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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한글나라
                - 이 은 조


유아용 한글 카드다. 콘크리트 칸막이 기둥마다 붙여 있는 네모난 카드는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이다. 엽서 크기만 한 카드 왼쪽에는 굵은 명조체로 ‘가’가 써 있고, 그 옆에는 가위가 그려져 있다. 글자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단어와 연상되는 그림이 짝지어 있는, 유아용 한글 학습 카드가 분명하다. 싱글과 커플만 사는 원룸에 아이가 있을 리 없고 아이가 있다 해도 어둑한 주차장에서 놀게 할 부모는 없다. 까막눈의 노인이 살 만큼 관리비며 주위 상가의 물가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투명테이프로 반듯하게 붙여놓은 걸로 보아 누군가 한글 공부를 하나보다. 어둑한 주차장에서 한글을 공부하는 사람은 누굴까? 글자만 보면 솔깃해지는 내게 한글 카드는 묘한 호기심을 일으킨다. ‘가’를 지나고 ‘나’ ‘다’를 지나 ‘라’ ‘마’ 앞에서 후진을 하여 자동차를 주차시킨다. 차 문을 열려고 하는 사이 ‘가’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일정한 간격과 박자, 웅얼거리는 음성,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라본다. 어렴풋한 형체가 색으로 먼저 눈에 띈다. 푸른색 상의와 갈색 하의, 청소원 복장의 여자다. 나는 고개를 뒤로 빼고 운전석에 등을 밀착시킨다. 여자와 나의 거리에는 자동차 일곱 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여자는 기둥에 붙여놓은 한글 카드를 느릿느릿 떼어내며 카드에 적혀 있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는다. 여자의 한국어는 어설프다. 하지만 여자의 억양에는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다. 살짝 등을 떼고 여자를 염탐한다. 여자는 큰 소리로 글자를 반복하여 말한 후 카드를 툭 떼어내 한 손에 모아 쥐고 한 번 더 말한다. 여자는 여러 번 크게 소리 내어 ‘마’ 카드에 써 있는 ‘마술’을 읽는다. 마수, 머슬, 마슬을 발음하다 가까스로 ‘마술’이라 말하고는 ‘바람’으로, ‘사과’로, ‘아가’로 이동한다. 여자가 카드를 다 떼어낸 뒤 콘크리트 기둥 뒤로 사라진다. 웅얼거리는 소리도 멀어진다. 운전석에 얼굴을 파묻는다. 얕은 한숨이 새나온다.

“아, 마샤? 그 여자 이름이야. 나이는 한 스물 넷? 미니슈퍼 아줌마한테 들었어. 꽤 친절하고 유능하대. 남의 나라에 와 있어서 그렇지, 자기네 나라에선 선생님이었다나 봐. 왜 그런 경우 많잖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깔보고 함부로 해도 자기네 나라에선 한 자리 했던 치들이 돈 벌러 오는 거잖아. 그런데 넌 주차장에서 그걸 다 지켜본 거야?”

샤워를 끝내고 나온 정연이는 조금 전 주차장에서의 일을 듣자마자 여자를 알은척 한다. 뉴스에서 고용주에게 억울하게 임금 체불을 당하고 핍박받는 이주노동자들을 보면 안됐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가까운 곳에 있는 그 여자를 봤을 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외려 나는 여자가 불편하다. 까만 피부에 덩그마니 쌍꺼풀 진 큰 눈은 경계심으로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할 때면 의뭉스러워 보였다. 마샤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이름 따위 아무려면 어떤가. 주차장에서 홀로 한글 공부를 하는 걸 보면 의지의 한국인 못지않은 것 같다.

언젠가 광화문에서 까만 피부의 남자가 나를 쫓아온 적이 있다. 버스에서 내리려는 찰나였다. 남자는 함께 서 있던 사람들에게 서툰 한국어로 “여기가 광화문 맞습니까?” 하고 물었다. 남자와 가까이 서 있던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우산을 폈다. 가을비였다.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남자는 빗물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내게 간절히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우산을 남자 쪽으로 기울였다. 남자가 내 우산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남자는 고맙다는 말 대신 대뜸 시간이 있느냐 물었다.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빗물에 젖은 남자의 까만 피부에선 꿉꿉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자 남자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투로 남자를 빤히 쳐다보고는 거래처 사무실로 향했다. 두어 시간 쯤 지났을까. 일을 보고 나오는데 불쑥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비가 멈춰 있어 남자는 말끔한 차림새였다. 정확히 두 시간 삼십분이 지나 있었다. 나는 앞장서서 남자와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자세히 보니 까만 피부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더듬더듬 한국말로 내 이름을 묻고 직업을 물었다.

