩍게 웃어 주는 것으로, 부담스러운 그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오 병장은 이번 사건을 허 중사와 이 대위 사이에서 언젠가는 벌어질, 예정된 일처럼 느껴졌고 그것이 지금 다가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3중대 예비군들이면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대위와 허 중사는 제대로 된 앙숙이었다. 원수나 진 것처럼 예비군 훈련만 들어오면 그들이 티격태격 싸우는 바람에, 3중대 그 중에서도 2소대 대원들은 혼자 보기에 정말 아까운 장면들을 여러 번 목격할 수 있었다. 군으로 치면 중대장과 선임 하사 사이의 불화(不和)인 셈인데, 현역 시절을 훌훌 벗어난 예비군의 신분으로서 잔뜩 여유를 가지고, 권투중계를 관전하듯이 그들의 우스운 싸움을 지켜보는 맛은, 뭐랄까, 좀 짜릿하고 감칠맛 나는 그런 구경거리였다. 막말로 얘기하자면 둘의 불화는 예비군들에게 그들이 펼치는 버라이어티쇼에 불과했다. 즉 현장생중계 쇼인 셈이었다. 그러나 현역시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그들의 불화가 병들에게 미칠 파장을 불안스레 가늠하며 오들오들 떨기 십상일 터였다. 그러나 예비군들은, 이제는 그런 상황에 불안 해 할 필요가 눈곱만큼도 없는, 보무도 당당한 예비군 아저씨들이었다. 비록 깊숙한 어딘가에 처박아 둔 군복을 꺼내 켜로 쌓인 먼지를 툴툴 털어 내고 군복을 어색하게 걸쳤지만, 이 퇴색한 군복은 휴가복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누가 먼저 불화의 단서를 제공했는지는 아무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통설(通說)에 의하면, 허 중사가 현역으로 복무할 당시 이 대위가 그의 상관인 초급 장교로 있었는데, 사사건건 이 대위가 깐깐한 성깔을 부려 허 중사를 걸고넘어지는 바람에 허 중사가 번번이 곤욕을 치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참다 못한 허 중사가 어느 해 겨울, 혹한기 훈련 때, 옷 벗을 각오를 하고 술에 취해 이 대위를 두들겨 팼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철천지원수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허 중사가 옷을 벗게 된 결정적인 동기도 이 대위 때문이라고 했다. 오 병장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허 중사의 이 대위로 향한, 편집증적인 이상한 분노를 해명할 길이 없었다.
어쨌든, 선임하사인 허 중사에게 3중대장은 허 중사의 나이와 경륜에 맞는 대접을 개뿔만큼도 하지 않았고, 힘겨운 예비군 중대의 책임자인 중대장을 허 중사는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소대원들을 선동해 애를 먹이는 꼴이었다. 허 중사는 술판을 저녁마다 흐드러지게 벌려 안 그래도 물렁한 중대 분위기를 더욱 물컹하게 들쑤셔 놓았고, 공식적으로는 금지된 화투판을 공식적으로 보란 듯이 펼쳤다. 주간 훈련 때도 몰래 부대를 이탈해 계곡 넘어 과수원에서 해찰을 하거나, 트럭을 몰고 훈련장 아래 작은 읍내로 나가 저녁이 되어야 돌아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 대위의 깐깐한 성격이 이런 허 중사의 행동들을 용납하지 않는데 있었다. 그는 꼭 따지고 넘어갔다. 대충 두루뭉실하게 넘어 갈 수도 있는 게 예비군 훈련이었고, 더욱이 노병인 중사의 체면을 봐서라도 어물쩡 넘어갈 수도 있었다.
