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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육체를 둘러싼 두 개의 시각 - 정현종과 황지우의 시에 대하여           - 박정희


1. 들어가며

심연의 공포를 감추는 데 있어서 예술에의 도취만큼 적합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보들레르는 말한 바 있다. 이는 예술에의 도취가 죽음과 욕망, 고통과 억압과 같은 심연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무한한 희열과 충일의 순간으로 데려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 시인 정현종과 황지우라면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했을지도 모른다. 심연의 공포를 감추는 있어서 몸/육체에의 도취만큼 적합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지금까지 시인들에게 있어 몸/육체는 촉각을 비롯한 원초적인 감각들의 응집물이자, 그 물질성과 감각성으로 인해 존재의 본질로 들어가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로 이해되어 왔다. 그리고 80년대 이후로는 경제적 효율성과 도구적 일상으로 촘촘히 교직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전망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시인들 특히 정현종과 황지우는 몸/육체에 관한 시적 사유를 통해서, 존재의 육체성을 일상의 시간 속에서 복원하고 몸을 지닌 생명들의 본질과 근원적 모순을 통찰하는 시적 작업을 보여 준다. 이러한 그들의 시적 작업은 전통 서정시의 규범적 문법과 관습적 정서를 내파하고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확장하는 의의를 지닌다.

그런데 그들의 시가 내포하는 몸/육체의 함의는 각기 다르며, 미학적 방법론과 초월적 전망 역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 글은 그들의 시에서 몸/육체가 어떤 의미를 띠는지 살펴봄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한 중요한 단면을 이해하려는 조그만 시도이다.

2. 몸의 희열, 충일의 경험-정현종의 경우

복도에서/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를 보고/비탈길을 내려가면서 골똘히/그 다리 생각을 하고 있는데/(……)/우리의 고향 저 原始가 보이는/걸어다니는 窓인 저 살들의 번쩍임이/풀무질해 키우는 한 기운의/소용돌이가 결국 피워 내는 생살/한 꽃송이(시)를 예감하노니……(「한 꽃송이」중)

화자인 '나'는 복도에서 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를 보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골똘히/그 다리 생각을 하고 있다." 여자의 다리는 "우리의 고향 저 元始가 보이는/걸어다니는 窓인 저 살들의 번쩍임", 말하자면 타자에게로 열려 있는 생명의 움직임이자 생동하는 날 소용돌이의 향연이다. 이러한 여자의 다리를 화자는 '골똘히' 생각한다. 골똘히 생각한다는 것은 이성적인 분석 행위도, 말초적 관음증의 발로도 아니다. 그것은 몸의 희열에 도취되고 생명의 환희에 매혹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렇듯 그의 시에서 몸은 감각의 총체이자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렇게 시인이 몸을 강조하는 것은, 몸의 배타적 특권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과 정신 혹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지 않은, 생명의 본래적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말하자면 몸의 강조는 오늘날 너무나도 진부해져 버린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명제의 긍정적 실천이며, 몸이 배제된 '순결한' 정신과 그 형이상학적 가치의 옹호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 몸은 정신의 대립어가 아니다. 그것은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면 정신의 틈, 심연, 파열 혹은 날것인 채로의 정신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면, 원초적 기운의 날 소용돌이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에서 특이하게도 몸은 폐쇄적이고 단자적인 모습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 바깥(타자)과 스스로의 내적 깊이를 향해 한없이 열려 있"는, 즉 나와 타자가 무한한 소통과 교감 속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는 충일과 희열의 공간이다. 이 몸의 공간 속에서 나와 타자는 서로를 비추고 감싸며 품고 어루만진다. 나아가 차별과 경계 없이 '한통속'이 되어 생명의 충만한 환희를 경험한다. 이를 통해 몸을 지닌 생명들은 삶의 욕망과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어 우주의 무한한 시간을 사는 충일한 존재가 된다.

