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
걱정은 두고 설렘만 들고 가라

철이 없으면 사는 게 즐겁다고 했다. 홍성만(31), 설윤성(29)씨 부부가 그랬다. 3년 동안 착실히 모은 적금 4000만원을 찾게 되자 “우리 집 사지 말고 세계여행이나 다녀오자”며 잘 다니던 직장을 나란히 그만뒀다. 그리고 2001년 2월부터 2002년 1월까지 꼬박 11개월 동안 32개국을 여행했다. ‘철이 없으면 사는 게 즐겁다’(우물이 있는 집 펴냄)는 움직이는 것을 싫어해 한때 ‘꿈틀이’로 불렸던 홍·설 부부의 알콩달콩 여행기다.

1년 뒤 제자리로 돌아와보니 세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전세는 2000만원이 올랐고, 휴대전화는 더욱 얇아졌으며, 주머니는 가벼워졌다. 대신 이 부부는 싸움을 빨리 끝내는 법을 배웠고, 느리게 사는 법을 알았으며, 누가 뭐래도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됐다. 또 한 가지, 서울의 석양도 사진 속 풍경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나 이 부부처럼 1년씩 여행하며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못할 것도 없다. 이들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황당하다” “미친 놈” “갔다 와서 뭐 할 건데?”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지금 한 사람은 학교로, 한 사람은 회사로 돌아가 착실히 살고 있다. 당장 ‘철이 없으면 사는 게 즐겁다’를 읽으며 여행 워밍업을 시작한다. 1년짜리 거창한 계획이 아니어도 좋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지도가 있는 가이드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디에 누울까. 신께서는 걱정 말고 내게 맡기라 하시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는 범인은 걱정이 앞선다. 다행히 실용정보로 꽉 채운 가이드북이 속속 출간되고 있어 이런 고민을 덜어준다.

최근 출간된 세계여행 관련 가이드북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한길사의 ‘렛츠고’ 시리즈다. 일본 여행사이며 여행전문 출판사인 JTB의 ‘렛츠고’ 시리즈 한국어판. 일본 내에서 여행 가이드북의 대명사인 다이아몬드사의 ‘세계로 간다’ 시리즈를 압도할 만큼 인기가 많은 책이다. 일단 잡지 스타일의 시원한 판형에 아기자기한 편집이 특징. 각 권마다 나라 혹은 도시별 테마여행을 제안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제1권 ‘중국’편을 보면 일단 주요 도시인 베이징과 상하이를 샅샅이 훑고(거리를 걷는 즐거움, 주목할 만한 일품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 관광명소 등), 다음에 실크로드, 시안, 다롄 등 오지테마여행으로 넘어간다. 요리 항목을 펼치면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맛볼 수 있는 4대 요리 전문점과 중국차의 매력을 소개한다. 쇼핑 가이드에서는 가격정보까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팁 형식의 ‘좀더 알고 싶다’ 코너에서 경극 즐기기, 중국 역사 탐방, 간단한 중국어 회화까지 담아놓았다. 정보가 테마별로 묶여 있기 때문에 기호에 따라 맞춤여행 코스를 짤 수 있다.

지금까지 ‘렛츠고’ 시리즈는 1권 중국, 2권 도쿄·요코하마, 3권 오스트레일리아, 4권 캐나다, 5권 홍콩·마카오, 6권 이탈리아, 7권 영국, 8권 뉴욕, 9권 타이, 10권 뉴질랜드편까지 출간됐다. 얇은 데다 말아 쥘 수 있는 형태여서 부담 없이 가방 속에 넣을 수 있다.

가방에 쏙 들어가는 걸로 치면 컬처라인의 ‘세계도시문화여행 가이드’만한 게 없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시리즈를 번역한 것으로 작은 판형이지만 놀랄 만큼 알찬 정보로 채워져 있다. 일단 이 시리즈의 특징은 처음부터 대륙이나 국가 전체를 한꺼번에 담아내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도시로 시야를 좁혔다는 데 있다. 1권 파리, 2권 뉴욕, 3권 런던, 4권 로마, 5권 베네치아, 6권 바르셀로나, 7권 마드리드, 8권 암스테르담, 9권 샌프란시스코까지 출간되었다.

모처럼의 해외여행이라도 일주일을 넘기기 어려운 비즈니스맨들에게는 차라리 한 도시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실속 있는 여행법이다. ‘세계도시문화여행 가이드’는 각 도시의 명소, 맛집, 분위기 좋은 카페, 극장과 콘서트장, 시장, 호텔 주소와 전화번호, 가격대, 영업시간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펼치면 책의 두 배가 되는 지도는 거리 이름까지 정확히 표시해 놓았다.

일정이 더욱 빠듯한 여행자라면 이 책을 보면서 숙소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단거리 여행 코스를 짤 수 있다. 예를 들어 마드리드편을 보면 왕궁 주변과, 마요르 광장, 프라도미술관 지역, 그랑비아, 콜럼버스 광장, 아쓰카 등 크게 여섯 지역으로 나누어 정보를 정리해 놓았다. 꼭 가봐야 할 명소는 지도에 별표를 해놓아 가이드 없는 여행도 이 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 해외 출장길에 지참하고 싶은 책이다.

여행 안내책자를 고르다가 괜찮다 싶으면 모두 번역물인 게 안타까운 우리의 출판 현실. 그러나 ‘배낭여행의 천국, 라틴 문화 여행’(일빛)은 안심해도 좋다. 저자인 정지은씨는 7년 동안 수차례 배낭여행을 통해 라틴아메리카를 샅샅이 누볐고 1999년 ‘라틴 마니아’를 결성해 아미고스(www.amigos.co.kr)라는 라틴아메리카 사이트를 운영중이다.