나는 고분하게 말해주었다. 남자는 커피를 벌컥 마신 후 내게 영어를 잘 하느냐고 물었다. 간단한 회화 말고는 영어를 못 한다고 했다. 남자는 자신이 한글을 공부하기 위해 각종 한국 방송과 책들을 섭렵했다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나는 빙긋 웃었다. 남자가 갑자기 테이블을 탁 내리쳤다. 왜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당황스러웠다. 한 개 국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며 남자는 애정 어린 충고를 했다. 한국에 와서 라면으로 때우며 살았던 나날을 회상하던 남자는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머뭇거리다 사무실 호출이 와서 일어나야겠다고 말했다. 갑자기 남자는 일어서려던 나를 제지하며 대뜸 자신이 나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프리토킹, 완벽한 원어민 발음, 전화로 영어 통화 수시 가능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동안 고객을 기다린 남자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싸게, 싸게 해드려요!”

나는 선풍기 앞으로 가 앉아 땀을 식힌다. 주차장에서 송 선배가 거절한 내 폰트에 대해 절망하고 있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정연이의 컴퓨터를 올려다본다. 정연이는 머리의 물기를 떨어내며 다가와 웹 폰트 작업 중인 컴퓨터를 천천히 꺼버린다.

“전기세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미안.”

전기세 때문이 아니라 내가 모방할까 두려워서라는 걸 나는 안다. 말을 삼키듯 선풍기 풍향을 한 단계 높인다. 미니홈피에서 정연이가 단독 개발한 한글은 잘 팔린다. 벌써 두 번째 한글 폰트를 개발 중이다. 내 폰트는 언제쯤 네티즌들에게 공급될까. 아니, 내 폰트는 언제쯤 한반도를 강타하는 폰트가 될까. 정연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선풍기 풍향을 낮춘다. 매몰차게 모니터를 꺼버린 행동을 정당화시키려는 정연이의 지루한 자기변호다.

“마샤가 재활용 창고 운영하는 거 알아? 누구한테 무엇이 필요한 지 알아뒀다가 가져다준대. 덕분에 오피스텔 사장이 구의원 나올 때 도움도 되고 해서 계속 놔둔다나봐. 그래서 매트리스 하나 부탁했어. 번갈아 가며 침대에서 자는 거 좀 불편하지 않니? 미니슈퍼 아줌마한테 슬쩍 운을 띄어 놨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선풍기를 정연이에게 내어주고 땀에 전 티셔츠를 벗는다. 장미꽃 피는 계절인데 날씨는 초여름이다. 앙가슴 사이로 땀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화장대에서 머리 끈을 집어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묶는다. 정연이는 부러 고개를 돌리고 머리의 물기를 떠는데 집중한다. 내가 옷을 입을 때까지 정연이는 그러고 있을게 분명하다. 2년째 같이 살면서 정연이는 자신의 속살을, 속마음을 쉽게 내비치지 않는다. 우리 우정은 미니슈퍼 아줌마와의 친분보다 못하다. 제 것을 드러내면 내가 움켜쥐기라도 할까봐 정연이는 조심, 또 조심한다. 내가 벌거벗고 돌아다니기라도 하면 정연이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말리다 박제가 될지도 모른다. 동거인을 박제로 만들 수는 없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매트리스가 필요해? 여긴 너무 좁아.”

정연이는 내가 옷을 입었다는 걸 알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얘기한다. 정연이가 폰트 개발에 성공하는 이유는 사방에 눈을 심어두기 때문일지 모른다. 정연이는 안 보는 듯 하면서 다 보고 있다. 그게 정연이의 필살기일까.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저 테이블을 현관 쪽으로 옮기면 돼. 테이블에 잡동사니뿐이잖아.”

정연이는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남은 물기를 떨어낸다.

“그거 얼마나 한다고. 필요하면 우리 생활비에서 하나 사지 그래?”

청바지를 벗어 침대에 던질 뻔 한 팔을 재빨리 거둬내고 바닥에 던져놓는다. 정연이와 내가 함께 산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물과 기름이 합쳐지기도 하느냐고 물었다. 정연이와 나는 함께 출발한 신입사원이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인 학원을 수료한데다 집 떠나 살고 있는 동향인이라는 것까지, 닮은 데가 많아 쉽게 친해졌다. 신입사원 시절 윗사람의 횡포를 묵묵히 받아내며 서로를 위로하다 보니 함께 살자는 말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튀어나왔다. 물과 기름이 교묘하게 일치하는 정점, 생활비를 절약하자는 모토가 우릴 한 곳에 몰아넣었다. 동료로서 뿐만 아니라 동거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살면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 살던 사람들이 내놓는 거면 웬만큼 쓸 만 할 거야. 좀 기다려보자고. 이사 가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조만간 매트리스 하나 나올 거야.”

