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21·독살로 고기잡는 김의배씨
“바닷가에 돌담 쌓아 고기잡는 거 봤시유?”


  독 살(石防簾)을 처음 본 것은 5년 전쯤 북제 주군 구좌읍의 어느 바닷가에서였다. 제주 바다의 이국적인 풍정을 감상하며 잘 닦인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물 속에 반쯤 잠긴 채 둥그렇게 둘러진 돌담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많이 갇혔을라나?
독살에 든 고기를 뜰체로
떠서 소쿠리에 퍼담는 모습.

그 때까지만 해도 독살이라는 어로시설은 보지 도 듣지도 못했던 터라, 그 돌담이 무엇인지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때마침 물질을 하다 갯바위에서 쉬고 있던 해녀에게 물어보고서 야 그게 제주도 방언으로 ‘ 원’이라 불리는 독살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 독살 은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이미 오래 전에 본 래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었다. 그나마도 그 뒤로는 볼 수가 없었고, 해가 갈수록 제주 독살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다.

그러다가 최근 충남 태안군 남면 몽산리 소 목골의 외진 바닷가에서 다시 독살을 발견했 다. 태안반도와 안면도는 해마다 적어도 너 댓번씩은 찾았던 터라, 맨 북쪽의 만대 포구 에서 남쪽 끄트머리의 영목 포구에 이르기까 지, 한번쯤 발길 닿지 않은 데가 별로 없었 다.

그런데도 몽산포해수욕장에서 불과 2km 쯤 떨어진 곳에 독살이 남아 있음을 알지 못 했으니,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웠던 셈이 다. 더욱이 이곳의 독살은 원형만 덩그러니 남은 게 아니라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본래의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이 독살의 주인은 소 목골에 사는 김의배씨(74)인데, 5대째 물려받 았다는 그이의 말로 미뤄 볼 때 적어도 120 여년 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몽산포구의 해변

독살은 거의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지만, 처 음 쌓을 때에는 워낙 많은 돈과 인력을 필요 로 한다. 그러니 독살을 쌓는 일은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고선 엄두도 못냈다. 김씨네 독 살을 처음 만든 고조부도 인근 지역에서는 내로라 하는 부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 리 돈이 많아도 권세가 없으면 독살을 설치 해봤자 별로 이익을 얻지 못했다. 옛날에는 독살과 대살(竹防簾) 등 모든 어살에 대한 수탈이 몹시 심했기 때문이다.

어살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이 편찬한 ‘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문헌에 는 중국 수나라 양제의 제2차 고구려원정 (613년)에 관한 기록 중에 어살과 같은 뜻의 ‘ 어량’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어살은 매우 단순하고도 원시적인 함정(陷穽) 어구 이기 때문에 이미 선사 시대부터 고기잡이에 활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어선 어업이 소규모 로 이뤄지기도 했으나 주종을 이루는 것은 어살(당시에는 어량) 어업이었다. ‘ 고려사’에 따르면, 1016년에 현종은 그 해에 태어난 왕 자에게 금은기(金銀器) 비단 토지 노비 염전 등과 함께 어살을 하사했다고 한다. 또한 어 살 어업을 전문으로 하는 어량소(漁梁所)와 함께 그물을 짜는 망소(網所), 미역을 채취하 는 곽소(藿所) 등의 천민촌이 바닷가 곳곳에 들어섰다.

그러나 경제적 가치가 매우 커짐에 따라 어 살은 수탈의 대상이 됐다. 특히 사회적 혼란 이 극심했던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토지와 마 찬가지로 대부분의 어살도 아예 권문세가들 의 사유재산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어살에 대한 권력자들의 사점(私占)은 조선 말기까 지도 계속됐다. 옛 문헌의 어살에 관한 기록 도 대부분 사점의 폐단과 수탈을 지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어살의 경제적 가 치가 매우 컸음을 말해주는 것.

조선 시대에는 지배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수산물의 수요 도 크게 늘었다. 그러나 다른 어로 수단은 그다지 발전하지 못한 탓에 어살의 역할과 규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15세기에 펴낸 ‘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황해도에 127개, 충청도에 136개, 전라도에 50개, 경기 도에 34개, 경상도에 7개, 함경도에 2개의 어 살이 설치돼 있었다. 특히 황해도 강령만과 해주만, 충청도의 천수만, 경기도의 경기만과 남양만 등 서해안 일대에서 발달했다.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어살을 설치 하기가 수월한데다 물고기의 산란장 역할을 하는 개펄이 넓게 형성돼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최대의 시장인 한양이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무려 1000년이 넘도록 가장 중요한 어로 수 단이던 어살이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기. 대형 어선에 의한 그물 어업이 발달하 고, 외국의 각종 어로 장비와 어법(漁法)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때까지만 해도 서해안을 중심으로 여전히 많은 어살이 설치돼 있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2년에는 1772개, 1942년에는 1059개의 어 살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된 뒤부터 급격히 줄어들었고, 지금은 남해안에 몇 개 의 죽방렴만 남게 되었다.

