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오 병장은 피로한 시선으로 둘러앉은 사내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들도 지쳐 보였다. 오 병장은 술이 깨기 시작하자 관자놀이가 쑤셔 왔다.
두 시간 남짓 그들은 이 대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대장의 기다리라고 한 마지막 말에 허 중사는 한껏 기대를 품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자꾸 흘러가자 초조한 듯 줄담배를 피워 댔다. 각 중대 대표로 온 사내들은 지겨운 듯 엉덩이를 들썩이거나 하품을 해댔다. 그러나 문 병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침상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이따금씩 곤혹스러운 빛이 간헐적으로 보였다.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최 병장은 길게 누워 버렸다. 모의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예비군들은 모두 잠에 빠져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 왔다.
오 병장은 밖으로 나왔다. 내무반에 진이 베인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퀴퀴한 냄새에 뒷골이 당겼고, 게다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아 바람을 쐬기 위해서였다. 1층에 있는 허 중사의 내무반을 나와 현관으로 나오자 선득한 바람이 불쑥 다가들었다. 소 연병장 어둑한 구석마다 담뱃불이 반딧불처럼 반짝반짝하고 깜박거렸다. 오 병장은 구겨진 담배갑을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내 끝이 말린 담배를 곧게 펴서 불을 붙였다. 그리곤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풀밭 쪽으로 걸어갔다.
“저 좀 봅시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어둑한 어둠 속이라 누군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오 병장이 우뚝 멈추어 서자 그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는데 보니 박 병장이라는 자였다.
“답답해서 나왔군요?”
“예. 그런데......”
“아, 그냥 저도 좀 답답해서요. 저 쪽에 좀 앉읍시다.”
박 병장이 풀밭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길게 사설을 늘어놓았다.
“저는 말이죠. 이 대위와 허 중사의 사건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실패한 자의 몸부림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내 인생을 화풀이하는 추접스런 인간이 되질 말자, 하고 거듭 다짐을 했어요. 솔직히 허 중사의 분노는 넋두리에 불과해요. 사과를 받아 낸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속이 좀 시원한 가요? 그렇지만 그건 일시적인 한 풀이 밖에 안 돼요. 결국 나이 먹은 사람이 병들에게 우스운 꼴만 되고 마는 거죠. 저는 그런 꽁한 감정을 가지고 사는 것 보다 그런 감정들을 좋은 쪽으로 승화시키라고 하고 싶었어요. 작년부터 쭉 허 중사와 이 대위간의 관계를 쭉 지켜보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허 중사가 한 맺힌 사람처럼 놀더라고요. 발악하는 수준이었어요. 불쌍하게도. 결국 허 중사 손햅니다. 허 중사의 소모전에 불과하다 이겁니다. 그렇다고 이 대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그 친구가 내년에 다른 부대로 전출가면 끝이라고요. 침을 퉤퉤 뱉으며 말이죠. 아마 미친개한테 물린 셈치며 전출을 갈 겁니다...... 아까 문 병장이 시비를 거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지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설명하고 싶었다고요. 작금의 시대가 어떤 시댑니까? 작금의 시대가 각 계급간의 자유로운 왕래가 원칙적으로 보장되어 있죠.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하층 계급에서 상층계급으로 수직 상승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이 드는 줄 아십니까? 앞 뒤 잴 경황이 없어요. 이를 악물고 노력을 해야 상층부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고요. 선진국은 다른 줄 아세요? 유럽은 말이죠. 오스트리아 황제 집안인 합스부르크가(家)가 경제권을 쥐고 특권층을 장악하고 있고, 미국은 하버드 출신들이 일본은 동경대 출신들이 꽉 잡고 있대요. 그런 단단한 성벽을 깨려면 얼마나 힘든 노력이 필요하겠어요. 시대를 원망하며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보낼 시간이 없다고요. 그래서 나는 고시공부를 하고 있죠. 말단 경찰을 때려치우고 말이죠. 그러니 푸념만 늘어놓을 때가......”
“그게 지금 이 사건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오 병장이 박 병장의 말을 자르며 뾰족하게 되치고 나왔다. 말이 많은 작자였다.
“상관요? 직접적인 상관은 없죠. 그러나......”
“들어가시지 않을래요?”