호기로운 정연이의 말 꼬리를 덮치듯 현관 벨이 울린다. 인터폰에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한글 공부를 하던 여자, 마샤다. 마샤의 동공은 사물을 움켜쥐고 있는 듯 팽팽하다. 앙 다문 두터운 입술, 자두알처럼 동그란 얼굴형과 옴폭 패인 턱, 질끈 묶어 올린 머리 아래로 야생초처럼 듬성듬성 흘러내린 잔머리. 마샤는 두 눈을 껌벅거리며 응답을 기다린다. 정연이가 일어나 인터폰 수화기를 든다.

“무슨 일이세요?”

“매트리스, 왔어요.”

“네? 아, 매트리스? 고마워요. 금방 갈게요.”

정연이는 마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팽팽했던 마샤의 풍선이 푹 꺼져버린 느낌이다.

“거봐. 내가 뭐랬니? 금세 하나 생겼잖아.”

정연이는 싱긋 웃어 보이며 컴퓨터 앞에 풀썩 앉는다. 다리를 꼬고 턱을 받친 채로 모니터를 켠다.

“참, 송 선배 만났지? 뭐래? 니 폰트 사겠대?”

정연이는 생각보다 인내심이 많다. 내가 원룸에 들어서던 순간 궁금했을 텐데 지금까지 참은 걸 보면 정연이의 인내심은 칭찬할 만하다. 나는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천천히 뚜껑을 연다. 건조대에 있는 컵을 바라보다가 주스 병째 벌컥 마셔버린다. 내 등에 생채기를 낼 것처럼 정연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동거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정연이는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금세 대답하지 않는 내 침묵으로 미뤄 알고 있다. 때로는, 최소한의 예의를 잊어버릴 때도 있다.

“잘 안 됐구나? 나도 처음엔 그랬어. 송 선배가 오죽 까다로워야 말이지. 그래도 송 선배가 틀린 말 하는 사람은 아니더라고.”

정연이의 폰트 ‘천사체’는 미니홈피에서 베스트 상품이다.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가 활성화되면서 자신의 글에 어울리는 향기처럼 독특한 글씨를 선택하는 사용자가 늘어났다. 몇 년 전 함께 일하던 송 선배가 한글폰트디자인 사무실을 차리면서 좋은 폰트를 사들이고 있었다. 정연이는 회사에서 팀장 역할도 똑 부러지게 해내면서 개인적으로는 송 선배에게 자신의 폰트를 팔고 있다. 먼 훗날 제 이름을 내 건 회사를 차리기 위해 정연이는 여러모로 준비를 하는 중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를 수석 디자이너로 써먹겠다고 하지만 며칠 전 K기업 로고디자인 프로젝트팀에서 정연이는 내 이름을 빼버렸다.

“조금만 더 고쳤으면 좋겠대.”

마지못해, 자기 위안처럼 정연이에게 말한다.

“어떻게?”

호기심 많은 정연이, 쓸데없는 관심은 싫은 나. 침대에 걸터앉아 내 포트폴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정연이는 내 시선을 쫓아 집요하게 묻는다.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괜찮아. 내일부터 생각할래.”

“넌 그게 문제야.”

“뭐가?”

“금방 좌절하는 거. 쉽게 좌절하고 쉽게 절망하는 거 말이야. 그리고, 폰트를 무조건 팔겠다고 생각하면 안 돼. 거기엔 디자이너의 혼과 집념을 쏟아야 돼. 무조건 팔려고 하면 그게 상품이지, 예술작품이니? 그래, 상품인데 예술작품 다운 면모를 갖춰야 팔린다 이 얘기야. 내가 회의 시간마다 누누이 강조하잖아. 디자인이 경쟁력이고, 디자이너가 상품이다. 언더스탠?”

정연이는 입 꼬리를 올리며 회전의자를 돌려 앉는다. 회사에서 내 직속상관인 팀장 정연이는 이젠 집에서도 팀장 행세를 하려든다. 팀장과 동거인의 위치를 망각해버리는 정연이를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 걸 구분할 줄 알면 사람이 아니지. 정연이는 팔을 뻗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가지런하게 제자리에 올려놓는다. 책상 밑에 놓아둔 가방에서 안경집을 꺼내 안경을 꺼내 쓴다. 사감선생 같다고 놀려도 정연이는 뿔테 안경을 바꾸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이 더 위악적으로 보이길 바란다. 그것이 자신의 경쟁력이고 상품이라는 듯이. 팀장 정연이는 오늘 바닥에 요를 깔고 자야 한다.

