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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새로운 문학적 신체의 발명 : 한강의 소설들
단평·빈곤한 역사와 소설-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 윤 경 희


장평·새로운 문학적 신체의 발명 : 한강의 소설들


1. 신체, 징후, 미학적 진료

한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방법 종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무엇일까. 가난, 실업, 우울증, 탈속. 그 중 무엇이라도 좋겠으나, 내 경험으로 볼 때 그 답은 질병이다. [......] 아름다움도 추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이, 나는 그저 병과 함께 살았다.
- 『그대의 차가운 손』

등단작인 「붉은 닻」에서부터 최근작인 『바람이 분다, 가라』에 이르기까지 한강의 작품들에는 근현대적 의학담론의 시각에서 결코 정상이라 간주되지 않는 신체적 징후와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그들이 앓는 병적 증상들의 일부는 작가의 집요한 관찰의 시선과 부단한 언어화의 시도에 힘입어서 현실세계에서 기술적으로 통용되는 병환의 분류기준에 맞추어 진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핍진성을 획득한다. 욕지기, 토악질, 위경련 등의 소화기능장애는 한강 작품 속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표출하는 대표적인 신체적 증상이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붉게 흉터 질 정도로 악력을 다하여 주먹을 쥔다거나 치아 전체가 흔들거릴 정도로 이를 악무는 등, 하나의 견고한 돌덩이인양 온몸의 의사-마비상태를 지향하는 긴장강박증 역시 빈번히 발생한다. 사소한 외부적 자극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경과민과, 표피의 상처와 울혈의 원인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통각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무감한 신경마비가 공존한다. 급성야맹증 같은 히스테리성 신경마비, 거식과 폭식, 특정음식물 섭취거부 등의 식이장애, 우울증, 결벽증, 환청, 발작에 더해, 폭음, 알코올 중독, 노출, 질주, 자해, 투신 등 극한의 신체적 경험을 향한 의지적 충동이 한강의 인물들을 강렬히 사로잡는다.

병적 증상들에 관하여 때로는 작가 스스로 기술적 어휘들을 동원하여 구체적이고도 치밀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한강의 작품들은 결코 단순히 모호한 마음의 상처나 명명할 수 없는 불분명한 아픔에 관한 일반적인 서사로 흐지부지 수렴되지 않는다. 작가가 구현한 병의 핍진성은 그러므로 독자의 입장에서도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병이라든가 글쓰기를 통한 치유 등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의미하는 바는 거의 없는 상투적이고 모순적인 어구들을 무책임한 해석으로서 제시하도록 허용하지도 않는다. 존재의 근원에 병이 있다면 그것은 글쓰기로든 그 어떤 행위로든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의식적 사유의 개념적 대상, 은유 등의 언어적 구성물이기 이전에, 또는 그것들을 넘어서, 병은 신체의 물질적 유기조직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사유와 언어의 토대로서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힘의 인자라는 데 그 우선적인 실재성이 있다. 대다수의 경우, 병은 통증을 수반하고, 통증은 힘의 감각에 기인한다. 병에 관한 서사를 창조하거나 해석할 때, 병을 신체와 정신에 작용하는 실재적 힘으로서 인식하기도 전에 섣불리 언어화하면서 은유로 덮으면, 실재적인 고통의 감각은 신체적인 표현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언어의 감옥에 갇힌다. 언어로 치유되지 않는 고통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강의 소설들에서 병적 징후들의 기술적인 국면에 치중하여 의학이나 교조적 정신분석 등 문학외적 담론의 틀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시도에서 큰 성과를 기대할 수도 없다. 병적 징후의 생생한 묘사는 신체와 언어의 새로운 관계를 향한 실험적 허구이지 학술적 사례연구의 대상이 아니다. 인물들은 통증을 자각하고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과 의사의 권위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지만(「여수의 사랑」에서, “난 아파요. 정말로 아프단 말입니다,” 「진달래 능선」에서 ‘이봐, 난 실제로 아프다구’), 징후는 병인에 대한 기존의 지식체계의 망을 빠져나가거나(「내 여자의 열매」에서 “지금 보이는 게 위장인데...... 아무 이상 없어요”), 어떤 의학기술이나 약물요법으로도 완치되지 않고 재발한다. 인물들은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를 구분하는 사회적 합의기준에 타율적으로 순응하지 않음으로써 병의 인식과 치료의 필요성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몽고반점」에서, “영혜도, 당신도 치료가 필요하잖아요.” [......] “...... 나한테 정신 병원에 들어가라는 거야?”). 그들이 행여 치유를 원하기나 한다면, 그것은 의학이나 정신과학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욕지기, 긴장강박증, 결벽증, 환청 등, 작중인물들이 “심인성 장애”라고 명명하는 일부 증상들의 경우, 그것을 앓는 인물들은 치료에 대한 의지 자체가 없고 오히려 그 고통스러운 상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데 집착한다. 만성적인 위경련으로 가장 자주 구현되는, 병환의 완치불가능성과 단속적인 재발성은 한강이 묘사하는 모든 병적 징후들을 공통적으로 가로지르는, 징후들의 징후이다. 내장의 경련은 「붉은 닻」에서 『채식주의자』까지만 아니라 아마도 차후의 소설들에서도 재발할 것이고, 마치 고지식한 내과 의사를 속이듯 독자의 시선을 피하며 달아나는 경련의 인자는 내장에서는 물러간다한들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심장, 눈꺼풀, 입술, 사지, 자궁 등 몸 구석구석을 끈질기게 유랑하면서 신체를 파동치게 할 것이다. 결국 하나의 소설에서 다른 소설로 파동의 에너지를 전달하며 반복되는 경련은 작중인물의 신체의 격렬한 운동을 넘어서 한강 작품의 문학적 신체를 구성하는 고유한 리듬과 패턴으로까지 증폭된다. 따라서 해석이 나아가야 할 지점은 작중인물들의 병명을 진단하거나 정신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토하고 경련하는 글에서 생성되는 낯선 리듬을 감각하는 것이다.