하품을 꺽 하고 나서 오 병장이 박 병장의 말을 매정하게 잘랐다. 안 그러면 그의 말이 끝없이 이어질 판이었다. 왠지 마뜩찮은 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부터 뭔가 비뚤어진 시각을 가진 자라고 느껴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는데, 출세를 위해, 마치 귀족이 되기 위해 고시공부를 한다는 듯한 그의 말을 듣고는 역한 감정까지 덩달아 치솟았다.
“내무반에 뭐 달라진 게 있을까요?”
박 병장이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달라져야겠죠.”
오 병장은 벌떡 일어나 박 병장을 안중에 두지 않고 내무반으로 들어갔다. 박 병장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무반엔 박 병장의 말대로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아까 보다 더욱 풀어진 자세로 병들이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술잔이 도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고 어떤 자는 술잔을 무릎 앞에 놓고 고사를 지내듯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와?”
허 중사가 물었다.
“바람 좀 쏘이고 옵니다.”
“박 병장은 못 봤어요?”
이 번엔 변 중사가 물었다. 오 병장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나가더니 함흥차살세.”
변 중사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두 번 문 두드리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렸다. 오 병장은 잠기려는 눈을 부릅떴다. 모두들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삐그시 열리며 이 대위가 아닌 정 중위가 들어왔다. 풀어진 눈매를 잔인하게 만들어 모두들 정 중위를 노려보았다. 정 중위는 죄지은 사람처럼 필요 이상으로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뭐라 하대요?”
정 중위에게 턱짓을 하며 변 중사가 퉁명스레 물었다.
“저,......”
“말하소. 뭐 하요?”
답답한 듯이 허 중사가 재촉했다.
“......이, 이 대위가 계속 뻗댑니다. 술에 엄청 취해 가지고 대대장이 설득해도 막무가냅니다. 정 열 받으면 옷 벗겠다고 하더라고요.”
“허, 참, 예비군 때문에 옷 벗는 군인 나오겠군......”
기가 차다는 듯 문 병장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리고 뭐라고 했소?”
침을 꿀꺽 삼키고 정 중위에게 바짝 다가앉으며 허 중사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대대장이 그러는데요, 내일 훈련 안 받으면 퇴소(退所) 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정도가 지나치면 보안대까지 부르겠답니다. 각오가 단단해 보였습니다.”
“보안대?”
“게다가......아까 데모할 때 그 장면들을 카메라로 다 박아 놓았다고도 하더군요. 만약 내일 오전 9시까지 <훈련집합>을 하지 않으면 보안대를 불러 불법시위 혐의 증거로 그 사진을 넘기겠답니다. 그 사진만 해도 충분히 입건은 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불법시위? 입건?”
허 중사가 입을 딱 벌렸다.
“주동자들 명단도 다 확보해서 보안대에 신원조회까지 들어갔다고 저에게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정 중위가 흘끗 문 병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문 병장의 안색이 일순 흐려졌다.
“뭐요? 이거 완전히 협박 아냐? 협박! 보안대라니.”
허 중사가 벌떡 일어났다. 허 중사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금새 흙빛으로 돌변했다. 정 중위는 고개를 떨구고 군화 밑창으로 바닥을 직직 긁었다. 그러다가 정 중위는 황급히 내무반을 빠져나갔다.
예비군들은 망연히 앉아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오 병장은 너무 길게 끌어 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이 대위의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느꼈다.
“어쩌죠?”
최 병장이 문 병장에게 힘없이 물었다.
“글쎄요...... 그것 참.”
문 병장의 눈자위가 사뭇 떨렸다. 그는 황급히 담배를 빼물고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곤혹스러운 빛이 얼굴 전체로 번져 갔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러다가 그는 답답해서 더는 못 견디겠는지 훌쩍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 병장의 뒷모습이 사뭇 흔들거렸다.
“저 사람 누군지 압니까?”
최 병장이 오 병장에게 나직이 물어왔다.
“......?”
“유명한 데모 주동자였대요. 저번 민주화 운동 있지요? 거기서도 한가닥 했다고 하대요. 옛날엔 구속된 적도 있대요. 왜, 아까 안 봤어요? 그 연설하는 거? 어디 그게 보통 말솜씨대요?”
“봤죠. 역시......”