허 중사가 규율 위반 행위를 했을 때 이 대위는 대대장이 내세운 <훈련소 대대 훈련 규칙>을 들이밀어,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따져 가며 허 중사를 몰아 세우거나 그런 식으로 개기면 훈련 수료증을 줄 수 없다고 협박을 가했다. 허 중사에게 조리 있는 설득이나 협박은 사실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허 중사는 그가 주장하는 논리에 입각한 원칙을 <예외 없는 규칙>이라고 반박했다. 나도 간부라면 간부니, 일반 병들하고 다른 혜택을 받아야 할 것 아니겠느냐고, 그럴 때마다 언성을 높이며 대들었다.
논리적으로 먹히지 않으면, 이 대위는 대대장을 불러들여 화투를 빼앗게 하거나 술병을 압수하게 했다. 대대장의 단호한 행동에는 허 중사도 별 수 없는지 굴복했다. 계급 차이에서 우러나는 무게에 기가 죽은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날, 허 중사는 어떠한 형식이던 이 대위에게 보복을 했는데 대부분 유치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 태반이었다. 이를테면, 자신을 따르는 소대원들을 충동해 훈련을 팽개치고 산아래 가게에 내려가 낮술을 마신다든지, 훈련을 따라가도 뒷자리에 앉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든지 하는 따위였다. 그는 교장 맨 뒷자리에 게으르게 주저앉아 담배를 뻑뻑 빨다가 심통이 기어오르면, “쉬었다가 합시다! 밥 먹고 합시다! ”라고 교관의 강의 중간 중간에 김 빼는 소리를 거푸 질러 댔다. 그럴 때마다 속도 없이 예비군들은 허 중사의 말끝마다 노래에 후렴구를 집어넣듯이 와아! 하고 웃어 제쳤다. 늙은 예비역 중사가 어린애처럼 구는 그런 유치한 꼬락서니에, 병 출신 예비군들은 생소함과 더불어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호들갑을 떠는 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그것마저 시원찮으면 그는 손톱 만한 돌멩이를 주워 교관인 이 대위의 발치에 툭툭 던졌다. 이건 노골적인 시비였다. 그러나 이 대위는 귀와 눈을 닫고 자기가 해야 할 시간만 보내면 된다는 투로 훈련을 강행시켰다. 정 분위기가 산만하면, 이 대위는 가끔씩 지나가는 눈빛으로 허 중사 쪽을 호되게 쏘아볼 뿐이었다. 공중에서 둘의 시선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불이 붙으면 마치 눈싸움하듯이 한참을 서로 노려보기도 했다.
사실 사회에서 허 중사는 전혀 딴판이었다. 재래시장 어귀에 채소를 가득 실은 트럭을 박아 두고 순하게 보이는 얼굴로 채소를 팔고 있는 허 중사를 오 병장은 가끔씩 보곤 했다. 그 때 그는 누구보다 순박하고 소탈해 보였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면, 허 중사는 장사도 때려치우고 술집으로 오 병장의 옷소매를 잡아끌기도 했다. 사회에서 그는 순박한 채소 장수일 뿐이었다. 주위의 평판도 나쁜 편은 아닌 듯했다. 친구도 많아 보였다. 그런 그가 예비군 훈련만 들어오면 순박한 가면을 벗어 던지고 근엄하고 흉포한 표정을 번갈아 바꾸면서, 무슨 이득을 보자고 그런 낯뜨거운 장면들을 연출하는지 오 병장으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오 병장. 뭐 생각해?”
묵묵히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는 오 병장의 어깨를 허 중사가 가볍게 쳤다.
“뭐, 결론 났습니까?”
“어데.”
“복수를 해야죠.”
오 병장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허 중사요. 허 중사도 한 대 때렸소?”
맞은 편 침상에 게으르게 드러누워 담배를 꼬나문 박하사가 능글능글 웃으며 약 올리듯이 물어왔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 대위 처벌에 대한 논의에 여념이 없던 네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 하사는 장기 복부 도중 지뢰사고를 치고 옷을 벗었다는 삼십대 중반의 사내였는데 이 대위와 무던히도 친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허 중사와 박 하사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내가 뭐 하려고 똥철이를 때릴 거요? 맞는 놈이 돈 버는 세상인데.”