결국 병과 신체의 실재성을 고려하지 않는 언어유희가 체감되는 통증에 무감각함으로써 병과 치유에 관한 구체성 없는 모호한 서사만을 양산하고, 병과 신체에 관한 문학외적 담론이 문학적 신체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유혹적인 핍진성의 외피로 덮인 허구적 징후를 해석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을 때, 들뢰즈가 제시한, 치료에 관한 그 어떤 기존의 담론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순수하게 미학적인 진료”[une clinique purement esthetique] 개념의 실현가능성은 설득력을 얻는다.1)

기존의 의학, 정신분석학적 담론에서 벗어나 병적 징후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문학과 예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들뢰즈는 글쓰기를 언제나 형성중이고 언제나 미완성인 “되기”[devenir]의 과정이자, 살아낼 수 있고 살아낸 “생이 가로지르는 통로”[un passage de Vie]로 정의한다.2)

신경증이나 정신병은 그러한 생의 통로가 가로막히고 끊겼을 때 발생한다. 글을 씀으로써 지속적으로 "되기"의 과정을 실천하고 생의 통로를 뚫는 작가는 따라서 병자가 아니라 세계와 인간에 관한 징후들을 진료하는 의사이다. 문학은 삶의 길목이 막힌 자들, 억압받는 소수자들을 발명한다. 그들의 혁명적인 열광과 착란은 지배자의 시각에서는 광기와 비정상이지만, 억압받은 생의 활로를 뚫고 끊임없는 “되기”의 가능성을 되찾아준다는 점에서 해방적인 치유책으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문학은 역설적으로 병이 아니라 건강을 촉진한다.3)