그래서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고 작업을 할 작정인 것 같다. 번갈아가며 싱글 침대에서 자는 방법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정연이는 자신이 바닥에서 자야하는 날에는 밤새 불빛을 어른거리게 하여 내 잠을 망친다.

얼핏 잠이 들었을까. 뜨거운 샤워가 온 몸을 녹지근하게 만들었다. 현관벨 소리에 눈을 뜬다. 정연이가 뿔테 안경을 위로 치켜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연이는 팔짱을 끼고 선 채로 모니터 속의 얼굴을 바라본다. 마샤다. 다시 현관 벨이 울린다. 모니터 속의 마샤는 주위를 둘러보며 원룸의 동정을 살피듯 현관 문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정연이가 낚아채듯 인터폰 수화기를 든다.

“무슨 일이죠?”

정연이는 한참 골몰하고 있던 중이었나 보다. 날 선 목소리에 날아가는 새 깃털이라도 잘라버릴 것만 같다. 모니터 속의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줍은 웃음을 짓는다. 머리를 긁적인다. 어색한 상황일 때 머리를 긁적이는 버릇은 온 지구인의 공통점인가.

“매트리스요. 안 가지세요?”

한 겹 철문 밖이라 마샤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린다. 정연이가 한숨을 내쉬며 인터폰이 붙어있는 벽에 등을 기댄다.

“알았어요. 나중에 갈 테니까 보관 잘 해놓으세요.”

“아, 안돼요. 그냥 두면, 나 없으면, 누가, 가져버려요. 지금, 가져야 돼요.”

마샤의 어설픈 한국어가 툭, 툭 분주하게 튀어나온다. 가위를, 마술을, 사과를 발음하던 음색과는 딴 판이다.

“그럼 그렇게 해요. 하나 사면 되니까 그대로 두세요.”

정연이는 인터폰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는다. 모니터 속의 마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듯 사라진다.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내?”

“안 잤어? 지금 막 중요한 타이밍이었단 말이야. 그깟 매트리스 사면되지 뭘 그래.”

내가 이불을 조심스레 거둬내고 일어나는 사이 정연이는 오만 상을 찡그리며 책상 앞에 앉는다. 다시 잠들기 어려울 것 같다. 침대 옆에 있는 가방을 끌어당긴다. 담배를 꺼낸다.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연다. 찬 바람이 훅 얼굴을 덮친다. 담배에 불을 붙인다.

“윤서영. 나 작업하는 거 안 보이니?”

“어, 미안.”

나는 담배를 창밖으로 내던진다.

“야! 불나면 어쩌려고 그래? 담뱃불 끄고 버린 거야?”

“아, 아니….”

“얼른 나가봐. 얼른!”

정연이가 큰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바지와 카디건을 집어준다. 뭔가 내키지 않지만 방화범이 돼버리는 극단적인 상상에 떠밀려 옷을 걸치고 신발을 꿰어 신고 나온다. 엘리베이터가 맨 꼭대기 층에 있어 할 수 없이 계단으로 뛰어 내려간다. 5층에서 1층까지 단숨에 뛰어내려와 담배를 던진 화단으로 향한다. 가느다란 흰 연기를 뿜고 있는 담배를 찾아 발로 비벼 끈다. 위를 올려다본다. 정연이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담배를 들어 보인다. 정연이가 말없이 고개를 뒤로 빼고 창문을 닫는다.

발로 비벼 끈 불이 내 가슴으로 옮겨온 것처럼 식은땀이 난다. 허기가 진다. 뭔가 먹고 싶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걸렀다. 카디건 주머니를 뒤진다. 만 원 짜리 한 장이 잡힌다. 어쩐지 당한 느낌이다. 이 카디건은 장 볼 때 입는 ‘마트 전용 카디건’ 이다. 여분의 돈을 넣어둔 것도 정연이의 아이디어였다.

담배를 꺼낸 건 자발적이었지만 당황스러운 깜짝 각본은 떨떠름하다.

테이크아웃 식품을 들고 가는 손들, 아무 곳에도 시선을 주지 않는 마네킹들이 사는 오피스텔 근처, 샐러드 바로 들어간다. 샐러드 바에는 서너 명의 여자아이들이 생과일주스를 홀짝이며 자기들만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 뉴에이지 피아노 연주곡 속으로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캐스터네츠처럼 부딪쳤다 흩어진다. 단골이라고 결코 알은 척을 하지 않는 샐러드 바 주인이 목례를 하고 진열대를 응시하며 조용히 주문을 기다린다. 늦은 저녁이라 메뉴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먼저 토마토 주스를 주문한다. 주인은 발 빠르게 밀폐용기에서 토마토를 꺼내 믹서에 넣고 작동 버튼을 누른다. 믹서 소음이 샐러드 바를 휘젓는다. 주인이 토마토 주스를 내 쪽으로 건네고 진열대 앞으로 와 선다. 아스파라거스와 데친 새우, 양상추를 가리키자 주인은 집게로 적당량을 집는다. 계산을 하고 나서 샐러드 접시와 토마토 주스를 들고 빈 테이블에 앉는다. 열 평 남짓한 샐러드 바, 조금만 집중하면 옆 테이블의 사소한 정보쯤은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여자아이들은 진로 문제와 남자친구 이야기를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뜨린다. 흘린 이야기들을 다시 또 주워 담느라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양상추에 새우를 포개 파인애플 소스에 찍어 한 입에 넣는다. 새콤한 소스가 혀에 착착 감겨든다.

