릇 세상에는 끊임없이 변할때
더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변하지 않아서 더 좋은 것도 많다. 선인들의 자취가 서린 문화유적은 오랜 풍상에도 변치 않았을 적에 더
큰 감동을 준다. 더욱이 그 유적을 둘러싼 자연조차도 옛 모습 그대로라면 감동은 더욱 커진다. 경주 안강의 자옥산 골짜기에 들어앉은
옥산서원(玉山書院)과 독락당(獨樂堂)이 바로 그런 곳이다. 과 관련된 이 유적지와 주변의 산수는 400년이
넘는 세월을 겪었으면서도 원래 모습이 오롯하게 살아 있다.
|
|
독락당(보물 제413호)의 별당인 계정
|
옥산서원 주변의 자연은 경개 좋은 지옥산 골짜기에서도 가장 풍광명미(風光明媚)하다. 서원 앞을 흘러가는 자계천(紫溪川)에는 너럭바위들이 층을 이루며 시원스레
깔렸고, 쉼없이 흐르는 계류는 바위마다 아담한 소(沼)와 폭포를 빚어놓았다. 물가 양편에는 참나무 벚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소나무 등의 노거수들이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그늘 짙은 너럭바위 위에 드러누워 한나절쯤 쉬노라면 갖은 시름이 절로 씻겨질 법하다.이곳에 옥산서원이 들어선 것은 회재가 죽은 지 20년 뒤였다. 회재의 죽음을 애도하던 영남 사림이 그의 학덕을 기려 묘우(廟宇)를 세운 것.
그리고 2년 뒤인 1574년에는 선조가 「옥산서원」이라는 현액(懸額)을 하사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됐다. 그 뒤로 크고 작은 화재로 소실된 몇몇 건물이 중건되기도
했지만, 전화(戰禍)를 입지 않아 오늘날에도 옛 모습 그대로다.
|
옥산서원(사적 제154호)의 무변루에서 바라본 구인당
|
이 서원은 출입구 강당 사당 등이 일직선상에 놓인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먼저 강당 영역에 이른다. 무변루(無邊樓)라는 2층
누각과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이 마주하고, 두 건물 사이의 중정(中廷)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그리고 강당 뒤편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사당 영역.
건물의 배치나 면적이 안동의 병산서원과 엇비슷해 보이는데도 병산서원 같은 상쾌함이나 호방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건물마다 기단(基壇)이 낮은 탓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강당에서
마주보이는 무변루의 폐쇄성 때문이다. 즉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 바깥 풍경을 한껏 끌어안는 반면, 무변루는 마루 양쪽에 방이 있는데다 개울 쪽의 벽체를 막아버려
시야가 차단되어 있더. 게다가 구인당 양쪽의 온돌방도 전면을 벽체로 마감함으로써 더욱 갑갑해 보인다. 밖에는 눈길도 주지 말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할 것을 강요하는 구조다.
그럼에도 옥산서원은 조선의 선비같은 규범과 권위를 갖추고 있어 원행(遠行)의 수고로움을 보상받을 수 있는 유적지다. 더욱이 청분각(淸芬閣)에 보관된 회재의 친필 저술(보물 제 586호)을
비롯한 「정덕계유사마방목」 (正德癸酉司馬榜目·보물 제524호) 「삼국사기」(보물 제 525호) 「해동명적」 (海東名蹟·보물 제526호)등의 귀중한 전적(典籍)들이 이 서원의 문화재적
가치를 더욱 빛내주고 있다.
옥산서원을 둘러본 뒤에 자계천을 따라 500m 쯤 더 올라가면 독락당(보물 제 413호)이다. 이곳에는 사랑채인 독락당과 ㅁ자형의 안채, 노비들이 거처하던 행랑채와 공수간(供需間·음식을
장만하는 공간), 임금의 하사품 서책을 보관하던 어서각(御書閣)과 사당, 그리고 별당인 계정(溪亭) 등이 합쳐 큰 살림집을 이루고 있다. 회재가 낙향한 이듬해인 1532년에 지어진 독락당은
여느 사대부 집의 사랑채와 달리 집의 규몽 비해 기단과 마루, 건물의 높이와 지붕이 매우 낮은 편이다. 또한 널찍한 대청의 오른쪽 벽면에는 여닫이문을 달고, 그 문밖의담에는 네모난 살창을
만들어 대청에서도 계곡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
독락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 일부에 만들어 놓은 살창
|
독락당의 오른쪽으로 돌아서 작은 일각문을 지나면 계정. 계곡 쪽으로 개방되어 있는 계정의 마루에 올라앉으면 계곡의 빼어난 풍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 정자는 개울 건너편에서
바라다볼 때 그 진면목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의 하나인 관어대(觀魚臺)라는 암반 위에 올라앉아 있는데, 작고 아담한 정자인데도 마치 2층 누마루처럼 당당하고도 의젓하다. 특히
인공을 초월해 주변의 바위 나무 물과 아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는 점에서 한국 전통 정자의 전범으로 꼽힐 만하다.
