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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하자

Posted May. 16, 201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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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월호 얘기는 하지 맙시다. 이렇게 시작한 밥자리와 커피타임은 늘 세월호 얘기로 끝났다. 지난 한 달간 슬픔과 좌절, 절망과 분노의 언어를 나눴다. 마음속 감정은 물론, 머릿속 생각도 스스로 통제하기 힘든 시간이 흘러왔다.

밤늦게 퇴근해 곤히 자고 있는 초등학생 딸의 얼굴만 봐도 눈물이 자꾸 난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소주를 찾아 혼자 마시곤 했다.(40대 중반 회사원)

중간고사 기간 중학생 아들이 태평하게 TV를 보고 있더라. 예전 같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텐데 허허 하며 놔두게 되더라. 중고교생 학력이 크게 떨어진 이른바 세월호 세대가 생겨날 것 같다.(쓴웃음)(40대 후반 대기업 임원)

공무원, 정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한계선은 사라졌다. 물론 그들이 상당 부분 자초했다. 인터넷 댓글을 보며 심하다고 여겼던 표현들이 친구, 지인의 입에서도 터져 나왔다. 더 강하게 맞장구치지 못할 땐 입을 다물게 된다. 40대 여성 지인은 거짓으로 판명된 음모론을 여전히 믿으며 이 참사는 대학살이라고 했다.

전문직 50대 남성이 돌볼 부모도 가족도 없는 대통령이 국가에 헌신할 정치인이라고 생각해 지지해왔다. 그 믿음을 버리기엔 아직 이르다고 조용히 말했다. 386(1980년대 학번)들이 모인 그 자리에서는 메아리가 생기지 않았다. 절망스러운 리더십이다 호통만 있지, 대책이 없다 혹시 노무현(전 대통령)이면 다르지 않았을까에 묻혀 버렸다.

심지어 그러니까 군대를 다녀와야 해라고 말하는 경우도 봤다. 최근 대통령에 대해 여성 비하 욕설을 쏟아내는 북한 당국이 문득 떠올랐다. 술자리의 농담조 냉소와 북한의 저급한 비방이 겹쳐지는, 묘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대화의 끝은 허탈하다. 침몰하는 배를 뻔히 보면서 구조해내지 못하는 무능을 비난하면서도, 나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지 마라. 거리로 뛰쳐나가라는 주장이 최선인가. 마음잡기는 힘든데, 마음 둘 곳이 없다. 1997,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는 금()이라도 모았다. 이 심리적 정신적 IMF 상황에서는 뭘 모아야 하나.

내가 세월호 선장이라면 다르게 행동했을까. 못 그랬을 것 같다. 몇몇 지인들이 자책하듯 한 말이다. 우리 모두가 세월호 선장입니다라는 반성의 글들이 영향을 줬을까. 그 앞에서는 침묵했지만 내 가슴속 대꾸를 하려고 이 글을 쓴다.

그렇게 말하지 맙시다. 나는 절대 세월호 선장처럼 행동하지 않겠다고 말합시다. 그렇게 말을 해야 행동도 바뀝니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집니다. 끝까지 배를 지켜야 하는 본분을 잊고, 속옷 차림으로 허둥대며 살아남는 그 역겨운 장면이 결코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 돼선 안 된다. 아이들에게도 공부하라고 말하자. 선장의 임무, 리더의 본분을 망각한 이 처참한 비극을 봐라.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자. 공부하자. 그래야 세월호 선장이 되지 않는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 2010년 미국 연수 때 20대 초반의 앳된 여군에게 물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 늘 목숨을 걸 만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말씀하셨다. 목숨 걸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 감명을 받았지만 나는 여태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다.

엊그제야 처음으로 중학생 아들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얘기했다. 함께 말하며 같이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