샐러드 접시를 거의 다 비웠을 때 쯤 샐러드 바 문이 열리는 동시에 후끈한 바람이 먼저 들어온다. 푸른색 상의에 갈색 바지를 입은, 마샤다. 그녀의 옷은 색상뿐만 아니라 신분에 대한 상징이기도 해서 얼굴색과는 상관없이 고단해 보인다. 마샤가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아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여자아이들은 마샤와 닿지 않고 좁은 테이블 사이를 빠져나간다. 마샤가 내 옆을 지난다. 샐러드 바 주인이 유난한 목소리로 여자아이들을 배웅한다. 뒤돌아 마샤를 본다. 마샤는 샐러드 바 앞에서 메뉴를 고르고 있다. 주인은 냉담한 표정으로 마샤를 훑는다.

“이거, 이거, 주세요. 칼로리 없어요?”

마샤가 손가락으로 메뉴를 고른다. 주인은 싸늘한 시선으로 답하며 천천히 접시와 집기를 집어 든다. 외려 마샤는 주인의 표정에도 담담하다. 그런 일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유가 느껴진다.

“우리 샐러드바 메뉴에는 각 명찰마다 칼로리가 적혀 있습니다.”

주인은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낚시라도 하는 듯 마지못해 메뉴들을 집어 접시에 올려놓는다.

“아, 맞다, 여기, 써 있어요. 고마워요.”

“양상추와 새우 드릴까요?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

“없습니다.”

마샤는 반듯하게 선 채로 또박또박 말한다.

나는 샐러드 접시를 들고 카운터로 가 반납한다. 주인은 와중에도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깍듯하게 내게 인사한다. 주인이 마샤가 고른 샐러드를 저울에 올려놓고 눈금을 가늠한다.

“삼천 팔백 원입니다.”

주인은 마샤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내가 앉아있던 테이블에 빈 주스 잔이 눈에 띈다. 주스 잔을 들고 다시 카운터로 간다. 마샤가 주머니를 뒤적인다. 천 원짜리 세 장을 꺼내 보인다.

“팔백 원, 없어요, 빼주세요.”

마샤는 얼버무리며 말한다. 주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친다.

“미안합니다. 빼주세요.”

마샤가 다소곳하게 한 번 더 말한다. 주인은 신경질적으로 집게를 집는다. 나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지폐를 만지작거린다. 주인의 행동을 참을 수가 없다. 대놓고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지켜볼만한 구경거리는 아니다. 주인이 마샤가 고른 샐러드 접시에서 새우 조금, 양상추 조금을 덜어내려 할 때, 나는 주인에게 손을 들고 말한다.

“여기, 천 원 있어요. 거스름돈은 됐어요.”

천 원짜리 한 장을 들어 보인 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뒤돌아 나온다. 오월의 밤에 여름의 전조가 풍긴다. 카디건을 벗어 허리에 두르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아그작, 이 밤을 깨물어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심호흡을 한다.