독락당과 이웃하던 정혜사는 신라때에 창건된 유서깊은 사찰이었다. 그러나 1834년의 큰 화재로 폐찰이 되어 과수원과 논밭으로 바뀐 절터를 통일신라 때의 석탑 하나만이 지키고 있다. 높이 5.9m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국보 제40호)은 불국사 다보탑,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함께 우리나라 이형(異形) 석탑의 걸작이다.
1층의 탑신(塔身·몸돌)과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은 여느 석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2층부터는 일반적인 체감(遞減)의 비례를 무시하고 옥개석과 탑신이 급격히 줄어든 탓에 마치 지붕돌만 포개놓은 것 같다.
이처럼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특하면서도 정제된 조형미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급격히 줄어드는 2층 이상의 탑신을 보면 하늘로 솟는 듯한 상승감이 느껴진다. 이처럼 실험성과 조형성을
동시에 갖춘 석탑 하나가 폐찰의 허수함을 씻어줄 뿐만 아니라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도 뿌듯하게 한다.
|
§ 참조하세요
회재 이언적
1492(성종 22년) ∼ 1553(명종 8년). 본관은 여주, 자는 복고(復古). 외가인 경주 양동의 월성 손씨 종가에서 태어났다. 24세때 문과에 급제했고, 이조정랑 밀양부사 등을 거쳐 40세 때에는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다 관직에서 밀려난 뒤 독락당에 7년간 은거하며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김안로가 제거되자 다시 등용되어 좌찬성까지 올랐으나 1545년 을사사화로 또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다가 1547년에는 양재역벽서사건으로 평안도 강계로 유배됐고, 유배생활 6년만에 6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사산오대
옥산서원과 독락당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네개의 봉우리와 자계천에 흩어져 있는 다섯군데의 반석과 기암을 말한다. 독락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에는 각기 화개산(華蓋産) 자옥산(紫玉山) 무학산
(舞鶴山) 도덕산(道德山)이 솟아있고, 사시사철 맑은 계류가 흐르는 자계천에는 관어대(觀魚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라 명명된 너럭바위들이 깔려있다. 독락당에 은거하던 회재가 이름붙였다고 하는데,
이는 자신의 심리적인 주거공간을 자연으로 확장함과 동시에 자연과 일체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듯하다.
|
문 잠긴 옥산서원 미리 연락하고 가세요
|
|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찾아가는 답사길은 대개 강동면의 양동마을로 이어진다. 회재 이언적의 고향인 양동마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 (班村) 으로도 손꼽히는데, 너른 안강평야를 바라보는
산자락과 물(勿)자 형의 네 골짜기마다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네 고택들이 빼곡하게 들어앉았다. 대부분 15세기부터 19세기말 사이에 지어진 조선시대의 전통가옥이며 현재 100여채가 남아있다.
이곳을 제대로 다 돌아보려면 적어도 꼬박 하루쯤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옥산서원에서 양동마을까지의 거리는 약 10km.
옥산서원과 독락당의 문은 늘 잠겨 있다. 미리 경주 사적공원관리소 (0561 -43 -0775) 나 담당 공무원인 이현목씨 (018 -529 -7786) 에게 연락하면 시간에 맞춰 문을 열어준다.
옥산서원 부근에는 옥산관광농원 (0561 -762 -6606) 고향식당 (0561 -761 -4707) 등 민박을 겸한 음식점이 몇군데 있지만 장급여관과 호텔 같은 숙박시설을 이용하려면 안강이나 경주 시내로 나가는게
좋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