오 병장은 고개를 연신 까닥이며 대꾸했다. 허 중사가 흘끗 오 병장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문 병장은 한 시간이 흐르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멀찍이 벽에 기대앉아 있는 허 중사 눈치를 살피던 최 병장이 다시 오 병장에게 말을 걸어왔다.
“문 병장이 어디 간 모양이죠?”
“기권한 거 아닐까요?”
오 병장은 되물었다. 그러자 목소리를 한껏 죽여 최 병장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어딘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고 하더니 그 무시무시한 보안대가 온다고 하니까 지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오. 그럴 만도 하죠.”
“고문?”
“문 병장이 내가 다니는 출판사에 가끔씩 나타나거든요. 우리 회사 꼰대하고 잘 아는 모양입디다. 우리 출판사는 이념적인 책을 가끔씩 출판하거든요. 그렇다고 용공적인 책을 내는 것은 아니고요. 조금 반골적인 책들을 낸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런데 저 문 병장이 그런 책에 조금 관여하는가 봅디다. 그래서 나도 문 병장을 알게 되었죠. 밖에서 술도 한잔씩 했어요. 물론 사장하고 같이 말이죠. 사람은 똑똑한데 내가 보기엔 좀 몽상가 같더군요. 이를테면 피터팬 증후군이라고 해야 되나? 왜 그런 거 있잖아요. ”
“아까 고문을 받았다고 했는데 문 병장이 자기 입으로 그러던 가요?”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소문이 돕디다. 생긴 게 꼭 투사 이미지 같잖아요. 하얀 얼굴에 두꺼운 안경을 척 걸치고 호리호리한 몸매고요. 저런 사람이 일제 시대에 태어났으면 독립 운동가가 안되었겠어요? ......나는 말이죠. 부끄러운 얘기지만 데모 한 번 안 해 봤거든요. 물론 뒤에서 구경은 했죠. 솔직히 내가 만약 일제 시대에 태어나 독립운동할래 총독부 관리할래 하고 누가 묻는다면, 그리고 반드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면 정말이지 독립운동은 자신 없어요. 비겁하게 헌병 보조나 고등계 형사같이 파렴치한 일본 놈 앞잡이는 못 하겠지만 총독부 관리로는 당장 들어갈 것 같아요. 부와 나름대로의 영예가 보장되잖아요. 그런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말이죠.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무슨 말씀을......아까 보니까 충분히 독립운동 할 자격이 있어 보이던데요? 말씀도 잘 하시고 대중을 끌어 모으는 능력도 있어 보이고요.”
최 병장이 큰소리로 와르르 웃어제꼈다.
“그건 정치꾼들 흉내낸 거죠. 독립운동하고 정치는 틀려요. 독립운동은 목숨을 내놔야 하잖아요. 그러나 정치는 그런 위험은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 개나 소나 돈 좀 벌고 힘이 있으면 정치하려고 설치잖아요. 다시 만약 일제 시대 같은 어두운 세월이 덮치면 정치인들의 태반이 변절할걸요? 결국 정치하는 사람들은 국회의원이라는 귀족신분을 사고 싶어서 정치로 뛰어든 거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국회의원을 17세기쯤의 유럽의 경우로 보면 백작이나 남작 같은 귀족이 아니겠어요? ”
오 병장은 고개를 무심코 끄덕였다.
“결국 귀족이 되기 위해 갖은 수를 써서라도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죠. 물론 그들만 욕할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말해놓고 최 병장은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오 병장은 관자놀이가 욱신거려 엄지손가락으로 그 곳을 꽉 누르고 관물대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었다. 예비군들은 묵직한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무던히도 달려드는 졸음을 쫓고 있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하품을 꺼억 토해내던 변 중사가 슬그머니 일어서서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고 다른 대원들도 서로 눈치만 보았다. 오 병장도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허 중사는 물을 마시듯이 술을 목에 들이부었다. 안색이 갈수록 창백해졌고,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뭐라고 지껄이곤 했다. 그러다가 문 쪽을 힐끔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완연히 드러냈다.
그 때였다. 문이 덜컹 열리더니 뜻밖에도 이 대위가 불쑥 들어오는 것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허 중사는 숫제 벌떡 일어섰다. 이 대위는 군복 윗도리를 벗어붙인 러닝차림이었는데, 괴이하게도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철제 대위 마크가 찍힌 모자를 습관처럼 꾹 눌러 쓰고 있었다. 모자에 박힌 흰 독수리 날개가 유난히 선명했다. 그도 술이 꽤나 올라 있는지 비틀비틀하며 충혈된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고 있었다.