그 살가죽의 촉감, 그 눈을 통해 나는/자연으로 돌아간다./무슨 充溢이 논둑을 넘어 흐른다./동물들은 그렇게 한없이/나를 끌어당긴다./저절로 끌려간다/나의 자연 속으로.//무슨 충일이 논둑을 넘어 흐른다(「나의 자연 속으로」 중)

'나'는 더 맛있어 보이는 풀을 들고 풀을 뜯고 있는 염소를 꼬신다. "그저 그 놈을 만져보고 싶고/그놈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그러나 사실 내가 염소를 꼬신 게 아니다. 오히려 염소가 "그렇게 한없이/나를 끌어당"긴다. 인간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서 사물들을 지각하고 명명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내가 보고 있는 순간 살아 있는 것들도 나를 보고 있는 것이며 자신들의 심연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충일한 생명감 혹은 살가죽의 생기로운 촉감은 일방적인 꼬심이나 강요된 사랑이 아닌 희열과 충일을 향한 서로의 움직임에 의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자연의 광활함 속에 섞이는 생명들의 충만한 환희, 그 환희로운 열림이다.

살아 있는 것들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한 청년의 초상」이라는 시를 보면 한 청년이 쇠파이프를 차에다 싣는다. 하지만 파이프도 청년을 끌어들인다. 파이프를 실을 때 자신도 싣는 듯한 그의 표정은 '구원'이며 '순수 집중'이다. 이는 파이프에 의해 청년이 구원된다는 진부한 의미가 아니다. 서로를 끌어들이는 순수 집중의 인력 속에서 이 세계 전체가 인력과 참여, 교감과 친화가 배척되는 이 도구적 일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파이프는 더 이상 죽어 있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不動'의 풍부함으로 이 세계를 끌어당김으로써 충일한 존재가 되는 방식이다.

이렇듯 충일의 경험은 일방적인 끌어당김이나 강요된 폭력에 의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무차별적인 획일화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뿌리들이 서로 얽히며 화합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사물들은 일방적인 관계맺음의 양상인 당김-끌림 혹은 능동-수동의 관계에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대등한 능동의 관계로 전이된다. 이는 주체-대상의 관계가 주체-주체의 관계로 발전하는 동시에, 타자의 존재가 생동하는 물활의 존재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끌어들임과 열림의 역동적 움직임 속에서 "사물들은(이) 스스로를 방문하고 사물들 사이에 교류의 길들을 추구"(J-P, 리샤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벚꽃잎 내려 덮인 길을/걸어간다- 이건 걸어가는 게 아니다/이건 떠가는 것이다/나는 뜬다, 아득한 정신,/이런, 나는 뜬다,/뜨고 또 뜬다./꽃잎들,/땅 위에 깔린 하늘,/벌써 땅은 떠 있다/(땅을 띄우는, 오 꽃잎들!)/꿈결인가/꽃잎은 지고/땅은 떠오른다/지는 꽃잎마다/하늘거리며 떠오르는 땅/꿈결인가/꽃잎들......(「꽃잎」중)

니체는 모든 선한 것은 가볍고 모든 신성한 것은 섬세한 발로 달린다고 말한 바 있다. 움직이는 것은 가벼운 것이며 따라서 역동하는 존재들은 모두 가볍다. 이러한 가벼움은 말하자면 무거움마저 감싸안는 영혼의 넉넉함과 자유로움일 것이다. 벚꽃잎 내려 덮인 길을 걸어갈 때 '나'는 자신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지는 꽃잎마다 무거운 땅 또한 하늘거리며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이 떠오름과 가벼움은 무거운 짐을 최대한 짊어지기 위해 온몸을 비워 낸 결과 무거운 땅을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의 가벼움이다. 즉 무거움을 짊어져도 무거워지지 않는 혹은 무거움을 짊어질수록 더욱 가벼워지는 가벼움이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내가 아직 자유로운 영혼, 들새처럼 나는 영혼의 힘으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짐이 아직 충분히 무겁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렇듯 살아 있는 몸들은 모두 당기고 끌며, 뭉쳐지고 흩어지며, 스며들고 번져나며, 조여들고 풀어지면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임은 시간과 시간 사이의 틈을 지우고 몸과 몸 사이의 틈을 지운다. 이렇게 모든 틈을 지우고 난 뒤 남는 것은 그림자와 같이 가볍고 순수한 움직임 자체이다. 이는 마치 앙상한 율동의 자의식 혹은 형식이 아닌 "律動의 방법만을 생각하는 (......) 생각은 없고 움직임이 온통/춤의 風味에 沒入하는 영혼"과 다르지 않다.