우럭 갈무리
김씨가 햇볕에 말린
우럭을 갈무리하고 있다.

지난 70년대까지만 해도 태안군의 소원면과 근흥면, 그리고 남면 일대에는 수많은 독살 이 남아 있었다. 특히 소원면의 모항리와 의 항리 일대에는 크고 작은 해변마다 어김없이 독살이 설치돼 있었을 뿐더러 지금껏 형태가 온전한 것도 여럿 된다. 하지만 더 이상 고 기도 들지 않을 뿐더러 날마다 독살을 살펴 보는 주민도 없다. 김의배씨의 독살이 있는 소목골 해변에도 두개의 독살이 더 있었으나 이미 20여년 전부터 방치됐다고 한다.

김씨네 독살은 길이가 약 150m에 최고 높이 가 1.5m 가량 되는데, 지름이 30∼70cm쯤 되도록 돌멩이를 쌓아서 ‘ ㄱ’자 형태의 돌담 을 둘러 놓았다. 그리고 독살에 든 물이 빠 져나가는 길목에는 어린아이 몸통만한 구멍 을 내고, 그 앞에는 고기들이 빠져나가지 못 하도록 대발(竹簾)을 쳐놓았다.

밀물을 따라 독살 안에 들어왔던 물고기들이 썰물 때에 이 구멍 앞에 모여들면 손쉽게 뜰채로 떠서 대바구니에 담기만 하면 된다. 대체로 날씨 가 흐리고 바람이 불며 흙탕물이 밀려드는 날에 고기가 많이 든다. 그리고 옛날에는 조 기가 가장 많이 잡혔지만, 요즘에는 우럭 놀 래미 전어 숭어 고등어 멸치 낙지 주꾸미 새 우 등이 뒤섞여 조금씩 들어온다고 한다.

“아마 내가 스물 몇 살쯤 됐을 때였지. 하루 는 혼자서 다 퍼내지도 못할 만큼 멸치가 많 이 들었던 거라.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죄 불러다가 재주껏 퍼담아 가라고 했지. 그 뒤 에도 몇 섬(石)씩 들었던 적은 있었지만 근 래에는 별로 안 잡혀. 고기들도 씨가 말랐고 저 앞에 쳐 놓은 그물 때문에 당최 여기까지 들어오질 못해”

김씨가 가리키는 앞바다에는 여러 개의 정치 망(定置網·자리그물)이 겹겹이 드리워져 있 었다. 게다가 지난 여름에 불어닥친 태풍 때 문에 근처 산자락의 흙더미가 독살 안으로 쓸려들어온 뒤로는 어획량이 더 줄었다고 한 다.

김씨의 말로는 “독살 안쪽의 물이 깊어 야 썰물이 지기 시작해도 고기들이 빠져나가 지 않고 독살 안에서 안심하며 논다”는 것이 다. 원래 독살은 해마다 한두번은 품을 사서 허물어진 돌을 다시 쌓아올리거나 독살 바닥 에 쌓인 개펄을 퍼내야 한다. 그 작업에는 주로 마을 사람들이 동원됐는데, 품삯을 주 지 않는 대신 독살에 든 고기를 나눠 먹었 다.

평소에 독살 주인으로부터 찬거리를 얻 곤 하던 이웃들이라, 독살을 정비하는 일에 는 기꺼이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일손이 귀한 요즘에는 중장비를 빌릴 수밖에 없는데, 고 기도 별로 들지 않는 독살에 큰돈을 들이기 가 썩 내키지 않는 듯했다.

독살에 고기가 가득 들었던 시절에도 김씨는 크게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돈이야) 주면 고맙지만 거저 가져가 도 그만”이었다. 지금도 대바구니의 바닥만 간신히 덮을 정도로 고기가 잡힌 날에도 누 가 몇 마리 달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선뜻 꺼내주곤 한다.

독살의 주인은 날마다 달라지는 조수간만의 차이를 정확히 헤아려서 독살을 보러 가야 한다. 물때를 잘못 짚거나 농사일에 쫓겨서 조금 늦게 가면 이미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김씨도 낮물때 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독살 보는 일을 거르 지 않는다. 고기가 많이 들지는 않지만 “돈 들이지 않고도 비린 것 먹을 수 있고, 그 일 마저 그만두면 몸이 아프기 때문”이다.