“사과하러 왔소?”
허 중사가 빈정대듯이 말하자 이 대위는 가소로운 듯이 허 중사를 노려보다가 불쑥 말을 뱉어냈다.
“밖에 나가서 얘기 합시다. 따라 나오쇼!”
허 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서 사과하소! 내가 미쳤다고 당신을 따라 나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과를 하란 말요.”
“잔말말고 따라 나와요!”
“어! 이것 봐라.”
허 중사는 기가 찬 모양이었다. 허 중사를 호되게 쏘아보던 이 대위는 그렇게 통고를 해 놓고 문짝을 발로 쾅 차고는 나가 버렸다. 모두들 어리벙벙한 표정들이었다. 허 중사는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대원들의 표정을 일일이 훑었다. 그는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허 중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오 병장에게 물었다.
“오 병장 지금 나가 봐야겠나?”
오 병장은 대답대신 최 병장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최 병장이 즉각 제안을 내 놓았다.
“나가야죠.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모르잖아요. 단, 오 병장하고 나하고 둘만 따라 나갈게요. 너무 우루루 나가면 이 대위가 겁먹고 피할지도 모르니까요.”
허 중사가 앞장서고 오 병장과 최 병장은 그 뒤를 따랐다. 복도에 이 대위가 보이지 않자 그들은 소 연병장으로 걸어 나왔다. 이 대위는 계단 밑에 우뚝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대위가 손짓을 했다. 허 중사를 내려보내라는 신호 같았다. 오와 최는 계단 위에서 기다리고 허 중사만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허 중사와 이 대위가 마주 섰고 둘은 서로 눈싸움하듯이 상대방을 빤히 들여다보고만 있더니, 문득 이 대위가 허 중사의 팔을 잡아채고는 “따라 오소!” 하며 소나무들이 일렬로 서 있는 연병장 가로 허 중사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허 중사는 묵묵히 이 대위 손에 이끌려 비틀비틀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허 중사의 다리는 형편없이 풀려 있었다. 내무반에선 다른 예비군들이 목을 길게 빼고 그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둑한 곳에 다다른 둘은 첨에 뭔가 조용하게 말을 주고받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다가 언성이 고조되었고, 일순 험악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불안한 마음을 키우던 오 병장이 그 쪽으로 뛰어 가려고 하자 최 병장이 그의 어깨를 불끈 잡았다. 오 병장은 눈을 크게 뜨고 최 병장에게 항의의 표시를 해 보였다. 최 병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최 병장의 표정은 잔인해 보였다.
어둑한 연병장 쪽에서 또 한 차례 허 중사의 고함 소리가 들려 왔고, 앙칼진 이 대위의 목소리가 뒤 이었다. 그리고 고함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퍽! 퍽! 하는 둔탁하면서 공포에 절은 싸한 파열음이 연이어 들렸고, 욱! 하는 비명 소리가 둔탁한 타격음을 뒤따라 재빠르게 어둠을 가르고 날아와 꽂혔다. 분명 쓰러지는 쪽은 이 대위였다. 반사적으로 오 병장과 최 병장은 계단을 타고 그 쪽으로 내달렸다. 동시에 내무반에서 그 쪽을 주시하던 다른 예비군들도 창틀을 타고 넘어 연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허 중사는 씩씩거리며 비참하게 모로 쓰러진 이 대위의 등판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고, 이 대위는 욕지거리를 씹어 내면서 휘청휘청 일어서고 있었다. 일어서서 이 대위는 비틀비틀하면서도 눈에 불을 켜고 허 중사에게 접근했다. 허 중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구경 나온 예비군들에게 무참한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이 대위는 갈퀴 같은 손아귀를 뻗어 발악하듯이 허 중사에게 덤벼들었다. 덮쳐 오는 이 대위의 주먹을 허 중사가 미꾸라지처럼 옆으로 몸을 비틀어 비껴 빠져 나오자, 휘청거리며 한 쪽으로 쏠린 이 대위의 몸체가 연병장 가에 도열한 소나무 등걸에 퍽! 하고 부딪히며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이 대위는 엉망으로 취해 있었다. 예비군들이 쓰러진 이 대위 주위를 둘러섰다. 그러나 아무도 말릴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씨발놈! 용을 써네.”