이러한 문학의 임상적 기능에 관한 들뢰즈의 사유는 신체에 침투한 지배와 피지배,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병, 이성과 광기 등 이분법적 대립항들의 정치적 위계질서를 전복한다는 점에서 일견 유의미하다. 그러나 그의 논지에서 병적 징후는 다시 건강의 징표로 치환되므로, 결국 병을 다시 억압과 말소의 함정에 빠뜨린다거나, 또는 착란과 광기에 대한 낭만적이고 순진한 예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강의 소설들에서 비정상은 정상으로, 병적 징후는 건강으로, 죽음에 맞닿은 경험의 통렬한 감각은 생명의 징표로, 광기는 예술혼 등으로 손쉽게 치환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소설을 미학적 진료를 실천하는 임상적 문학의 한 예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작가가 작품 속에서 병적 징후들에 대한 진단과 치유책을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징후들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신체에 징후들을 접붙여서 그것들이 신체를 관통하는 궤적을 치밀하게 뒤쫓고, 신체와 징후와 궤적의 복합적인 형성물을 언어로, 글로, 즉 문학적 신체로 발명해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전언대로, 작가는 의사이고, 의사는 발명가이다. 한강은 토악질하거나 경련을 일으키거나 환청을 듣거나 투신하거나 자해하거나 질주하는 신체들을 발명하고, 단속적으로 재발하는 완치불능의 징후 속에서 그들은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몽고반점」) 같은, 극한의 감각과 경험이 집약적으로 응축된 매 찰나를 살아내고, 그 찰나들의 연속은 곧 생이 가로지르는 통로, 탈주의 구멍을 이룬다.


2. 구멍, 탈주, 기관 없는 신체 되기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거대한 바윗돌 같은 어둠이 재인의 몸을 조여오고 있었다. 살이 뭉개어졌다. 등뼈가 오그라들었다. 쇄골이, 갈비뼈가, 무릎과 복숭아뼈가 일제히 우둑우둑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모든 근육과 내장들이 성내며 사방으로 튕겨져나갔다.
- 「저녁빛」

욕지기와 구토감은 한강의 소설 속에서 가장 빈번하게 관찰되는 신체적 징후이다. 욕지기가 치미는 상황과 원인은 다변적이다. 길 위에 떨어진 종이를 보고 구토하는 앙트완 로캉탱처럼, 외부로부터의 감각적 자극이나 타자적 대상물에 의해 촉발되어 구토하는 인물은 한강의 소설 속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우선 그들의 구토는 이질적인 타자를 거부함으로써 신체의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기보존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토사물을 쏟아내듯 세계로부터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를 말소하거나 내던져 버리고 싶은 자기부정의 성격이 강하다. 입영 전날 자신의 “젊음이, 슬픔이, 바람 같은 만남들이 일제히 치밀어올라와” 욕지기를 느끼고 토악질을 하는 「야간 열차」의 화자나, 과거에 제작했던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그 이미지들에 대한 자신의 미움과 환멸과 고통 때문에” 구역질을 하는 「몽고반점」의 비디오 아티스트처럼, 혐오와 부정의 대상은 현재의 자신과 연속체를 이루는, 과거의 의식과 기억과 감각이 응축된 순간순간의 자신의 면모들이다. 이들에게는 과거가 비교적 다행스럽게도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자취와 기억의 편린으로만 남아 있는 반면,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의 L.에게는 사춘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을 다스리기 위한 폭식의 결과로 비대한 육체로 남았다. L.은 계부의 성적 폭력에 대한 방어적 기제로 “허벅지가 너무 굵어져서 억지로 파고들기” 어려운 “허옇고 물컹물컹한 몸”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몸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상처이자 흉터이다. L.의 거식증과 구토는 근원이 불분명한 과거의 감정이나 기억에 대한 염오에서 비롯된 비자발적인 내장 운동에 의한 단순한 메슥거림과 욕지기를 넘어선다. 그녀는 과거가 각인된 자신의 신체 전체를 거부하려는 의지에서 자발적으로 목구멍에 손을 집어넣는다.