허 중사가 이 대위의 별명까지 섞어 퉁명스레 대꾸했다. 박 하사는 여전히 능글능글 웃으며,
“ 한대 패고 치우지. 뭘 수선을 떠요!”
하자, 허 중사가 고함을 꽥 질렀다.
“치우소! 당신은 누구 편이요?”
“누구 편은 누구 편, 나는 내 편이오. 원님 덕분에 나발이나 붑시다.”
“똥철이 편 아뇨?”
“나는 모르는 일이고. 하여튼 잘 해 보슈!”
응집된 분위기를 훌훌 휘저어 놓고 박 하사는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박하사의 밉살스러운 뒤통수를 쏘아보던 허 중사가 찌푸린 얼굴을 풀고 오 병장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오 병장 시원히 속 좀 풀 방법 없겠어? ”
“마땅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사과를 받아 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오 병장은 더 이상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앵무새처럼 아까 한 말을 다시 되뇌었다. 사실 그는 관심도 없었다. 분위기에 휩싸여 심드렁하게 앉아 술만 축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저 편안한 저녁 시간이 송두리째 깨진 것에 대해 남 모를 불만만 키우고 있었다. 오 병장은 집에서 가져온 소설책을 오늘 밤 중으로 독파하려고 작정을 했었는데 그 계획이 어긋난 게 그저 찜찜할 뿐이었다.
“저 말이죠.”
뒤에 무리에 끼어 들어, 그 동안 말없이 술만 마시던 문 병장이었다. 그는 두터운 뿔테 안경을 콧등으로 밀어 올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왕 사과를 받으려면 공식적으로 받읍시다. 연병장에 예비군들을 모두 모아놓고 말이죠.”
그의 말에 모두들 눈을 휘둥그래 뜨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 중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군복을 걸친 예비군들이 시위를 벌인다는 말에 놀라 멍하니 앉아 있던 예비군들은, 잠시 후, 과격한 문병장의 견해를 수락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 병장은 안경을 벗어 땀에 절은 러닝에 유리알을 문질렀다. 안경이 벗겨진 그의 눈두덩엔 안경테에 눌린 허연 자국이 타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안경을 낀 자가 불쑥 안경을 벗었을 때, 움푹 패인 눈두덩에서 뿜어지는 눈빛이 오 병장은 늘 섬뜩할 정도로 낯설었는데, 바로 문 병장의 눈빛이 그러했다.
“그런데 말요. 단체로 연병장에 예비군들이 집합하면 법에 걸리는 거 아뇨?”
덩치에 비해 소심한 성격을 가진 한 병장이 문 병장에게 흐리터분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일단 군복을 입었으니 군법 적용이 되겠죠.”
문 병장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대꾸했다.
“군법? 그럼 헌병대에 잡혀 갈 수도 있겠네......”
갑자기 어리석은 표정을 지으며 한 병장이 뒤로 물러나 앉았다. 아까부터, 사실, 한 병장은 겁 많게 생긴 커다란 눈알을 연신 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눈초리를 그는 숨기지 않았었다. 허 중사가 발끈하고 나왔다.
“군법은 무신 군법이고. 폭행은 형법에 걸리는 거 아이가? ”
“어쨌든 제 말은 현재 동원 예비군의 법적 신분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떤 법이라도 장교가 예비군을 때린 건 용납될 수가 없어요. 징계권으로 궁색한 변명을 할 수도 있겠죠. 물론 극단적인 경우에 말이죠. 그러나 아시다시피 징계권하고도 거리는 멉니다. 물론 중대장이 예비군을 징계할 수 있느냐는 또한 별개의 문제입니다만. 사실 허 중사님 말대로 이 대위의 주먹질은 엄연히 형법 폭행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가 그 죄과를 물어야겠죠. 당연한 권리죠.”