그런 이 대위의 꼬락서니를 내려다보며 역시 엉망으로 취한 허 중사가 욕을 씹어 돌렸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오 병장이 얼른 달려가 이 대위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 사이에 다른 대원들이 계속 뻗대는 허 중사를 계단 쪽으로 밀어내며 내무반으로 끌고 갔고, 소란스러운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난 예비군들이 밖으로 와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놔! 나를 쳤다 이거지? 오냐, 잘 됐다! 이번에 콩밥 한번 먹여 주지!”
콧잔등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이 대위가 거푸 소리를 질렀다. 연병장이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었다. 오 병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뻗대는 이 대위를 밝은 불빛이 있는 현관으로 데려갔다. 불빛에 이 대위의 얼굴을 비추어 보니 코피가 입 언저리로 흘러 엉겨 있었고, 콧등이 퉁퉁 부어 오른 것 같았고, 검붉은 핏빛이 둥근 얼굴 전체로 번져 있었다. 오 병장은 큰일났다 싶었다.
“중대장님! 수돗가로 가시죠. 가서 좀 씻어야겠습니다.”
“넌 누구야?”
“오 병장입니다.”
“오 병장? 오 병장이 누군데?”
이 대위가 비틀거렸다.

허 중사는 이 대위에게 본 때를 보여 준 게 속이 시원한지 낄낄 웃다가도 은근히 걱정도 되는지 가끔씩 곤혹스런 표정을 언뜻 내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대원들은 대대측에서 어떻게 나올까 고심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대대장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최 병장은 허 중사의 잔을 짐짓 빼앗으려고 하다가 워낙 그가 완강히 버티는 바람에 그만 두었다.
내 무반에는 좀 전까지만 해도 득시글거리던 대원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최 병장과 오 병장 허 중사 이렇게 세 명만 오롯이 남아 있었다. 애초부터 음모에 관심이 없던 축들은 애써 잠을 청하는 눈치였다. 문 병장은 종내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후 정 중위가 약간 흥분된 얼굴로 내무반에 들어왔다. 그리곤 당당한 어조로 허 중사에게 말했다.
“대대장님이 오랍니다. 지금 대대장님 아주 흥분된 상탭니다. 내일 바로 고발조치 하겠대요.”
“고발? 고발하라고 하소! 빚을 갚았을 뿐인데 무신 고발이오?”
손을 휘저으며 허 중사가 소리를 질렀다. 최 병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코뼈가 내려앉은 모양입디다.”
“코뼈? 나는 이빨이 흔들리요. 지만 그런가? 하여튼 난 모르겠으니, 직이던 살리던 알아서 하라고 하소! 알았소? 알아들었나 이 말이오!”
“저한테 왜 화를 내세요?”
정 중위가 고리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하여튼 나가소. 한마디로 배 째라 이거요. 니기미.”
허 중사가 강경하게 나오자 최 병장이 슬쩍 거들고 나왔다.
“가 보세요. 화해하자고 그러는지 모르잖아요. 계속 이러다가 큰코 다칩니다.”
“하! 최 병장도 겁은 많아 가지고...... 그건 그렇고, 문 병장은 어디 갔어요? ”
허 중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여튼 전 전했습니다. 분명히.”
그러면서, 못마땅한 듯이 허 중사를 지그시 노려보던 정 중위는 흘끗 오 병장을 쏘아보면서 방을 나가 버렸다.
“문 병장 어디 갔어요? 최 병장.”
허 중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꼬대처럼 문 병장을 찾았다.
“아까 나가서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 그만 앉으세요.”
보다 못한 오 병장이 허 중사의 허리춤을 확 잡아 당겼다.
“놔라! 야가 왜 이래?”