늦겨울 눈 오는 날/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새살인 듯 덮인 숲속으로/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 놓으며/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예년보다 빨리 온 올봄 그 밤나무는/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한나절에 다 피워 놓고 서 있었습니다(「좋은 풍경」)

늦겨울 눈 오는 날, 남녀 한 쌍이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범상한 풍경이다. 이 범상한 풍경은 시인에 의하면 "좋은 풍경"이다. 그것은 남녀의 그짓으로 인해 밤나무가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한나절에 다 피워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좋은 풍경의 주인공은 남녀 한 쌍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밤나무꽃, 나아가 그들을 포함하는 자연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좋은 풍경이란 결국 모든 생명들이 서로를 비추고 감싸며 공명하고 교감하는 자연의 모습 자체인 셈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자연의 모습은 특이하게도 관능적 희열의 양상을 띠며 나타난다. 공명하고 교감한다는 것은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움직임이기도 하다. 이 사랑의 움직임은 거리 둠에 의해 가능해지는 시각적 감각이 아닌 숲속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 놓는" 촉각적 감각에 의해 드러난다. 예컨대 시각이 분석하고 구획하는 논리적 이성의 지각 방식에 가깝다면, 촉각은 사물을 원초적 통일성 속에서 파악하는 지각 방식이다. 말하자면 시각이 거리 둠의 혹은 구경하는 감각임에 비해 촉각은 가까움의 혹은 참여하는 감각이다. 서로 교감하고 공명하는 이러한 관능적이고 촉각적인 풍경 속에서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들은 존재의 본질을 어루만지고 우주의 심연을 열어 보인다.

그러므로 좋은 풍경이란 무차별적인 획일화의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뿌리들이 서로 얽히며 교감함으로써 원초적 통일성을 회복하는 충일한 상태이다. 이 속에서 지리멸렬하고 파편화된 현실은 무질서라는 질서를 부여받은 풍부한 세계가 되고, 사물들은 단편적인 존재이기를 멈추고 타자들을 품는 생명의 핵이 된다.「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시를 보면, 사람들과 사물들이 한순간 동시에 움직이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플라스틱 악기의 소리, 파가 자라는 움직임, 뛰어오시는 할아버지의 모습, 밤꽃이 피어나는 움직임 들 사이로 또 다른 생명이 자라나고 사랑이 움튼다. 이는 싱싱한 감각의 풍경이면서 동시에 다채롭고도 따뜻한 삶의 풍경이기도 하다.

꿈을 버리다니, 요새의 내 꿈은/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이야./그래 이 세상의 떠돌이와 건달들을 먹이고 재우고,/(......)/원시주의자들,/말더듬이,/굼벵이,/우두커니,/하여간 그런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게/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이야(「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이」 중)

"요새의 내 꿈"은 집을 짓는 것이다. 이 집은 좋은 풍경의 극치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무정부적인 감각들과 날 소용돌이들을 끌어 모아 "집 전체가 그냥 한 송이의 꽃"인 곳이다. 또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주인도 손님도 없는 평등하고 화해로운 세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속물과 부르주아와 이기적 잡놈을 제외한, 떠돌이와 건달들 그리고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아 몸이 꽃봉오리인 양 불이 난 사람들, 그리고 눈감은 채 보고 온몸으로 듣는 이들은 매혹과 환희의 순간을 우리의 유한한 삶 속으로 불러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감하고 생동하는 몸의 희열 속에서 우주의 무한한 시간을 사는 충일한 존재가 된다.