“평생 못 달아나. 죽을 때까지 난, 내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내 몸을 빠져나갈 수 없는 거니까.” 그러나 L.의 자조에서 역설적으로 엿보이는 것은 해방과 탈출의 통로이자 빠져나가는 구멍으로 전환되는 신체의 가능성이다. 구토는 식도와 입을 통해서 토사물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경우 “붉은 내장들을 줄줄이 토해낸 뒤, 할 수만 있다면 양말 속 뒤집듯이 항문까지 고스란히 뒤집어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흰 꽃」의 화자의 경우에서처럼 부정하고 싶은 과거의 기억들과 감정들을 내뱉으려는 욕구가 신체적 징후로 발현된 것이다. 입은 “흡사 짐승의 소리 같은, 분절되지 않은 비명”(『그대의 차가운 손』), “짐승의 헐떡이는 소리, 괴성 같은 신음”(「몽고반점」)처럼, 소통과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언어로는 발화할 수 없었던, 응축된 회오의 감정이나 억압된 욕망의 목소리가 탈출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구멍은 신체의 도처에 존재한다. “여인의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 꽃이 열리는”(「몽고반점」) 듯한 몽고반점은 단순히 색소가 침착된 표피를 넘어서 그것보다 더 깊은 심층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내부를 꿰뚫고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의 시선을 유혹하고 끌어당기는 구멍으로 변환된다. 멍은 외부에서 가해진 힘에 내부의 혈관이 반응하여 생성된 신체의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접점이자, 신체의 내부적 변화의 징후가 스미고 새나오는 탈출구이기도 하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떠나서 피를 갈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를 부정하고 새로운 신체의 가능성을 꿈꾸는 화자의 아내에게 피부의 푸른 멍은 “혈관 구석구석에 낭종처럼 뭉쳐 있는 나쁜 피”가 발현된 징후이면서 녹색식물로의 변신의 욕망 역시 표출하는 탈주의 통로이다. L.에게 있어서 부정하고 싶은 신체로부터의 탈주가 자학적일 정도로 지난한 까닭은, 그녀가 껍데기로서의 신체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서 오로지 실제의 구멍인 입으로만 탈주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 여자의 열매」에서 화자의 아내는 피부 전체를 탈주의 구멍으로 이용하고, L.의 경우와는 달리 환상적인 서사구조 덕택에 가능하긴 했지만, 기존의 신체로부터 탈피하여 완벽한 변신을 성취한다. 변신은 "되기"의 일환으로서, “알아볼 수 없게 됨”[devenir- imperceptible]으로써4) 세계로부터 자신을 은폐하고 위장하는 행위, 정체성의 교란을 통해 억압적인 질서의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통로와 구멍을 뚫는 행위이다.

투신과 질주의 충동 역시 구토와 함께 구멍을 통한 탈주의 욕망을 표출한다.「몽고반점」의 화자는 자기부정의 구역질과 동시에 “거칠게 운전 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먹고 마셔온 곳을 모두 토해”내고 싶은 구토감과 “달리다가 숨이 차서 고꾸라지고”(「질주」) 싶은 질주욕구는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징후는 신체를 생성한다. 그러나 징후에 의해 신체가 생성되는 양상은 작중인물들이 의식적으로 의도하는 변화의 방향과 대부분은 일치하지 않는다. 징후가 고통을 수반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신체는 실재이기도 하지만 담론적 구성물이기도 하다. 물질로서의 신체는 실재계에 속하지만 그것을 조직화하고 표상하는 것은 상상계의 이미지와 상징계의 언어의 그물망이다. 실재로서의 물질적 신체는 타자의 시선과 목소리가 개입되는 이미지와 언어의 스크린을 투과함으로써 하나의 통합적 조직체로 형성된다. 이미지와 언어에 의해 신체가 하나의 통합적 조직체로 형성될 때 실재로서의 신체는 필연적으로 억압되고, 그것은 징후의 형식으로 귀환한다.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 E.는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신체, 즉 미, 경제성, 섹슈얼리티 등 모든 담론의 층위에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이미지에 맞추어서, 소읍출신의 육손이 소녀에서 능력 있고 아름다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자신의 신체를 조직화하는 데 성공한다. 그녀의 변신의 의도는 구멍이 아니라 “데드 마스크” 같은 껍데기를 만드는 데 있고, 그것은 탈주가 아니라 사회적 진입을 목적으로 한다. 완벽히 조직된 껍질로 감싸인 그녀의 신체에서 누출되는 징후는 불감증, 즉, 고통 없는, 그러나 쾌락에도 반응하지 않는, 감각의 부재이다.