문 병장은 차분한 어조로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문병장의 논리적인 말에 듬직함을 느끼는지 허 중사는 그가 한마디씩 지껄일 때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했다.
“어디 갔다 오요?”
한 병장이 문으로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손 병장이었다. 그의 손엔 핸드 마이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연신 싱글거리며 핸드 마이크가 전리품이라도 되는 양 자못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것을 곧장 문 병장에게 건넸다. 아마도 문 병장이 손 병장에게 부탁한 듯했다. 허 중사의 퀭한 눈자위와 유난히 새파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따. 정말 데모 한번 할 모양이네!”
한 병장이 손 병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린 자신의 심기를 뭇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한 병장의 목소리가 자못 우렁찼다.
“할 건 해야죠! 데모든 시위든.”
최 병장이 기지개를 켜며 쾌활하게 말했다.
“어디서 구했소?”
손 병장을 올려다보고 문 병장이 물었다.
“장교 막사에서 구했어요.”
“장교라면 기간병 말이요?”
한 병장이 묻자,
“기간병이 이런 걸 주겠어요?”
하고 마냥 낮추어 보는 투로 손 병장이 퉁을 주었다. 손 병장은 보고라도 하듯이 문 병장을 똑바로 응시하고 말했다.
“예비군 장교 방 있잖아요. 거기에 있더라고요. 뭐 하려고 그러냐?, 해서 오늘 저녁에 노래자랑이나 한번 벌려 볼까 한다고 말했죠. 씨발놈들 이거 가지고 연병장에서 떠들어제끼면 기겁할 겁니다. 대대측에서 보면 한통속이라고 할거 아닙니까. 알고 보았더니 장교 출신이나 병 출신들이나 예비군은 예비군이라고요.”
“한통속은 무슨 놈의 한통속이요. 걔들이야 기간병 장교하고 한통속이지.”
허 중사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부루퉁하게 손 병장의 말을 막고는 계속해서 예비역 장교들을 씹었다.
“지들도 한때는 장교였다고 뻐기는 거 보라고요. 그것들이 훈련 온 거요? 단합대회 온 거지. 나도 간부라면 간부 아뇨. 저거는 널찍한 방에 오붓이 자면서 나는 이게 뭐요? 노상 술타령에 고스톱은 독판 치면서 나보고 하지 말라고? 흥! 빌어먹을.”
허 중사가 말했듯이, 예비역 장교들은 훈련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휴가를 즐기러 온 거나 다름 없었다. 대부분 R.O.T.C. 출신인 그들은 형식적으로 각 소대 소대장으로 임무가 부여되어 있지만 점호 시간에 잠시 얼굴을 보여 줄 뿐 그 외 시간에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저희들끼리 뭉쳐 다녔다. 일반병 내무반과 동떨어진 한적한 방에 소수의 인원들이 차지하고 앉아, 밀회를 즐기는 연인들처럼 단출하게 훈련이 아닌 휴가를 즐기곤 했다. 기간장교들은 선배인 그들을 찾아 술병을 들고 문턱을 드나들었다. 그들은 훈련을 거의 받지 않았다. 어쩌다 상부에서 훈령이 떨어져 예비역 장교들도 훈련을 받아야 할 상황이 생기면 그들은 소총을 거꾸로 메고 힘겹게 산허리를 타다가 소리소문 없이 옆길로 새곤 했다. 그러나 조교들은 끝까지 따라가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훈련에 참가하지 않으면 중대장에게 보고해 훈련 수료증을 못받게 하겠다고 일반 예비군들에게 하는 것처럼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그러니 병 출신 예비군들이 예비역 장교들을 보는 눈이 고울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장교들하고 티격태격 싸우는 법은 없었다. 설령 현역 장교들하고 그들이 가끔씩 논바닥에 뒹굴며 싸우는 일은 있어도. 도대체 얼굴을 잘 보여 주지 않으니 예비역 장교들과는 시비가 걸릴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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