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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8색 미국관

Posted June. 28, 200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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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친하게 지내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이으라(). 1880년 8월 동북아의 격동 속에서 조선이 생존을 고민하고 있을 때 주일 청나라 공사 하여장()이 부하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통해 권고한 내용이다. 당시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에 대외적인 균세()와 대내적인 자강()을 권고했던 6000자의 이 글은 고종의 마음을 쇄국에서 개화로 돌려놓았다. 조선은 2년 뒤인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규를 체결하고 국교를 수립한다.

하지만 연미는 잘되지 않았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1885년 중립론에서 미국은 통상 상대로 친할 뿐, 우리의 위급함을 구해 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협정으로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을 묵인했다. 한국 속 반미() 감정의 역사적 연원()을 굳이 따진다면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미국이 확실한 우방으로 돌아온 것은 광복 후였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도왔고, 625전쟁 때는 연인원 178만9000명을 파병해 전사 및 사망 3만6940명, 부상 9만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의 희생을 치렀다. 피로써 맺어진 한미동맹은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의 토대가 됐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한국은 훨씬 낙후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미국에 대해 반미 찬미() 숭미() 혐미() 연미 용미() 항미() 판미() 8가지 인식이 공존한다고 줄리아 스웨이그 미 외교협회(CFR) 이사가 프렌들리 파이어(오발)란 저서에서 지적했다. 전환기의 한미관계를 보는 한국인의 복잡한 시각을 비교적 잘 짚어 냈다. 자주를 외치다가 임기 중반이 넘어서야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겠다고 나선 이 정권 사람들은 어디에 속할까. 반미에서 용미로 전환한 것일까, 여전히 혐미, 항미인데 무늬만 용미일까.

한 기 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