정씨가 라틴아메리카를 배낭여행의 천국으로 꼽는 이유는 일단 하루 10달러 내외로 먹고 자고 돌아보고 기념품도 살 수 있는 저렴한 여행경비(단, 중남미로의 이동시간과 경비가 부담스런 점을 빼고)에, 예상 외로 여행안내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왕초보 여행자도 문제없이 다닐 수 있다. 또 한 가지 4주 정도만 배우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스페인어. 서툴더라도 스페인어를 쓰면 현지인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다. 혹시 치안문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7년 여행을 했어도 단 한 번의 불상사도 없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강조한다.

‘라틴 문화 여행’은 간략한 중남미 역사부터 팁 형식의 알짜 정보(버스 타기, 숙소요금, 인터넷 사용법, 시장에서 살 수 있는 물건 등)까지 꽉 채워져 있다. 마지막 장은 패러글라이딩 마니아를 위한 부록이다. 남미 4개국에서 패러글라이딩 즐기는 법을 상세히 소개했다. 정씨가 93년부터 패러글라이딩을 해온 베테랑임을 안다면 이 정보가 얼마나 귀중한지 알 수 있다. 스페인어로 된 패러글라이딩 용어까지 수록돼 있다.

여행 에세이

“사람 사는 기 어데 간들 안 똑 같나.” 사진작가 김홍희씨의 어머니가 길 떠나는 아들에게 찔러준 한마디였다. 김씨는 긴 여정을 마치며 이렇게 기록한다. “파리의 거리거리, 뉴욕의 5번가에도 공허는 찾아오는 것. 여행이란 얼마나 덧없고 헛된 것인가. 그대여 그대는 곧 깨닫게 되리니, 중요한 것은 머문다는 것! 참 오랜 동안 짊어지고 다녔다.”

하지만 이것은 떠나본 자만이 남길 수 있는 기록이다. 김홍희씨의 사진산문집 ‘방랑’은 여행기도 아니고 자서전도 아니지만, 어딘가 떠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여행 에세이는 욕망의 자극과 대리만족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해치운다.

김미진씨의 이탈리아 여행기 ‘로마에서 길을 잃다’(해냄)는 소설가의 눈과 화가의 손으로 쓴 책이다. “여행은 지도가 정확한지 대조하러 가는 게 아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여행정보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정보와는 관계없는 소소한 만남과 추억으로 채워져 있다.

‘로마에서 길을 잃다’는 지도를 접고 여기저기 헤매다 보면 길이 보이는 여행, 낯선 골목에서 문득 들려오는 낮은 음악처럼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누구나 이만한 기록은 남길 수 있다.

인도에 미친 남자 윤재헌씨는 서른일곱에 회사에 사표를 내고 유럽과 아시아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인도는 다섯 차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씩 구석구석 뒤졌다.

지금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머물며 여행기록을 정리해 펴낸 책이 ‘나는 다시 인도로 떠난다’(산해)이다. 역시 정처 없이 떠돈 기록이다. 윤씨는 “인도에 가면 그 많은 도시 중 어디부터 가봐야 할까?”라는 물음에 “정답은 없다”고 했다. 그곳에 도착해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장구한 역사와 큰 땅덩어리를 이 나라를 스치듯 본 것만으로 섣불리 단정짓지 말라고.

박정석의 ‘쉬 트래블스 She Travels’(효형출판)는 여행기가 아니다. 책 말미에 몇 쪽 붙여놓은 ‘둘러보면 좋은 곳들’ 정보는 여행 가이드북의 흉내만 냈을 뿐이다. 학교라는 곳에 들어간 지 22년 만에, 수도승처럼 공부만 하다 박사학위를 코앞에 두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내키는 대로 살고 싶었던 1년 동안 그가 택한 곳은 라틴아메리카다. 낯선 공간 속에 놓인 자신과 대면하며 작가의 길을 탐색하던 기록.

김현종의 ‘유럽인물열전’(전 2권, 마음산책)은 제목만 보고 새로운 위인전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인물을 만나기 위해 떠난 유럽 여행기다. 1권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편에서는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주로 근세의 태동과 발달을 살펴보고, 2권은 한때 유럽과 서양의 중심이었다가 근세 이후 변방으로 추락한 지중해권 국가와 유럽의 또 다른 변방 동유럽 국가들－그리스 터키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오스트리아－을 훑었다.

‘유럽인물열전’은 여행기 그 자체보다 여행을 준비하는 저자의 자세에서 배울 게 많다. 그는 배낭여행이 주는 무작정의 느낌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비행기표와 유레일 패스, 대강의 목적지만 정해 가방 하나 메고 가는 여행은 1960~70년대 무작정 세일즈 방식과 닮은 구석이 있다. 저자는 이제 여행도 테마가 분명하고 계획이 분명해야 얻는 게 많다고 말한다. 그 자신 여행을 준비하는 데 근 석 달 이상 인터넷을 항해하며 자료를 모으고, 모자란 부분은 여행사에 따로 문의할 만큼 철저하게 준비했다. 100일에 걸친 사전계획, 8개월에 걸친 여행, 그리고 자료정리와 집필까지 꼬박 1년을 바치며 “유럽의 에센스를 보고 싶다”는 열망은 현실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