E.를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인물들은 표층적인 욕망의 방향과는 다른 신체를 생성하는, 또는 알 수 없는 근원에서 발생해서 신체의 통합적 조직성을 교란하는 징후들에 시달린다. 이때 격렬한 고통의 감각은 통합적 조직체와 그 조직체의 틈을 뚫고 나오려는 징후 사이의 길항에서 발생한다. 징후는 일견 정상적으로 조직되고 기능하는 신체의 표면 아래 다른 신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징후는 진부한 이미지와 빈곤한 언어로 표상되지 않은, 협소한 주변 세계를 구성하는 타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벗어나는 신체가 탈주해 나오는 구멍이다. 정상적인 기관 기능을 학습하고 조직의 통합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신체의 실재적인 국면, 그것은 들뢰즈가 제시한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의 한 정의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각각의 기관들은 존재하되, 그 기관들이 통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직되지는 않은 신체를 의미한다.5)

경련, 구토, 배설 등을 통해서 조직체로서의 신체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는 기관 없는 신체는 한강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겪어내는 징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기존의 이미지와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신체의 영역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재현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를 탐색하고 발명하고자 하는 욕구와 의지를 환기한다. 따라서 징후는 발명으로 향한다. 「몽고반점」의 화자가 감지하는 예술 창작의 단초, “에너지가 조금씩 뱃속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하는” 느낌이 내장 경련이나 욕지기의 징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외적 현실로부터 규정된 이미지와 언어의 껍질을 뒤집어쓴 신체를 거부하고, 내부에서 추동되는 에너지에 걸맞는 새로운 신체를 발명하고자 하는 욕구는 구토감을 자극한다. 「저녁빛」의 재헌이 그리는 회화,「몽고반점」의 화자가 찍는 비디오클립, 『그대의 차가운 손』의 장운형이 제작하는 인체캐스팅 등 예술작품 연작은 반복적으로 추동되는 낯선 에너지에 의해 새로이 드러나는 신체의 가시적인 한 국면을 재현한다. 연작은 징후의 반복성에 관한 자기반영적 형식이고, 그런 점에서 한강의 모든 소설들 역시 제목이 다르더라도 비슷한 징후들을 끊임없이 변주해내는 연작을 이룬다.

새로운 신체 발명의 욕구는 예술적인 창작 과정을 통해서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아무리 작가가 스스로 창조해낸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자기의 몸이 아니라 자기와 분리된 대상이자 타자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대상이자 타자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 만들기보다는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기관 없는 신체 되기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결코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로 고정시킬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조직화된 신체에서는 발현되지 못했던 감각을 해방시키고, 감각은 기관 없는 신체를 파도처럼 가로지르면서 끊임없이 진동하고 움직이는 리듬을 직조한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온몸의 장기들이 출렁이”(『그대의 차가운 손』)는 듯한 토악질은 내장의 리드미컬한 운동이자 기관 없는 신체의 탈주의 시작이다.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몸 위에 꽃들이 그려질 때, 즉 그녀가 통합적인 조직체나 단일한 개체 개념으로서의 신체를 벗어나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가 되어갈 때, 그녀의 몸은 떨리고, 그 가녀린 진동은 화자에게까지 파장을 전달한다. 병적인 징후들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신체 상태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강렬한 감각을 일깨우고, “이적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또렷한 감각들이 내 눈과 코와 귀와 살갗을 뚫고 몸속으로 헤엄쳐들어오기 시작”(「흰 꽃」)하는 느낌처럼, 고통의 임계점에서 무한한 희열로 전환된다. 자극은 구멍으로서의 감각기관들을 통해 신체 내부로 침투하고, 조직체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신체는 역으로 미지의 자극에 반응하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감각기관, 구멍이 된다(『그대의 차가운 손』에서 “예리한 송곳 같은 것으로 명치께가 관통된 것 같았고, 그 관통된 부분이 차츰 넓어지는 것 같았다. 가슴과 복부 전체가 거대한 구멍이 된 것 같았다.")