최 병장이 자야겠다며 자리를 뜨자 허 중사는 멀뚱히 앉아 담배를 줄기차게 피워 댔다. 이미 내무반에 불이 꺼지고 천장에 매달린 5촉 꼬마전구가 힘겹게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오 병장은 선뜻 일어서 내무반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다른 자들과 달리 밖에서 허 중사와 몇 번 만난 인연이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허 중사가 오 병장에게 착 가라앉은 말투로 바람이나 씌자며 권해왔다. 어떻게 된 셈인지 그의 말투엔 술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막사 밖은 축축한 어둠과 적막이 쌓여 있었다. 갑자기 풀벌레 소리가 계곡에서 요란스레 기어 올라왔다. 풀밭에 나란히 앉자 시원한 솔바람이 어둠을 가르고 살살 불어왔다. 발치 아래 대연병장은 한치의 분간도 할 수 없는 어둠뿐이었고, 그 아래 토담으로 지은 조그만 마을의 불빛도 이미 꺼져 그 쪽도 어둠 천지였다. 마을 뒷산 산마루 하늘과 닿아 있는 공제선상에 유별나게 솟아오른 유난히 커다란 소나무가 검은 바람에 일렁이는 것 같았다.
“오 병장! 이 대위에게 복수를 하고 보니 시원섭섭하네.”
허 중사가 침묵을 갈아엎고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전혀 술에 취한 사람 같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였다.
“시원은 뭐고 섭섭은 뭡니까?”
“글쎄.”
“......이 대위하고 왜 그리 사이가 안 좋아요? 정말 소문대로 옛날부터 악감정이 있던 겁니까?”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을 오 병장이 슬며시 꺼냈다. 허 중사가 피식 웃었다.
“말하기 싫으면 관두세요. 그냥 물어 본 말이니까요.”
“대단한 거 아니다. 사람 감정이 묘하더라고.”
“......?”
“재작년에 훈련을 들어와 보니 중대장으로 이 대위가 있더라고. 거기서 첨 이 대위를 본 거야. 전출해온 새로운 중대장이었지. ”
“첨 봤어요? 현역 때 같은 부대에 근무한 게 아니고요?”
“첨 봤어. 그런데 이 자식이 말을 픽 놓는 거야.”
“말을 놔요? 그럴 리가.”
“진짜라니까. 훈련 이틀짼가? 하여튼 그 날 무지하게 더워 연병장 앞 소나무 밑에 웃통을 다 벗고 앉아 있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너 이 새끼 뭐 하는 거야?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잖아. 아니 어느 자식이 중사한테 욕을 하나 하고 뒤를 돌아보니까 이 대위더라고. 성질이 팍 나서, 뭐요? 지금 뭐라고 그랬어? 하니까 머리를 벅벅 끓으며, 한다는 소리가, 상고머리를 하고 있는 바람에 조교로 착각했다고 변명을 하는 거야. 씨발놈이. 실수였다고 이해해 달래. 그래 한 번은 용서를 해 줬지. 그리고 깨끗이 잊어버렸어. 정말이야.
그러다가 훈련이 끝나고 얼마 뒤, 트럭을 몰고 K동 뒷골목을 뒤지고 다니다가 마침 좋은 자리가 있어 차를 세우고 채소를 팔고 있었어. 마이크를 틀어 놓고 고함을 질렀지. 그 동네가 좀 부자동네잖아. 내가 채소를 싼값에 넘기니까 돈 많은 사모들이 바리바리 몰려들어 무더기로 배추며 파 따위를 사 가는 거야. 신나는 하루였지. 그런데 좀 있으려니 한 녀석이 골목에서 나오더니 고함을 지르는 거야. 모처럼 휴일이라서 잠 좀 자려고 했더니 당신 때문에 글렀다고. 가만히 보니 이 대위더라고. 그 곳에 살림집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내가 인사를 먼저 했어. 안녕 하시냐고. 나를 모르겠느냐고 말이야. 머리까지 숙였어. 그래도 중대장은 중대장이니까. 아니, 그런데 이 자식이 다짜고짜 말을 툭툭 까면서 아는 척도 안하고 대뜸 욕부터 하는 거야. 하사관 출신이라고 무시를 까는 거야. 그러면서 조용한 동네에 와서 왜 지랄을 틀고 난리를 치냐고. 얼른 차를 빼라는 거야. 성질이 나나 안 나나. 에이, 씨발놈 싶어서 배추를 그 새끼 면상에다가 휙 집어 던졌지. 그랬더니 씨발놈이 대드는 거야. 내가 참을 수 있나? 나도 곤조가 있지. 다짜고짜 팔을 잡아 비틀어 차에다가 밀어 부쳤지. 병신 같은 게 약골 주제에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경찰에 신고를 하겠대. 수도로 울대를 후리려다가 참았어.......”
