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도처럼 역사적으로 큰 사건을 많이 겪은 고장도 흔치 않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한 가운데 위치한데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개경과 한양의 길목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강화도에는 수천년에 걸쳐 크고 작은 역사가 아로새겨진
유적들이 발길 닿는 곳마다 흩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전등사(傳燈寺)는 강화도에서 가장 크고 유서 깊은 사찰일 뿐만 아니라
이 섬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오래된 사찰 중 하나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아도화 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에 앞서
지금의 절터에 진종사(眞宗寺)라는 절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 뒤로 고려 때에는 왕실의 가 (假)궁궐이 이곳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왕 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사고(史 庫)가
설치됐다. 1719년부터 1910년까지는 전 등사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의 직 위를 내려 전시(戰時)에 대비하도록 했다.
이는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정족산성을 항 쟁의 보루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여느 절 과는 달리, 지금도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려면
성문을 통과해야 한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전 약사전 대조루 명부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그 중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진 대웅전(보물 제178
호)은 안정감과 우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자연석 기단과 초석 위에 건물이 올라앉아 있는데, 모서리의 기 둥을
다른 기둥보다 약간 높게 추켜세움으로 써 처마끝이 날아갈 듯
날렵하면서도 우아하다.
또한 공포(拱包·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 려고 맞추어 댄 나무쪽)
위에는 동물조각 귀 면(鬼面) 연꽃봉오리를, 그리고 처마의 네귀
퉁이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처 마를 힘겹게 떠받치는
형상을 조각해 놓았 다. 해학적이면서도 애처로운 모습의 이 나
녀상(裸女像)에는 전설이 서려 있다.
광해군 6년 12월, 전등사의 모든 건물이 대 화재로 소실되는 바람에
절을 새로 짓게 됐 다. 이때 대웅전 공사를 맡은 도편수가 아랫 마을의
주모와 정분이 났다. 그런데 공사가 끝나갈 무렵 주모는 도편수가 그간
알뜰하게 벌어 맡긴 돈을 챙겨서 도망갔다.
분통이 터 진 도편수는 궁리 끝에 그 주모의 모습을 한 네개의
나체상을 만들어 법당의 네 귀퉁이에 서 처마를 떠받치게 했다. 늘
부처의 설법을 들으며 개과천선하라는 의미에서였다.
|
|
전등사 약사전(보물 제 179호)
|
|
|
전등사 동종(보물 제 393호)
|
대웅전 옆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아담한 약사전(보물
제179호)이 자리잡고 있 다. 건물의 외관이나 형식이 대웅전과 흡사 한
점으로 보아 대웅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진 듯하다. 이 건물의
내부에는 다소곳 이 내려뜬 눈에 귀가 유난히 큰 약사여래좌 상이
모셔져 있다. 중생들의 고통과 질병의 근원을 치료해주는 부처인지라,
예불을 드리 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흔히 「전등사 범종」(보물 제393호)이라 불리 는 중국 종도 눈여겨볼
만하다. 높이 1m64에 아래부분의 직경이 1m쯤 되며, 송나라 때인
1097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명문(銘文)이 몸체에 새겨져 있다.
이 종은 해방 직후 전 등사의 주지스님이 인천항에서 우연히 찾아 내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애초부터 이 절에 있었던 동종은 일제 때에
강제로 공출당했는 데, 해방이 되자 주지스님은 일제 때에 빼앗 긴
동종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며 칠 동안 인천항을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 때 누군가가 부평의 군기창에 커다란 동종이 하나 있는 것을 봤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가서 살펴보니 종은 전등사의 것 이
아니었지만 마침 주인도 없기에 전등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아무려나, 이 중국 종은 우리 범종과는 달리 음통이 없고 형태도 특이
하지만 진체적으로 장중한 멋과 소박한 솜씨 가 엿보인다. 또한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 종 가운데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등사에서 서쪽으로 5km쯤 떨어진 마리산 동남쪽 기슭에는
정수사(淨水寺)라는 고즈넉 한 고찰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8
년(639) 회정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건물도 몇채 없는
자그마한 절이다.