3. 의인법, 공감각, 관능

부드러운 개펄 위로 한발 한발 다가온 바다는 뻘밭 속에 처박혀 있던 목선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물결의 춤추는 듯한 발끝이 배밑창을 두드릴 때마다 낡은 목선들은 잠 덜 깬 여인처럼 게으르게 뒤치락거렸다. [......]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의 영육을 두 팔 가득 끌어안으려는 듯이 다가오는 바다, 부드러운 혀로 핥고 매만져 구석구석 침윤해 있던 온갖 상처와 갈망과 슬픔을 끄집어내려는 듯한 저 담홍빛 물결.
- 「저녁빛」

그러나 단지 인체만이 기관 없는 신체 되기의 가능성을 지닌 것인가. 신체 개념은 유기체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제도, 언어, 국가, 집단 등 조직과 체계를 구성하고 개체화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다. 문학은 살아낼 수 있고, 살아낸, 생이 가로지르는 통로라는 들뢰즈의 정의에서, 생의 외연을 반드시 유기체의 자연발생적인 생장과 소멸이나 인간의 삶과 역사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되기”가 개체적 활동이 아니라 언제나 이질적이고 타자적인 것들과의 관련하여 실천되는 집단적 활동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유기체의 생명 바깥에서도 일어나는 기관 없는 신체 되기는 충분히 가능하다. 작품내적인 인물의 형상과 징후를 넘어서 문학적 글쓰기 자체에도 작용하는 기관 없는 신체 되기의 가능성을 탐색해야 한다.

기관 없는 신체가 저항하는 것은 기관들이 통합적으로 조직화된 신체, 각각의 기관에 적합한 기능과 감각이 배분된 신체이다. 이러한 신체는 자연발생적으로 주어진 실체가 아니다. 정치경제적 제도, 상징계적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와 기호, 미적 판단과 취향의 대상으로서의 이미지 등은 신체를 통합적으로 조직화하는 인자들이다. 신체는 제도와 담론과 이미지의 그물망 안에서 감각과 기능과 사용법에 관한 훈육과정을 거치고, 통합적 조직체로 편성된다. 문학이 조직적 유기체로의 신체에 저항하고 기관 없는 신체 되기를 지지한다면, 그것은 허구를 경유하여 현실세계의 지배적인 언어, 이미지, 미디어, 사회적 타자들에 의해서 우리의 신체가 어떤 방식으로 분절되고 유기적으로 재구성되는지 폭로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문학 자체가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면, 그것은 문학이 기존의 언어적 질서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관 없는 신체를 관통하는 감각과 리듬과 떨림의 운동을 표현할 만한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기 때문이다. 한강의 소설은 기관 없는 신체 되기를 실천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신체적 징후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징후의 발명을 넘어서 징후적 언어까지 발명함으로써, 그 자체로 새로운 문학적 신체가 되기를 지향하고 실천한다.

언어적 구성물은 어떻게 리듬감 있게 움직이며 어떻게 파동을 생성해 낼 수 있는가. 그것은 우선 문자와 소리의 차원과 의미의 차원이 분리된 언어 자체의 특성을 극대화하여, 하나의 표현이 여러 의미를 내뿜으며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은유와 환유의 수사법을 이용함으로써 가능하다. 또한 기관 없는 신체가 되어 새로이 경험하는 감각들, 신체 자체의 파동을 언어적으로 모방하고 재현함으로써도 가능하다.