“그래 신고를 하대요?”
“신고 좋아하네. 그 새끼가 신고하기 전에 동네 사람들 보기 창피해서 트럭을 몰고 바리 그 동네를 벗어났지 뭘.”
“그 때부터 허 중사님에게 이 대위가 찍혔군요.”
“내가 찍혔지. 예비군 훈련을 작년에 들어 왔더니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더군. 사사건건 시비고 금지고 이거 미치겠더군. 고스톱 치지 마라! 술 먹지 마라! 병들 단속해라! 도대체 중사가 되가지고 행동이 그게 뭐야? 중사가 무슨 벼슬이오? 하고 대드는데 미치겠대. 그럼 대위는 무슨 중뿔난 벼슬인가? 중사 체면이 있지. 병들 앞에서 그게 무슨 자존심 팍팍 무너지는 소리냐 이거야. 나도 간부라 이 말이야. 안 그렇나? 오 병장! 내가 누군데! 안 그래?”
“그럼요. 명색이 특수부대 중산데......”
“그런데 말야. 그 자식이 시비를 걸자, 잊고 있었던 군대 생활이 떠오르면서 과거 장교들하고 몇 차례 부딪힌 일들이 확대되어 부풀어오르는 거야. 이상하지? 군대 생활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데 말야. 사실 제대하고 나서 얼마 뒤 괜히 제대했다고 후회한 적도 있어. 난 군 체질인 것을 뒤에 알았다니까? 난 장교들도 이해한다고. 제대하고 나서도 별 감정 없었고. 물론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이 대위가 바닥에 깔아 앉은 감정들을 자꾸 건드리는 거야. 그러자 정말 내가 군 생활할 때 혹시 장교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게 없는가 하고 되새기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억울한 일이 꽤 기억 나더라고. 이상한 일이지? 그래서 이상하게도 제대하고 난 한참 뒤에 뒤늦게 나하고 충돌했던 장교들을 미워하게 됐어. 현재는 미워할 대상이 내 앞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밥 먹다가 군 시절 억울하게 당한 일을 떠올리면 소화가 안 되는 거야.
더욱 아픈 것은 밸도 없이 장교들한테 헤헤거리며 아부를 했던 기억이야.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지. 그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니까. 빌어먹을. 내가 트럭을 몰면서 이렇게 찌그러진 인생으로 전락한 것도 그 놈의 군대 때문이란 생각까지 요새는 든다니까? 하여튼 훈련만 들어오면 그 악몽들이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는 거야. 장교들만 보면 열이 받치더라고. 그런데 미운 털이 박힌 이 대위는 오죽하겠어?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나에게 박혔는데. 그래서 이 대위를 겨냥하고 갉기 시작했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밀고 나간 거야. 나이 어린 병 출신 예비군들에겐 좀 창피한 일이지만 별 수 있나? 그 놈이 그렇게 나오는데?”
“독종을 만났네요.”
“조용히 살려고 하는데 왜 자꾸 시비를 거느냐 말이야. 안 그래도 엿 같은 인생이 미워 죽겠는데 말이야. 자꾸 열패감을 부축이잖아 그 새끼가. 지는 잘난 게 뭐 있다고.”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득 변 중사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형님! 한가지 물어봐도 돼요?”
“뭔데?”
“형님 정말로 육사 가는 게 꿈이었어요?”
허 중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야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육사를 아무나 가는 줄 아나? 내가 대학 들어갈 때만 해도 육사 갈려면 서울대하고 맞먹는 점수라고. 허, 이 친구.”
“그럼 아니군요?”
“말도 안 된다. 내 머리를 내가 아는데 무슨 육사. 난 하사관 체질이라. 저녁 야참으로 라면 하나에 소주 한 병이면 헤헤 웃으며 잘도 버티는 하사관 말이다.”
“그런데 왜 옷을 벗었어요?”
“친구가 꼬시는 거야. 같이 사업하자고. 그래 훌렁 옷 벗고 나왔다가 돈만 날렸지 뭐. 세상물정을 알아야 사업을 하지.”