3. 촉각에의 매혹과 육체성의 탐구-황지우의 경우

반면 황지우에게 있어 몸/육체는 화해로운 우주적 생명 혹은 충만한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 그의 경우는 좀 복잡한데,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자 한계라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의미를 지닌다. "근원이면서 한계인 그것, 삶도 문명도 그것의 영원한 동어반복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의 시에서 육체는 근원과 한계, 거룩함과 비애로움, 신성과 세속, 초월과 현실, 화엄과 폐허라는 모순적인 것들이 충돌하는 공간이다. 이 모순된 육체의 공간에는 인간의 불우함과 숙명적인 유한성과 더불어 비루한 일상의 바닥이 겹쳐져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시인이 인간의 육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혹은 리얼리즘적 현실 인식과 모더니즘적 형식 실험과의 결합을 통해서, 전통 서정시의 규범적이고 관습적인 문법을 내파하는 시적 태도를 견지해 왔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시인은 시를 쓰지 못하는 정신의 파탄과 "머리는 불타버린 回路"같이 자동 정지되는 현상을 겪는다. 여기에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유토피아 의식의 한계 그리고 현실의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의 무기력함이라는 역사적 조건과 더불어, 육체적 늙음과 열정의 쇠퇴에 따른 시적 긴장의 소멸이라는 실존적 조건이 가로놓여 있다.

의식이 거의 퇴화하자 촉각만이 남았고, 뜻밖에도 그 촉각은 나에게 원시의 감각을 열어 주었으며, 그때 내 손에 물컹하게 잡혀 있는 것이 진흙이었던 것이다. (......) 촉각의 쾌감. 그것의 전율케 하는 직접성은 내 손의 무엇인가를 스파크시켰다. 촉각의 영혼을 發電시킨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만졌다. 나는 깨어났다(「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자서 중)

현실에 대한 도덕적 열정과 시적 긴장이 사라지는 지리멸렬함 속에서 그가 찾은 것은 바로 촉각에의 매혹을 통한 육체성의 탐구였다. 진흙은 딱딱하고 굳어 있는 것이 아닌 물렁물렁하고 무정형적인 것, 더러움과 부드러움 등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끈적거림과 추함이라는 육체적이고도 세속적인 것을 환기시키는 촉각적 감각의 사물이기도 하다. 이 진흙이 불러일으키는 촉각적 감각은 이성과 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의 원초적 감각으로서, 우리 존재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육체적 감각이다. 이러한 진흙의 쾌감과 촉각에의 매혹을 통해서, 시인은 인간의 육체와 생의 직접성에 대한 본질적 사유로 나아간다.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 표를 가리고서/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하는 것이다/몸에 한세상 떠 넣어 주는/먹는 일의 거룩함이여/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거룩한 식사」 중)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나이든 남자가 국밥을 먹고 있다. 그의 행위는 "몸에 한 세상 떠 넣어 주는" 거룩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 세상 떠 넣어 줄 때마다 늙음 또한 떠 넣어 주는 비애로운 행위이기도 하다. 이렇듯 인간의 육체는 거룩하고도 비애로운 것, 성스럽고도 속된 것, 아름답고도 누추한 것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자각된다. 즉 육체는 생의 근원인 동시에 늙음과 죽음의 출발점이다. 마음대로 나갈 수는 있어도 다시는 들어올 수 없는 혹은 문이자 벽인 이 육체는, 이렇듯 한편으로는 생명의 근원이자 삶의 동력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을 무참하게 배반하여 "일생동안 쌓은 것을 한순간에 다 까 먹"는 것이다.