한강의 작품에서 가장 현저한 수사적 어법은 의인법[anthropomorphism]과 공감각[synesthesia]적 묘사이다. 자연계의 사물들이 고유명사로 불리는 오비드의 『변신』에서처럼, 일반적인 의인화에서 하나의 대상은 인간적인 특성과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다른 대상과 구별되는 단일한 개체성을 획득한다. 6)

그러나 한강의 작품에서 의인화된 자연계의 사물들을 각각 호환될 수 없이 구별되기는커녕, 서로 몸을 뒤섞듯 개체간의 경계를 흐리고 지운다. 왜냐하면 의인화는 자연에 인간 신체의 이미지를 투영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한강의 소설들에서 인간 신체는 통합적으로 조직된 단일한 개체, 각각의 기관들이 제 자리에서 정확하게 기능하는 유기조직체가 아니라, 여기저기 분절되고 그 분절된 각각의 부분들이 공감각적으로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는 새로운 발명체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몸을 통합적으로 응시하지 않는 인간의 시선에 자연계의 사물들 역시 어떤 것이든 통합적인 이미지로 나타나지 않는다.

한강의 소설들에서 도시, 바닷가, 광산촌, 지형과 공간을 구성하는 대상들 어떤 것에나 목소리, 눈물, 통곡, 가슴, 손, 혀, 때로는 몸 전체 등 인간적 형상의 자취가 새겨져 있다. 의인화된 외부적 공간과 풍경은 작중인물의 내면의 정서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거울상이 아니다. 파편화되고 무질서하게 분절된, 기원이 이질적인 신체의 부분들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고, 누구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감각과 감정과 기억이 투사된 풍경은 그 자체로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내고,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오게”(「여수의 사랑」) 하고 싶은 자해의 충동은 자연의 풍경과 인간의 감각, 신체의 일부, 정서를 공유하고 교환함으로써 개체성과 정체성의 속박, 통합적 유기체로서의 신체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몸과 오토바이 사이의 간격이 없어”지고, “반인반수와도 같이 결합된 민첩한 물체가 격렬한 속력으로 아스팔트를 미끄러”(「어느 날 그는」)지는 극한적 속도의 체험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혼이 피부를 뚫고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도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달릴 때뿐”(「질주」), 극한의 경험을 통해 신체는 구멍, 강렬한 감각을 받아들이는 기관, “생이 가로지르는 통로” 그 자체가 된다.

새로운 신체로 경험하는 더욱 풍부한 감각, 새로운 신체가 획득하는 더욱 복합적인 기능, 그 인간적 신체와 시선으로 새롭게 재현하고 발명하는 자연과 언어, 한강의 소설들은 이러한 새로운 징후들의 연속체이다. 인간과 자연과 언어를 통합하는 이 감각적이고 기능적인 신체의 징후들은 관능의 경험으로 나아간다. 관능[官能]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모든 종류의 감각기관들이 제 기능을 최고도로 다 하는 것, 외부에서 부과되는 자극에 가장 적극적으로 신체를 내맡기는 것, 경련에 이를 정도의 신경의 떨림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강의 글쓰기는 “관능적일, 다만 관능적일 뿐인”(「몽고반점」) 이미지를 향해, 관습적 언어와 이미지에 억눌린 감각들의 극한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신체를 발명하며, 끝없이 떨리고 파동치는 징후들을 발명하며 나아간다.


1) Gilles Deleuze,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Paris: Editions de la Difference, 1981) 38p.
2) Gilles Deleuze, Critique et clinique, (Paris: les Editions de Minuit, 1993) 11p.
3) Deleuze, 위의 책 13-15p 요약.
4)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10. 1730 - Devenir-intense, devenir-animal, devenir-imperceptible,"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2: Mille Plateaux (Paris: Les Editions de Minuit, 1980).
5) Gilles Deleuze,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35p.
6) Paul de Man, "Anthropomorphism and Trope in Lyric," The Rhetoric of Romanticism (New York, Columbia UP, 1984) 참조.