하지만 주변 산세와의 조화가 빼어난데다 한 눈에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자리해 전망 이 매우 좋다. 더구나 전등사와 달리
찾아오 는 이들도 적어 산사의 적요함이 온전하게 살아있는 곳이다.
정수사에 있는 세채의 건물 가운데 가장 눈 길을 끄는 것은
대웅보전(보물 제161호)이다. 이 건물은 세종 5년(1423)에 정면 3칸에
측 면 3칸의 규모로 중창됐다가 뒤에 한칸 규모 의 툇마루가 증축되어
측면이 모두 네칸에 이른다.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몸체에 비해 큰
편이라 매우 육중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전면의 가운데 문에는, 색깔과 모양이 각기 다른 네개의
꽃병에서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듯한 모란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각돼 있다. 가운데 칸의 문에만 꽃문살을 장식하 고 양쪽 두칸의
문에는 격자형의 소박한 창 호문을 달아 지나치게 소박하거나
요란하지 않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이곳의 꽃문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문 살로도 손꼽힌다.
|
|
정수사 대웅보전(보물 제 161호)의 꽃살문
|
전등사와 정수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안가 에는 병인-신미양요와
운요호사건 당시 제국 주의 열강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초지진
덕진진 용두돈대 광성보 등의 국방 유적지들 이 있다.
특히 초지진의 성벽과 늙은 소나무 에는 당시의 포탄 자국이 여태까지
남아있어 그때의 치열했던 전황을 짐작케 한다. 이밖에 몽고군 침략
당시 39년 동안이나 임 시 수도였던 강화읍내의 강화성, 고려궁터 같은
고려 유적과 「강화도령」 철종의 생가인 용흥궁, 「절간 같은
교회」라는 성공회_강화 성당 등도 독특한 유적들.
또한 하점면 부근 리의 고인돌(사적 제137호)도 강화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유물의 하나다. 이 고인돌은 덮개돌의 길이가 7m10, 너비가
5m50에, 무게가 자그마치 50t이나 될 정도로 엄청난 크 기인데,
우리나라 북방식 고인돌 중에서 가 장 규모도 크고 잘생겼다.
● 가볼 만한 곳
    강화읍의 중앙시장 안에 위치한 우리옥(032-934-2427)은 이른바 「가정식 백반」을
잘하는 집으로 유명하다.
무쇠솥에 장작불을 지펴 밥을 짓는데, 값도 저렴하고 덤으로 구 수한 숭늉과 누룽지도
맛볼 수 있다. 용흥궁 부근의 아리랑집(032-934-2566)은 두부고기 와 해장국을
잘하는 집이다.
두부와 돼지고 기, 야채를 섞어 익혀낸 두부고기는 술안주 로도 그만. 초지진 부근의
대선정 (032-937-1907)은 메밀손국수와 시래기비빔 밥, 그리고 싱싱한 생선회가
일품이다.
화도면의 선수포구와 내가면 외포리의 선착장 주 변에 밀집한 여러 횟집에 가면
강화도 특산 어종인 밴댕이회를 맛볼 수 있다. 밴댕이는 주로 늦은 봄철에 잡히는
생선인데, 담박하 고 고소하며 씹는 맛이 좋다.
강화 5일장은 대도시에 인접한 장터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골 장터보다 더 옛
장마당의 풍물과 정취가 살아 있다. 게다가 장터에 나오는 물산의 종류도 제법
다양하다. 끝수 가 2일, 7일인 날마다 강화읍 시외버스터미 널과 강화풍물시장
주변에 들어선다.
강화도에는 관광지로 가는 도로의 주변마다 숙박시설이 흔해서 잠잘 곳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다.
특히 강화읍내, 전등사와 보문사 입구, 덕진진 부근에는 숙박시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전등사 입구의 강화가족호텔 (032-937-5071)과 덕진진 부근의 덕진타운
(032-937-42250)이 권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