담배 냄새가 자욱한 피시방에는 축 늘어진 채로 손가락만 움직이는 군상들이 모여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포털 사이트에서 내가 처음으로 커버 디자인한 책 ‘비즈니스 브리지’를 검색한다. 경영학과 수업 듣는데 비즈니스 브리지 요약 좀 해주세요, 비즈니스 브리지 읽고 리포트 써야 하는데 도와주세요…. 책 내용과 관련된 질문 맨 밑에 그해의 베스트 북커버 디자인으로 뽑혔다는 기사가 짤막하게 실려 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시상식 사진이라든지 내 신상명세서 등의 정보는 없다. 이 책은 나 혼자 디자인했다. 저자의 얼굴 윤곽과 부리부리한 눈이 돋보이도록 세피아의 농담을 조절해 모노톤 기법으로 그렸다. 활자는 세로로 배치했다. 고딕체와 명조체를 결합하여 특이한 폰트를 그려낸 것도 비즈니스 브리지만의 특징이다. 기존의 폰트가 아니어서 따로 조판과 필름 작업을 거쳐 찍어야 했다. 인쇄공들에게 간식을 사다 나르며 비위를 맞췄고 밤샘 작업을 거듭했다. 구매욕을 북돋우며 지적인 이미지를 갖췄다는 평을 받아 경영학 서적 커버 디자인의 전형이 될 정도였다. 비즈니스 브리지는 한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다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스테디셀러 같은 삶, 내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였는지도 모른다. 꾸준히 사랑받는 한 권의 책처럼,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안온함.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정상 체온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환절기에는 감기에 걸렸고 불규칙한 계절의 본성에 버거워했다.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잘 지낸다는 안부가 새삼 귀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 한 번의 성공을 기억한다. 독특한 폰트라며 한글 서체로 개발하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나는 실패를 생각하지 못했다. 국제표준 폰트인 유니 폰트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동원하여 사용빈도가 높은 한글 2350자의 웹 폰트를 만든다. 홀로 작업해야 글꼴의 분위기와 개성이 고르게 나타난다.

근육통과 관절염은 액세서리처럼 따라붙는다. 외로움과 인내의 싸움이다. 송 선배는 보기 좋게 늘 나를 넘어뜨렸다. 그건 겨우 단 한 번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며 꿈을 깨라고 했다. 명품 넥타이를 바투 조이며 송 선배는 내 폰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영 씨 폰트는 너무 안이해. 폰트야말로 디자이너의 감각적인 마인드를 표현하는 거라고. 자음은 명조의 느낌이 많이 나고 특히 ‘ㅡ’ ‘ㅜ’ 는 가로획이 너무 짧아. 모음을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느낌이 나. 다른 자음들과 어울려 있을 때 균형미도 떨어지고. 확 튀어버리니까 다른 글씨체와 섞여 있는 것 같아서 독창성이 없어. 다시 한 번 해봐. 영혼을 넣어보라고, 영혼을.”

송 선배는 매번 똑같은 소리만 반복한다. 그걸 누가 모르나. 영혼을 넣고 디자이너의 마인드를 살린 감각적인 폰트를, 세상에 단 하나뿐인 폰트를 만들고 싶다. 균형미를 갖추되 개성을 담고 있으며 독창적인 이 세상 단 하나의 폰트를, 내가 만들고 싶다. 내 영혼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헤매고 있을 만한 영혼이 내게 있었던가. 아. 이 지독한 패배 의식. 그래도 만약 영혼이 있다면 부디 내 손으로 스며들기를. 스며든 후엔 결코 사라지지 말기를.

피시방에서 나와 한달음에 원룸에 도착한다. 현관 벨을 누른다. 기척이 없다. 열쇠를 갖고 나오지 않아 난감하다. 정연이는 벌써 잠이 든 걸까. 현관 문 틈으로 원룸의 동정을 살핀다. 딸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인터폰 스피커로 정연이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어디 갔다 와?”

“… 피시방.”

“나간 김에 매트리스 좀 갖고 와. 오늘부터 매트리스에서 자도록 하자. 내가 치워놓을 테니까 얼른 다녀와. 응? 부탁한다, 친구야.” 정연이는 일 년에 한두 번쯤 내게 친구라고 부른다. 자기 생일과 내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때. 올해는 그 소리를 다 들었으니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오피스텔 후문을 통과해 재활용 창고로 향한다.

재활용 창고에 드리워진 비닐 발로 불빛이 새나온다. 고요하고 스산하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말한다.

“저기, 계세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빛 옆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커진다. 비닐 발을 들추고 마샤가 나온다.

“무얼 찾으세요?”

“저기, 매트리스 가지러 왔어요.”

“503호? 잠깐만요. 아, 샐러드바!”

뒤돌아서던 마샤가 나를 알아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거스름돈, 여기, 있어요.”

마샤가 주머니에서 동전 두 개를 꺼내 내게 내민다. 나는 겸연쩍어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감사합니다.”

마샤는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동전을 주머니 속에 넣는다. 엉거주춤 선 채로 나도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두 사람이 맞절이라도 하는 품새다. 고개를 들자 어색한 웃음이 동시에 새나온다.

나는 마샤를 따라 재활용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스탠드, 테이블, 전기밥통까지 재활용 창고는 잡동사니 천국이다. 벽에는 마른 꽃다발까지 걸려 있어 이국의 카페 같기도 하다. 백열전등 아래 자그마한 탁자 위에 노트와 연필, 한글카드가 널려있다. 주차장에서 보았던 그 한글카드다. 마샤는 창고 구석에 쌓아놓은 폐휴지 더미들을 한 덩어리씩 옮겨놓는다. 마샤의 키만큼 폐휴지들이 쌓인다. 그 뒤에 매트리스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인다.