「안부」라는 시에는 치매에 걸려 일상과 핏줄을 망각하는 어머님이 등장한다. 그녀는 늙고 낡고 닳고 늘어진 그리하여 결국엔 썩어 없어질 육체의 상징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녀가 웬 꼬마 계집아이처럼 "콧물 흘리며/얌전히 보료 위에 앉아 계"시는 모습은 "가벼움"으로 명명된다. 이 가벼움은 경쾌함과 발랄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늙음과 병을 견디지 못해 육체와 정신이 유아기로 퇴행한 한 인간의 무거운 운명과 동의어이다. 이 무거운 운명에서 시인이 읽어 내는 것은 "육체를 지닌 존재들의 근원적 모순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증발시키려는 노력"이다.

근원이자 한계로서의 육체성에 대한 관심은 시인의 시작 과정 전반에 두루 나타난다. 주목할 점은 시인이 육체의 감각적 현상 자체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구체적 현실의 지평에서 육체의 문제를 사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 현실의 지평으로 내려온 시인의 시선은 생명의 생태적·우주적 의미를 강조하기보다는 인간의 근원과 유한성을 밝히는 데에 머물러 있다. 간혹 그가 생명의 환희를 노래할 때도 그의 시선은 늙음과 병, 소멸과 죽음 등 생명의 비애를 향하고 있으며,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를 노래할 때 역시 그 뒤에 어른거리고 있는 퇴락과 죽음의 그림자를 향하고 있다. 이는 생명이 본래적으로 안고 있는 탄생과 소멸, 고단함과 비루함, 늙음과 죽음 등과 같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인간의 육체적 표정 속에서 읽어 내려는 시인의 태도에서 비롯한다.

비계 덩어리인 구석기 시대 어머니상에 푸욱 파묻혀서/괘종시계가 내 여생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너무 많이 남아도는 나의 시간들이 누에똥처럼 떨어졌지만/나는 수락했다, 이것도 삶이며/이제는 그것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걸/사람이 喜劇이 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을까마는/그러므로 無爲는 내가 이 나머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格이랄까(「살찐 소파에 대한 日記」 중)

이 시에서 '나'는 하마터면 피아니스트가 될 뻔했던 아내와 함께 십오 층 아파트라는 격조 있는 부르주아적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 속에서 나는 무위와 권태에 무거워진 존재가 되어간다. 나의 무거운 몸은 무거운 삶을 은유한다. 다시 말해 몸이 뚱뚱해지고 늙어가면서 삶 또한 비루하고 무거워져가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육체를 시인은 "살찐 소파"에 비유한다. "살찐 소파"는 일상의 바닥이며 삶의 끈적거리는 심연이자 그 무위의 공간이다. 이는 물렁한 것, 육체적인 것, 나른한 것 등 진흙의 이미지와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 말하자면 소파는 일상의 시간에 각인된 진흙이며, 진흙의 육체로 빚어진 무위의 일상이다.

하지만 살찐 소파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구석기 시대 어머니상" 즉 무위를 감싸안는 포용적 이미지로 묘사된다. 즉 무거운 운명과 비루한 일상의 바닥을 겸허하게 수락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이렇듯 세속적이고 비루한 것 혹은 끈적거리는 일상의 바닥을 긍정함으로써, 시인은 육체의 현상적 감각성의 환기로부터 인간의 모순된 본질과 생의 직접성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다. 질척하고 물컹거리는 일상의 비루함을 직시하고 우리 삶의 깊이 모를 바닥을 수락하는 시인의 태도는 아래 "아름다운 廢人"이라는 이미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글쎄, 슬픔처럼 쌍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그러므로 어느 날 흐린 酒店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다/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중)