더구나 독살을 보는 일은 언제부턴가 김씨에 게 가장 큰 즐거움이 됐다. 오늘은 얼마나 들었을지 생각하면 독살로 향하는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진다. 설령 텅빈 대바구니만 달 랑 메고 집으로 돌아오더라도 마음과 발길은 가뿐하다. “다음에는 더 많이 들겄지” 하는 생각 때문이란다.

양영훈〈여행칼럼니스트〉


§ 참조하세요

어살
물 속에 대나무나 통나무, 돌 따위로 보를 쌓아서 고기를 잡던 함정어구의 일종이다. 그런데 시대와 문헌에 따라 여러 이칭(異稱) 이 나타나기 때문에 자칫 혼동하기 쉽다. 고 려 때의 사료와 조선 초기의 왕족실록 등에 서는 주로 어량(漁梁)이라 표기했으나 조선 성종 이후에는 어전(漁箭)이라는 말이 많이 쓰였다.

그 무렵부터 어민들은 어량을 어살 이라 불렀는데, 어살을 한문식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어전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의 ‘ 경 세유표’에서는 같은 뜻으로 어홍이라는 말도 쓰였다. 요컨대 어전의 원명은 어량이며, 조 선 중기 이후의 문헌에서는 주로 어전이라 표기했으나,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가장 널 리 쓰인 말은 어살이었다.

조수간만의 차이
조수간만의 차이를 ‘ 무수기’라고도 하며, 음 력 한달 동안 무수기가 같은 두 날을 무날이 라고 한다. 무수기가 커지기 시작하는 음력 9일과 24일을 기준으로 해서 무날이 시작된 다. 즉 무쉬(9일·24일) 한무날(10일·25일) …여섯무날(16일·30일)로 나가는데,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큰 여섯무날은 한사리라 고도 한다. 그리고 일곱무날(1일·16일)부터 는 밀물과 썰물이 차이가 감소하기 시작한 다. 다시 여덟무날(2일·17일)…열무날(4일· 19) 한것기(5일·20일) 대것기(6일·21일) 아 츠조금(7일·22일)으로 이어지다가 한조금(8 일·23일)에 이르러서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가장 작아진다. 또한 한조금이 가까울수록 달의 인력이 작아지므로 바닷물이 들고 나는 속도가 느려지고, 반대로 한사리에 가까워지 면 빨라진다. 덧붙이자면, 물이 들고 나는 시 간은 전날보다 한시간 가량 늦어진다.

서산→태안→안면도
환상의 나들이 코스

신이 빚은 안면도 해거름
안면도의 방포해수욕장
에서 바라본 일몰.

서산과 태안을 거쳐 안면도를 돌아본 뒤 예 산을 경유해 돌아오는 코스는 필자가 가장 자신있게 추천하는 코스 중 하나다.

먼저 당진을 거쳐 서산 땅에 들어서 ‘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운산면 용현리의 서산 마애 삼존불(국보제84호), 운산면 신창리 상왕산 기슭의 개심사(開心寺), 해미면 해미읍성을 둘러본 뒤에 태안읍을 지나 안면도로 건너간 다. 안면도에서는 울울창창한 조선 소나무숲 과 삼봉-방포해수욕장에서의 황홀한 일몰을 빼놓을 수 없다.

해 지고 저녁노을도 스러지 면 백사장 포구를 찾아 자연산 대하구이나 감칠맛 나는 생선회에 소주 한잔을 마시며 여독을 씻어낸다. 1박2일의 일정이라면 여기 에다 숙소를 잡는 게 좋다. 숙박업소로는 백 사장모텔(0455-672-1400)과 진주모텔0455-67 2-1601)이 있다.

이튿날에는 동이 트기 한시간 전쯤 잠자리에 서 일어나 우리나라 최대의 겨울 철새 도래 지인 서산간척지의 A지구방조제(간월호)로 달려간다. 이곳에서는 해가 뜨고 질 무렵마 다 수만 마리의 가창오리떼가 장엄한 군무 (群舞)를 펼치곤 한다.

또한 간월도 주변의 개펄에서는 11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에 새 조개가 많이 잡히는데, 오뚜기횟집(0455-62- 2708)을 비롯한 여러 음식점마다 새조개 데 침회와 구이를 내놓는다.

귀로에 시간 여유 가 있다면 수덕사와 덕산온천에 들를 수도 있겠다. 수덕사를 찾아간 김에는 절 입구의 수덕여관(0458-37-6022)에 들러서 고암 이응 로화백의 암각화도 감상하고, 값싸고 맛깔스 런 산채한정식(1인분 8000원)도 맛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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