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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으로 시작해 총성으로 끝맺다
1차 세계대전은 레닌을 낳았고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잉태했다. 20세기를 가장 괄목할 만하게 장식한 것은 사회주의체제의 성립과 그 붕괴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20세기는 볼셰비키혁명으로 돛을 올렸고 공산권의 몰락으로 닻을 내린 셈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에 대한 성찰 없이 20세기를 조망한다는 것은 덴마크 왕자 없이 햄릿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근대적 사회주의는 근대정신의 발로다. 동시에 이 근대정신이 이룩한 것에 대한 가장 격렬한 지적-정서적 거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는 결국 몰락하였다. 공산권의 붕괴는 국제정치질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그 상징적인 변화를 우리는 전쟁문제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이 공존하던 시기에 일어났던 70년대 월남전쟁 당시 미국은 온갖 정치적-군사적-경제적 특혜까지 베풀면서 참전과 파병을 ‘구걸’했다. 반면 공산권 몰락 이후에 터진 걸프전쟁 때에는 미국이 호령하는 자세로 참전비용을 부담까지 시키면서 우방들을 전쟁으로 몰아쳤다. 뿐만 아니라 공산권이 존속하는 동안에는 주목할 만한 민족적 분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공산권 몰락 이후 자본주의권은 민족통합의 열기로, 구 공산권은 민족분리의 열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독일의 통일은 전자의 상징적 사례고, 유고사태는 후자의 대표적 경우다.
공산권 붕괴 뒤 민족분리 열병 어쨌든 프랑스대혁명에서 비롯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바로 대중의 시대, 혁명의 시대였다. 이데올로기에는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수많은 살상과 도륙과 파괴가 자행됐다. 러시아혁명은 그 극점에 위치한다. 상품관계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불평등 체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사회적-경제적 대반란은 결국 러시아혁명으로 귀결됐다. 자본주의적 발전은 분배, 복지, 삶의 질 등 평등과 관련된 제반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진지하게 모색하지 않고서는 스스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러시아혁명은 그에 대한 결정적인 일격이었고 복지국가체제는 그 신속한 대응이었다. 한때 에드워드 쉴스나 다니엘 벨 등에 의해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구가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냉전에 편승한 이러한 상상력은 결과적으로 그것이 표방했던 ‘갈등에서 해방된 무(無) 이데올로기적’ 정치세계의 환상을 여지없이 파괴하고 말았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종언을 고한 셈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새삼스럽게 “이데올로기 일반을 탄핵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E. H. 카의 경구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요컨대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정치학자 사르토리(Sartori)의 명쾌한 언명은 지극히 인상적이다. 그는 이렇게 설파하고 있다. “풍요한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의 격렬함이 줄어들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강도의 약화를 이데올로기 자체의 소멸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른바 ‘세기말 현상’이란 것이 있다. 19세기 말엽 자본주의의 급격한 팽창과 더불어 사회적 모순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음에도 그것을 타개할 활로가 보이지 않던 시대, 암담한 체념과 우울한 회의가 문학과 예술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상체계에까지도 밀어닥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허무주의와 염세주의가 기세를 부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힘과 초월의 논리가 유포되기도 하였다. 한 세기가 지나고 또다시 세기말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유사한 회의와 체념과 혼란의 비극적 색조들이 뒤섞여 물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18세기 말을 혁명의 분출로 인한 혼란의 세기, 19세기 말을 혁명의 부재로 말미암은 회의와 번민의 시대라 한다면, 20세기말은 혁명의 부정(否定)으로 인한 체념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까. 하여튼 이 체념적 혼란은 소련 및 동유럽 격변이 몰고 온 역사적 후유증 탓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는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 이 세 개의 주요 패러다임의 각축 속에서 막을 올렸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세기말에 와서는 자유주의의 ‘반명제’(Antithese)인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해 판정패를 선언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는 많은 면에서 ‘종합’(Synthesize)의 속성을 보이고 있다. 현실정치적 차원에서 볼 때 앞으로의 세계는 당분간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상호간의 화합과 충돌로 점철되리라 예측된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혁명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촉망받는 대안으로서의 지위를 오랫동안 상실할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것은 혁명적 목표의 유실이 아니라 혁명적 방법론의 퇴각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국가들 내부개혁에 박차 그러나 이제 세계는 점차 ‘신제국주의’(Neo-Imperialism)를 향해 치달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 지금까지 자본주의권은 반공이라는 대외적 공동목표에 매달려 국가 내부의 반민주, 부자유, 불평등 등을 외면하거나 등한히 할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만큼 반공은 절대적이었다. 미국은 반공의 기치를 높이 내걸기만 하면 이승만이나 박정희, 이란의 팔레비, 필리핀의 마르코스, 니카라과의 소모사, 아르헨티나의 피노체트 같은 독재자들에 대해서도 헌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권은 자신을 완강히 결속시켜 주던 공산권이라는 외부 공동의 적을 상실하게 됐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국가들 내부에서는 그동안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라는 명분에 의해 등한히 하거나 무시해오던 사회 내부의 적, 요컨대 비민주적 정치질서, 억압된 자유, 국민복지의 외면 등에 새롭게 눈을 돌리는 계기가 만들어지게 됐다. 예컨대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등장한 미국의 클린턴, 일본에서의 자민당 장기집권의 개혁적 종식, 이탈리아 한국 등지에서의 개혁정치 등이 이런 분위기 속에서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내부 정비작업은 사실상 점차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상호 결속력을 상실해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국가 상호간의 격화될 경쟁에 대비하기 위한 대내적 긴급조치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그것은 무한경쟁을 역설하는 ‘세계화’ 정책으로 귀결된 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화’ 논리란 실질적으로는 국제주의로 위장한 민족주의적 재무장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격렬한 경쟁과 충돌로 점철될 ‘신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전망되기도 한다. 이처럼 20세기는 극성을 부리는 제국주의적 혈투극이 초래한 1차대전으로 막을 올렸다가, 또 하나의 새로운 제국주의적 육박전을 서서히 예비하며 종언을 고하고 있는지 모른다.
<박호성/ 서강대 교수 ·정치학> |
20세기의 역사는 발칸에서 시작하여 발칸으로 막을 내리는 듯하다. 즉 시작은 사라예보에서, 끝은
코소보에서. 요컨대 전쟁에서 시작하여 전쟁으로 끝맺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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