지금 '나'는 현란한 불빛이 번쩍거리는 테크노 바나 모던하고 세련된 재즈카페가 아닌 닳아가는 인생처럼 의자가 삐걱거리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다. 이 흐린 주점에서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라는 육체를 걸친 채로, 추억과 회한으로 흐려져 있는 눈동자로 술잔의 수위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이 가죽부대의 육체에 붙은 이름은 바로 "아름다운 폐인"이다. 가죽부대의 삶이 폐인인 것은 그가 이 속도와 무한 복제의 시대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폐인이 아름다운 것은 속도와 무한 복제에 맞서 느림과 자기 되새김이라는 생의 아우라를 완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폐인이어서 더욱 아름다운 혹은 늙어서 더욱 편안해지는 생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보여 준다. 이 생은 "초월의 바깥이 아닌 '안'의 삶을 사랑하는 존재이자 점점 물컹거리는 "진흙에 가까워지는 존재"(이인성)이다. 진흙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형체가 없는 무의미한 '부재'의 존재로 전락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심연인 일상의 비릿한 냄새를 온몸으로 수락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세속적이고도 속물적 존재로 안락하게 귀착하는 것이 아닌 일상의 지평 속에서 초월과 구원의 지점을 마련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 「모던타임즈」끝 장면에서 우리의 "무죄한 희생자,"/찰리 채플린 길가에서 신발끈을 다시 묶으면서, 그리고 /특유의 슬픈 얼굴로 씩 웃으면서 애인에게/"그렇지만 죽는다고는 말하지 마!" 하고 말할 때/나는 또 소갈머리 없이 울었지//내 거지 근성 때문인지도 몰라/나는 너의 그 말 한마디에 굶주려 있었단 말야;/"너, 요즘 뭐 먹고 사냐?"고 물어주는 거(「聖 찰리 채플린」중) 일상의 바닥 혹은 뚱뚱한 가죽부대의 육체 속에서 부재와 현존, 아름다움과 추함, 신성과 세속, 일탈과 안주, 바깥과 안, 초월과 현실 등 모순적인 것들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그리하여 이제 시인에게는 "너 요즘 뭐 먹고 사냐"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진부하기까지 한 말이 삶의 비의와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나아가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거"리는 세속적 행위 역시 환한 '피안'의 풍경으로 각인된다. 먹고 사는 일의 세속성이 어떤 신성한 것으로, 현재와 찰나가 영원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풍경은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맞닿아 있"는 풍경과 다르지 않다.

4. 나가며

이렇게 해서 몸/육체에 관한 두 개의 시각을 살펴보았다. 정리해 보면, 정현종의 경우, 몸은 한편으로 모든 원초적인 감각을 품은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띤다. 이럴 때 몸은 정신의 대립어가 아니라 정신의 틈, 파열, 심연 혹은 날것인 채로의 정신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신의 내적 심연과 타자에게로 열려 있는 충일과 희열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 공간 속에서 나와 타자는 서로를 비추고 감싸며 품고 어루만진다. 또한 서로를 끌어당기며 생명의 충만한 환희를 경험한다. 이를 통해 몸을 지닌 생명들은 존재의 모순을 어루만지고 우주의 심연을 여는 대화를 시작한다.

반면 황지우에게 있어 몸은 생명의 근원이자 한계라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그것은 근원과 한계, 거룩함과 비애로움, 신성과 세속, 화엄과 폐허 등 모순적인 것들이 충돌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몸의 공간에는 인간의 숙명적인 유한성과 비루하고 고단한 일상이 겹쳐져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인간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비루한 일상의 바닥을 따스하게 감싸안는다. 그럼으로써 먹고 사는 일의 세속성이 어떤 신성한 것으로 그리고 현재와 찰나가 영원으로 이어지는 '피안'의 풍경을 자신의 시에 깊이 새겨 넣는다.

