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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 / 굿바이 20세기
차별의 옹벽은 무너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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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전성시대는 2차대전 이후 약 30년간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전후 30년은 20세기의 태생적
한계인 냉전(冷戰)이 절정에 달했고, 20세기가 제조했던 과학기술문명이 인류의 모든 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으며, 20세기가 고안했던 국가와 사회제도가 활기찬 성장을 구가한 시대였다. 그
어떤 것도 20세기의 이러한 행진을 막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20세기는 전 인류의 70% 이상이 땅에 속박되어 있던 농촌사회로부터 출발하여, 70% 이상이 산업과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말하자면 생존방식의 대전환을 만들어냈다. 20세기는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로부터 출발하여 혁명이 더이상 불가능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시대로 이행했다. 또한 20세기는 20세기 이전의 인류의 모든 역사시간이 이룩했던 것보다 더 풍요하고 세련된 과학기술문명을 만들어 냈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역사와 사회기획의 주도권을 과학과 첨단지식에 넘겨주어야 하는 운명에 봉착한 시대이기도 했다. 20세기는 민족국가의 시대였다. 그러나 세계국가 또는 세계주권이라는 비가시적 실체에 민족국가의 사활을 걸어야 하는 시대로 진입했다.
73년 오일쇼크 계기 복지국가 흔들 이렇게 보면, 20세기는 스스로가 성취했던 바로 그것에 의하여 20세기의 역사적 의미가 부정되는 ‘모순의 세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모순은 지혜의 한계, 욕망의 확장, 지식과 의지의 성공과 실패로 점철되었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인간적이다. 그리하여 20세기는 인간적 모순의 세기인 셈이다. 정반합으로 진행되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논리가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보다 20세기에 더 극명하게 들어맞는다. 20세기를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고 신구 문물, 전통과 현대가 뒤바뀌는 대단히 복합적인 시대로 묘사한다면, 며칠 앞으로 다가온 21세기는 20세기의 성취와 실패를 유유히 즐기는 비교적 단순한 시대로 형상화될 것이다. ‘스타워즈’와 같은 과학영화에 담긴 미래의 생활상이 단순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류사회의 생활양식이 한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 중심축은 과학기술과 시장(市場)이 될 것이다. 20세기의 변동을 주도했던 중심축이 이데올로기와 국가였다면, 그리하여 인류사회의 질서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창출해내는 과정에서 대규모 전쟁과 국가간 갈등이 수시로 발생했다면, 21세기의 모든 요구와 갈등은 과학기술의 상업성과 합리성, 그리고 그것을 확산시키는 핵심기제로서의 시장메커니즘에 굴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복지국가(Welfare state)가 그예다. 복지국가는 인류가 창안한 모든 제도 가운데 가장 탁월한 문화적 창조물이다. 그것은 불평등과 무책임성으로 요약되는 시장의 폐단을 극복하고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국가운영의 원리다. 복지국가가 탄생하지 않았더라면 인류사회는 유능한 자에 너그러운 자유주의의 내부 한계와 강자를 돕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경쟁원리에 의하여 붕괴됐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복지국가 자체를 자본주의적 모순의 유연한 연장을 위한 교활한 제도로 폄하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아무튼 자유와 평등의 양립가능성을 보여준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1973년 오일쇼크를 계기로 복지국가의 비용이 증가하고 제도적 효율성이 약화되면서 시장의 반격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케인스가 죽고 하이에크가 되살아난 것이다.’ 복지국가는 계급정치에 의해 탄생했지만, 그것의 모태인 계급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복지국가의 기반이 노동계급의 정치로부터 중산층의 정치로 이동한 것이다. 중산층은 능력에 따라 보상받고 기여한 만큼 재산권을 확보할 수 있는 시장기제의 활성화를 원한다. 그러나 ‘시장 길들이기’를 요체로 하는 복지국가는 ‘성공의 위기’에 봉착했다. 자본과 노동이동의 걸림돌을 제거해주기를 요구하는 세계화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복지국가의 운영원리였던 케인스주의가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자리를 내주어야 할 판이 됐기 때문이다. 시장 길들이기로 출발했던 20세기가 시장의 반격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20세기는 미국의 포드자동차사가 개발한 대량생산방식을 전세계로 전파시키면서 독점자본주의의 끝없는 성장을 촉진했다. 독점자본주의의 성숙이 금융자본주의를 낳을 것이라는 전망은 미리부터 제시됐지만, 정보화기술과 결합하여 마치 원폭과 같은 엄청난 파워를 갖게 될 것이라고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더욱이, 국가간 경계를 넘어 한없이 확장되는 시장메커니즘을 통하여 국가의 통제력을 무력화시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금융자본은 상상력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전 세계를 하나의 통합된 투기영역으로 만들었다. 20세기는 상이한 자원과 기술을 결합한 상품을 제조하는 행위로 자본을 증식하였다면, 21세기에는 정보혁명을 앞세운 머니 게임(Money game)이 자본축적의 핵심적 수단으로 정착될 것이다. 20세기는 네 개의 균열구조로 몸살을 앓으며 출발했다. 이데올로기, 계급, 종교, 중앙-지방의 균열이 그것이다. 20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인류사회의 삶과 생존의 방식을 결정하던 이 네 개의 균열구조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해결되거나 소멸됐다.
인간적 모순으로 가득한 세기? 이념적 대립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투항으로, 계급적 대립은 물질적 풍요와 복지국가의 실현으로, 종교적 갈등은 공존으로, 민족국가 내부의 중앙-지방 대립은 민주적 정치체제의 수립으로 각각 해소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전세계 180여개 국가 중 상위소득 70여개국에 해당하는 지적이지만, 이들이 세계사의 대세를 좌우한다고 가정하면 적어도 그런 언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를 느긋하게 즐길 여유도 없이 20세기의 역사는 새로운 균열요인이 급속하게 출현하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새로운 요인들 중에는 미증유의 경제성장으로 한 세기 동안 억제돼 있다가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문제들도 끼여 있다. 우선, 인종과 민족의 문제. 계급적 대립이 희석되자마자 인종과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요구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20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치열하고 잔인한 국지전이 자주 발생한 것은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종적-민족적 요구와 직결된다. 그러나 국가간 경계를 약화시키고 전세계를 하나의 경제 생활권으로 묶어내는 세계화의 조류 속에서 혈연과 문화적 동질성에 기초한 배타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본능적 열망이 인류사회의 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는지 아직 미지수로 남아있다. 둘째, 인권에 대한 개념과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19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은 소수인종에게 사회적 권리를 부여할 것을 요구했던 데에 그쳤던 반면, 최근의 인권운동은 전세계 인종의 평등화를 포함하여 여성차별 및 모든 형태의 차별을 거부하는 폭넓은 인식을 갖고 있다. 세계화가 ‘20대 80의 사회’라는 지극히 불평등한 결과를 국가 내부와 국가간 관계에 강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인권운동은 세계화 자체와 대립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마지막으로, 세계적 차원의 이해분쟁을 다스릴 초국가적 권력, 즉 세계국가(world state)의 부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NGO가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해결사 역할을 자임하고 있으나, 세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따를 초국가적-도덕적 권력체의 출현은 여전히 불가능해 보인다. 이렇게 보면, 용의주도한 기획과 국가개입을 통하여 사회를 조직해 나갔던 20세기는 오히려 인간적이었다. 과학기술과 시장이 지배하는 21세기는 사회계획에 의하여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20세기는 인간적 모순으로 가득 찼던 정겨운 시대였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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