“이렇게 안 하면, 누가, 가져요.”

마샤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마샤가 매트리스를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나는 마샤를 도와 매트리스 한 귀퉁이를 나눠 잡고 발을 맞춰 옮긴다. 한쪽에 세워놓은 매트리스에 마샤가 마른걸레질을 한다. 나는 뒤돌아서다 쌓아놓은 폐휴지더미들에 걸려 넘어진다. 동시에 폐휴지더미들도 쓰러진다.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폐휴지 종이들은 직소퍼즐 조각처럼 흩어져버린 후다. 마샤는 개의치 않고 매트리스를 정리한 후에 폐휴지 더미들을 정리한다.

“미안해요.”

마샤는 너그러운 미소로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폐휴지 더미를 모은다.

“같이 해요.”

나는 마샤처럼 쭈그리고 앉아 흩어진 폐휴지들을 모은다. 폐휴지들은 연극 포스터, 의류 대 방출 바겐세일, 신장개업 북경반점등 크기가 다른 광고지 일색이다. 무조건 눈에 띄도록 디자인은 무시하고 커다란 글씨로 써 있어 공해처럼 여겼었다. 누군가가 정성스레 모아놓고 있었다는 느낌 때문일까.

구겨지거나 발밑에 깔려 누추하게 삶을 마감해버리는 폐휴지들과 달리 서로의 등을 껴안고 있었을 폐휴지들은 마니아의 소장품처럼 귀중해 보인다.

“이걸 모은 거예요?”

“…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한글, 공부해요. 재밌어요.”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됐어요?”

“2년, 됐어요.”

마샤가 검지와 중지를 세우고 말한다. 승리를 기원하는 표시 같아 괜스레 웃음이 난다.

“이사 가고, 오면 재활용 많이 버려요. 좋은 거 없어져요. 금방 없어요. 아까 909호, 이사 갔어요. 안 쓴대요, 버렸어요.”

“고마워요. 덕분에 잘 쓸게요. … 꽤 늦었는데, 집에 안가요?”

“여기, 지하에, 내 방, 있어요. 잠깐, 방 구할 때까지만, 살아요.”

마샤는 얼추 폐휴지 더미들을 정리하여 네 개의 덩어리로 분류한다. 덩어리들을 들고 한 쪽으로 갖다 놓는다. 바닥에 초등학생 노트와 철제 필통이 눈에 띈다. 노트 겉장에는 마샤의 이름이 비뚜름히 써 있다. 마샤가 다가와 머리를 긁적인다. 어색하고 쑥스러울 때 머리를 긁적이는 버릇은 마샤의 성격인 듯하다. 나는 마샤의 손에 노트를 건네준다.

“아, 미안해요. 글자만 보면 습관적으로 쳐다보게 돼요.”

마샤가 두 손으로 노트를 들고 내게 내민다.

“한글, 가르쳐주세요. 배우고, 싶어요.”

뜻밖의 부탁이라 나는 조금 당황스럽다. 지하주차장에서 마샤는 홀로 한글을 깨우쳤다. 한글 카드를 보고 배울 정도라면 내가 가르쳐 줄 단계는 지난 게 아닐까. 어설프지만 제 의견을 말하는 것만 봐도 마샤의 한글 능력은 상당하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게 끝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더 배우겠다고 결심한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한국어를 배우려고 해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듯 마샤는 입술을 오므리고 지그시 웃는다. 한국에 돈 벌러 왔으니 한국어를 배워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배우냐는 내 질문은 어리석었을지도 모른다. 마샤의 한글 노트를 펼쳐 유심히 살펴본다. 모음과 자음이 가지런하지 않고 제각각 놓여있는 글씨부터 모음 자음을 바짝 붙여 쓴 글씨까지, 삐침이 있는 명조도 둔탁한 고딕도 아닌 마샤만의 글씨다. 길쭉한 자음과 작은 알갱이처럼 붙어있는 모음은 그 하나만으로도 독특한 분위기가 난다. 한글로 메워진 노트를 멀리 놓고 보니 한 폭의 그림 같다. 머릿속으로 마샤의 글씨를 그린다. 각 진 모음의 글꼴에 명조의 삐침을 넣어 자음을 만든 내 폰트의 이름은 ‘서영체’다. 오랫동안 군림해온 두 개의 폰트를 합친 이유는 익숙한 친근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명조의 삐침을 여리게 하고 고딕의 딱딱함을 부드럽게 공 굴려도 여전히 두 개의 서체는 너무나 달라 조합될 수 없었다. 조금 모양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오랜 세월의 무게를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이름을 그려주세요, 써주세요. 예쁜 글씨, 쓰고 싶어요. 한글, 이뻐요. 그림, 같아요. 한국말 잘 하면 다른 사람, 될 것 같아요. 나는 내 나라 사랑하지만 한국도, 사랑해요.”