단평·빈곤한 역사와 소설 :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우리는 빈곤해졌다. 우리는 인류의 유산을 조금씩 조금씩 포기했으며, “동시대”의 자잘한 변화와 교환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종종 백분의 일밖에 안 되는 가격에 전당포에 맡기기도 했다.
- 발터 벤야민, 「경험과 빈곤」 중에서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꾼」을 위시한 여러 문학 에세이들에서 소설의 발생에 관한 자신만의 독특한 의견을 반복적으로 개진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야기꾼들의 구전적인 이야기가 지배적이던 시대에, 이야기는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 - 전통, 역사, 유산 - 을 전달하고 확산시키는 매체였고, 인간은 그렇게 누구나 공유하고 실제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함양했다. 이야기꾼과 이야기는 철저하게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존재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전쟁 등의 사건은 인간의 삶의 양식과 존재기반을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이 단절시키고, 이야기꾼과 이야기가 대변하는 공동체적인 경험, 역사나 전통이나 인류 공동의 유산이라는 가치를 파괴한다. 소설은 이렇게 공동체적 경험이 빈곤해진 시대, 역사와 전통이 회의적으로 부정되는 시대에 단자화된 개인들을 위무하기 위한 문학양식으로서 태어난다.

배수아는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위한 「작가의 말」에서 소설을 쓰게 된 가장 직접적인 동기이자 최초의 모티프는 빈곤이었으며, 점점 넓어지고 팽창하는 빈곤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원고 역시 영원히 끝내고 싶지 않았다고 밝힌다. 빈곤이 소설을 발생시키고 지속시키는 근원적 조건이라는 점에서 벤야민과 배수아는 각자의 시대와 영역을 넘어 공명하고 조우한다.

마지막 한 장[章] 이전까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작중인물인 김성도의 모순형용적인 표현대로 ‘빈곤에 대해서 풍부한 스펙트럼을 제공해줄 수 있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 관한 '초상화, 인간의 백서'에 충실하다. 많은 인물들이 일회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각각의 장들은 지극히 사소한 디테일로 연결되어 있고, 첫 장부터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빈약한 시간만이 경과할 뿐이어서, 게다가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면서 어떤 결정적 파국을 예비하는, 따라서 진부한, 이야기 구조도 아니어서, 소설은 언뜻 무질서하게 수집되고 나열된 단편적 이야기들의 몽타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서 이야기의 질서를 결정짓는 것은 사건의 전후관계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으리만치 얇고 납작한 이 동시대의 시간성이 아니라, 가난하고 빈곤한 삶의 조건을 인식하는 능력의 점진적인 전개,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장악력의 점층적인 강화이다. 빈곤을 재현하는 소설의 언어는 "돈이 없어"라는 단순하지만 현실적인 두 마디의 말, 주관적이고 편협한 신세한탄에서 출발하여, 사회학 논문의 문체를 원용하면서 날카로운 통찰과 객관성 위에 반어적인 자기부정과 연민의 어조를 더한 "예비적 서문: 슬픈 빈곤의 사회"에 도달할 때까지, 텍스트의 결을 점차로 다각적이고 다층적으로 촘촘하게 조직해나간다.

글머리에 인용한 벤야민의 문구와 관련하여, 소설의 마지막 장인 「오직 무참히 짓밟힌 인간」에 이르러, 빈곤에 관한 가장 통시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인식을 구현하는 인물로서 전당포 업주가 설정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빈곤이란 허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건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 태생적인 외모의 추함, 지식과 교양에 대한 문화적인 욕구를 채워줄 만한 환경의 부재 등, 빈곤의 형상은 개인의 내면과 외면뿐만 아니라 가족과 국가의 역사, 인류 전체의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걸쳐 헐벗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배수아의 소설에서 빈곤은 마침내 동시대와 경제의 영역을 넘어서 훨씬 오래 되고 근본적인 인간의 역사와 경험에 맞닿아 있다는 인식으로 급격히 확장된다. 우리가 빈곤하다면, 그것은 단지 배가 고프기 때문, 사랑, 명예, 지식, 미 등 개인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대상들이 부재하고 그것들에 이르는 방법이 좌절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이 한국의 역사고 유산이란 말인가? 그들은 공통점이 없었다. 그들은 한시도 같은 '역사' 안에 머물렀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빈곤하다면, 보다 확장된 인식의 차원에서, 개인들을 공동체로 묶는 역사, 유산, 공통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역설적으로 그 빈곤한 역사의 공간에서 태어나고 지속된다. 역사적으로 빈곤한 인간을 위하여, 소설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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