[ 단평 ]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 '김선우의 첫 번째 시집'을 읽고 -

그녀들, 물 속에서 출렁거리는 - 여성의 몸과 여성성에 관한 단상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남성-시인보다 여성-시인이 자신의 몸에 더 예민한 듯하다. 남성-시인이 몸을 말할 때, 그 몸은 피와 살을 지닌 구체적인 몸이 아니라 '정신적'인 몸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여성-시인이 몸을 말할 때 대개 그것은 여성으로서의 몸, 여성적 정체성을 지닌 구체적인 몸을 뜻한다. 이는 여성이 성을 초월한 보편적 인간학보다는 자신의 육체적·성적 정체성에 대해 더 섬세한 더듬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렇듯 여성이 자신의 몸과 그 몸이 말하는 근원적 언어에 더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여성의 몸이 생명의 그릇이자 포용과 융화라는 우주의 원리를 잘 구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릇은 무언가를 담거나 가두기 위한 그릇이기보다는, 무언가에게 자신의 내용물을 퍼 주고 떠먹여 주기 위한 그릇에 더 가깝다. 요컨대 여성의 몸은 그 무언가에게 자신의 살점을 떼 주기 위해 순연히 거름과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인 셈이다. 시인 김선우는 "내 고향 바다는 듣기 위함이 아닌 침묵하기 위한 귀를 내게 보여 주었다"고 말한다. 바다를 여성의 상징으로 볼 때, 그것은 시끄럽게 들끓는 욕망과 죽음이 아닌 침묵하는 생명을 향해 푸르게 출렁거리며 둥근 자궁으로 부풀어 오르는 바다가 될 것이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은 자아의 밀폐된 내면 혹은 지식인의 자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앙상한 수사적 산물이 아니라, "겅성드뭇한 산비알" 같은 어머니 음부의 냄새와 뒤섞여 만들어진 홧홧한 몸의 언어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음부는 단순한 육체적 교합의 장소를 뛰어넘어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장소로 인식된다. 그곳은 "한때 무성한 숲"이었고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내력]) 곳이었다. 비록 지금은 잉태와 출산의 가능성이 거세된 불모의 장소가 돼버렸지만, 근원적으로 그곳은 생명이 움트고 드나드는 열린 공간이다. 이렇듯 여성의 몸 속에서 모든 생명은 탯줄로 연결되어 출렁거리고, 죽음과 소멸은 마치 "알맞게 마른 내 똥 한 무더기"가 거름으로 돌아가듯 생의 거름으로 돌아간다. 이 생의 거름은 언젠가 또 다른 어느 여자의 몸으로 들어가 새로운 생명을 일구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삶과 죽음, 생명과 소멸 그리고 흙더미와 거름은 서로 한 몸을 이루면서 포용과 융화의 우주적 원리에 포섭된다.

이 점이 바로 그녀의 시가 다른 수많은 남성-시인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남성-시인들이 몸을 육체적 교합의 장소로 축소시키거나 성을 초월한 보편적 인간학 속에 포괄하려는 데 비해, 김선우의 시는 몸을 통해서 여성적 정체성을 탐구하고 포용과 융화의 우주적 생명력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시집에는 몸 속에 자궁을 품고 있는 여자들, 양수가 출렁거리는 여자들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가령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처럼 "젊은 나도 젊은 백여시처럼 클클 웃"(봄날 오후])기도 하고, "무덤을 열어 젖꼭지를 물려 주(……)내 무덤에서 정말로 젖이 돈 것만 같"([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는 나의 몸이 다른 몸과 별개가 아니며, 그 둘은 서로 넘나들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여성적 인식의 소산이다.

이렇듯 그네들은 서로의 몸으로 대화를 하고 몸의 냄새로 서로를 기억해 낸다. 다른 감각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냄새는 우리 무의식 속에 깔려 있는 기억을 일깨우는 근원적 감각이다. 갓 여문 은행 열매가 피우는 냄새를 맡고 "저렇게 대기 속에 하초를 활짝 펼치고/배내똥 같은 열매를 길러낼 수 있"([선운사, 그 똥낭구])기를 소망할 수 있는 것도, 냄새라는 근원적 감각의 힘이다. 그렇다면, 이 비릿한 몸의 냄새를 통해 여성적 정체성의 회복을 기원하는 시인이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일까. "어머니 몸 속 어딘가 묻혀 있던 구근에서 꽃대가, 생살-물의 살을 찢고 솟구쳐 오르는" 곳, "핏덩어리 꽃숭어리"([雲柱에 눕다])가 피어나는 바로 그곳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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