마샤가 노트를 내민다. 노트를 받으며 마샤의 푸른 상의를 들여다본다. 늦은 밤까지 제복을 입고 있는 마샤. 물음표를 남발하는 것 같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 없다.

“제복 입고 있으면, 제복이 유니폼이에요, 알죠? 제복 입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아요?”

“편해요. 이거 입어야 사람들, 내가, 누군지 알아요. 괜찮아요. 난 좋아요. 지금은 오피스텔 청소하지만, 난 달라질 거에요. 다른 사람, 될 거에요.”

“왜, 이름이 마샤에요? 좀 특이해서요. 마샤의 나라에서 보통 쓰는 이름이 아니잖아요?”

“우리 아버지, 선생님이에요, 러시아, 이야기 좋아해요, 많이 읽었어요, 마샤는, 모스크바에 가면, 다를 거라고 믿는, 여자 이름이에요, 아버지 나한테, 그랬어요. 나처럼, 살지 마, 안돼, 더, 좋은 세상, 가, 그랬어요.”

마샤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더 좋은 세상에 와 있을지도 모를 마샤는 울면 더 약해진다는 금기사항이라도 새긴 것처럼 금세 눈물을 닦고 방긋 웃는다. 노트를 빤히 보며 자신의 이름이 씌어지기를 기다린다. 나는 푸른색 상의에 흘림체로 수놓은 마샤의 이름을 노트에 쓴다. 아니, 마샤의 말대로 마샤의 이름을 그린다. 쓰는 게 아니라 그린다, 이다. 마샤의 미음(ㅁ)은 아득한 평원에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울타리 같다. 시옷(ㅅ)은 한자의 ‘사람 인’ 짜 같기도 하고 자음의‘ㅑ’ 와 만나 보드라운 느낌도 든다. 마샤는 내게서 노트를 받아 주의 깊게 본 후 내 글씨와 비슷하게 자신의 이름을 그린다.

마샤가 한글을 쓴다. 마샤의 글씨는 명조체도, 고딕체도 아닌 이 세상, 단 하나의 글씨처럼 보인다. 연필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고 마샤는 자신의 이름에 들어있는 모음과 자음을 천천히 써내려간다. 마샤의 미음(ㅁ)은 어디에나 내걸어도 좋을 창이다. 시옷(ㅅ)은 평원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의 걸음 같고 자음의 ‘ㅑ’와 만나 씩씩한 느낌이 난다. 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처음 한글을 배웠던 시절, 나는 다섯 살이었다. 또래 아이들 보다 일찍 한글을 떼었고 내가 쓴 글씨는 모든 아이들이 흉내 내고 싶어 할 만큼 예뻤다. 새로운 글씨체들을 마구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내 글씨를 모방했다. 그러나 간혹은 아이들의 외면을 받은 글씨들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찬사를 받지 못한 글씨를 원망하며 망설임 없이 휴지통에 버렸다.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누군가 그랬다.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고. 그러므로 나는 이길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마샤에게 주문한다.

“잘 했어요. 다시 써 봐요.”

마샤는 연필을 다시 모아 쥔다.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고 중지로 연필을 받친다. 두 글자를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마샤의 눈빛은 진지하고 섬세하다. 마샤에게 한글은 더 좋은 세상의 창이 되고 있는 걸까.

제 이름을 써놓고 마샤는 무릎걸음으로 폐휴지 더미로 다가간다. 종이 한 장을 꺼내와 내 앞에 내민다.

“여기, 이 글씨처럼 써주세요.”

마샤가 내민 두툼한 아트지는 어떤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다. 독특한 서체로 디자인한 숫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것이 마감일이 멀지 않은 폰트디자인 공모 포스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글씨, 너무 이뻐요, 그림, 같아요. 똑같이 안돼요, 될 것 같아요. 아, 될 거예요.”

콘테스트 제호를 아라베스크 문양과 결합시키고 보라색으로 농담을 조절한 ‘폰트디자인콘테스트’는 글자 하나하나 독립돼 있고 어울려 있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다른 글자들과의 어울림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나는 머리에 둔기를 맞은 것처럼 새로운 창을 발견한 느낌이다. 언젠가 내 글씨와 똑같이 쓸 거라는 확신에 찬 마샤의 말이 주문처럼 들린다. 마샤가 정성들여 글씨를 쓴다. 한글을 그림이라 생각한 마샤, 울타리를 치지 않고 창을 만든 마샤의 눈썰미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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