“옷 벗은 게 이제는 후회되겠군요.”
“이제는 아니다. 내가 손해를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거든. 군에서 바보처럼 헤헤 웃으며 병들이나 가지고 놀던 무지렁이 신세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거야. 그걸 이 대위가 가리켜 주었지. 가만히 나를 내버려만 주었어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인데 말이야. 나를 자꾸 자극하잖아. 씨발놈이 말이야.”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 다 잊어 버리세요.”
“나도 이 정도면 많이 봐 준거야. 나 이래 봐도 특수부대 출신이야! 그깟 놈 병신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오 병장은 알지?”
허 중사는 바짝 치켜 깎은 상고머리통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사라락 소리가 들렸다.

오 병장은 황갈색의 엷은 취침등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천장에선 털털거리며 고물 선풍기가 시원찮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등짝에 후끈한 온기가 가득 고여 그는 모로 돌아누웠다. 옆자리에 누운 예비군이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육중한 다리가 그의 엉덩이 위로 올라왔다. 그는 다리를 던져 버리고 일어나 앉았다. 입구 벽면에 매달린 원형 시계가 새벽임을 알려 주었다. 그는 술에 만취하면 이상하게 잠을 설치는 버릇이 있었다. 술에 의해 증폭된 휘황한 열정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 병장은 옷을 꿰고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더 자기는 글러 먹은 것 같아서였다. 연병장은 아직도 어스름이었다. 푸르스름한 장막을 걷어 낼 듯이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화단에 핀 꽃을 졸린 눈으로 일별하고 그는 계단을 밟아 내려와 계곡 초입의 나무 아래 길다란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깔깔한 입맛에도 불구하고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내일이면 퇴소(退所)였고, 훈련장을 빠져나가면 새로운 세상이었다. 여기에서 있었던 얘기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의미 없이 사그라질게 분명했다. 한 퇴역 군인의 몸부림 정도는 한줌의 웃음거리에 불과할 터였다. 그런 어이없는 일들이 저 저자거리에는 무진장 깔려 있었다.
오 병장은 끈끈한 타액이 묻은 것 같은 얼굴에 물이라도 끼얹을 작정으로 계곡으로 걸어갔다. 어스름이 새벽바람에 밀려나고 계곡은 차분한 신새벽으로 맑아지고 있었다. 물굽이의 살랑거리는 소리가 향긋하게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는 자유로움에 들떠 급격하게 경사진 비탈을 서둘러 기어 내려갔다. 정갈하고 투명한 계곡 물이 좌우로 시립한 아카시아 나무들을 푸르스름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바지가랑이를 둥둥 걷고 얼음장같은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 때였다. 막 창백한 계곡 물을 한웅큼 손아귀에 담아 들고 얼굴에 끼얹으려던 참이었다. 마을 쪽으로 휘어지는 언덕배기 옆 물푸레나무가 듬성듬성 솟은 곳에서 큰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이거 놔요! 놔!”
“중대장님! 용서해 주이소. 내가 술기운에 지랄육갑을 떤 모양이오. ”
오 병장은 말소리가 들려 오는 둔덕 너머 자작나무 숲으로 살며시 걸음을 옮겼다. 굵직한 나무둥치에 몸을 숨기고 그 쪽을 훔쳐보았다. 오 병장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허 중사가 무릎을 꿇고 있었고 콧잔등에 붕대를 매단 이 대위가 거만스럽게 우뚝 서서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하는 허 중사를 떡 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발 고발은 하지 말아 주이소. 앞으로 고분고분 말을 잘 듣겠습니다. 제가 중삽니다. 중사 체면을 봐서라도 제발......제 나이가 몇 살입니까? 나이를 봐서라도 제발......”
“허 중사야 주먹대장 아뇨. 특수부대까지 나왔다며? 애무한 사람 코뼈나 깨는 그 잘난 특수부대 말이요.”
“무슨 소립니까? 특수부대라뇨. 난 특수부대 문 앞에도 가 본 적이 없어요. 난 취사담당만 5년 했어요. 정말입니다. 믿어 주이소.”
“그런데 왜 특수부대 나왔다고 구라를 치는 거요? ”
“......”
“하여튼 아침에 봅시다.”
“한마디 말만 해 주이소! 고발 안 한다고.”
“허, 이 양반,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