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나라의 부자 선수들

아프리카 선수들을 동정하지 말라!

2002 한·일 월드컵은 프랑스와 세네갈의 다툼으로 문을 열었다. 한쪽은 세계 챔피언, 다른 한쪽은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42위의 약체. 한쪽은 세련된 문화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백인의 나라, 다른 한쪽은 빈곤에 시달리는 흑인의 나라. 모든 것이 지극히 대조되는 구도였다. 게다가 결정적으로는 왕년의 식민지와 피식민지의 관계라는 점.

어려운 시절을 겪었고, 게다가 식민지 경험이 있는 우리로서는 프랑스의 ‘아트사커’도 보고 싶지만 세네갈에 동정심에 가까운 응원의 심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약자에 대한 응원은 스포츠 세계에서 항용 허락되는 일종의 ‘톨레랑스’(관용)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 무형의 독려가 작용했는지 세네갈은 프랑스를 이겼다.

승전보를 접한 세네갈 국민은 자기들을 지배했던 나라에 대한 승리이기에 기쁨이 더하다고 환호작약했다. 세네갈만이 아닐 것이다. 카메룬이나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과 맞붙을 때는 은근히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백인들의 인종주의나 오만함에 대한 반감에, 흑인이나 아프리카에 대한 ‘상식적’인 이미지, 요컨대 불행한 운명의 소유자라는 상상이 보태져 그랬을 것이다.

한데 가만히 따져보면 뭔가 사태가 달라진다. 아프리카는 그렇다 치고 그 흑인 선수들은 정말 가난하고 불행하며, 그러기에 통속적 스토리의 그것처럼 ‘헝그리 정신’에 충만해 있는 존재들인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상식적인 이미지를 좇아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한국의 보통 사람들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많은 돈이 그들 주머니에서 넘쳐난다. 그들 대부분은 유럽 축구클럽에서 선수생활을 한다. 그들이 받는 연봉은 쉽게 억 단위를 넘어선다. 이때부터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와 그 국가를 대표해 뛰고 있는 선수들의 실제 모습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한국의 중산층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기실 월드컵이 국가 대항전이라는 의미는 상당히 약화된다. 월드컵 출전 선수들의 대다수가 유럽 리그에서 뛰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정체성은 각국의 국가대표보다 유럽 리그의 선수에 더 가깝다. 그러기에 뭉칫돈이 돌아다니는 유럽 축구계에서 돈맛을 듬뿍 본 그들에게 국가대표라는 정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때문에 월드컵 출전 선수들에게 ‘민족의 영광’이라는 휘광을 덮어주려는 것은 각국 국민의 ‘소망’이지, 정작 선수들은 그런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것보다 오히려 월드컵을 통해 자신의 경매 가격이 올라가기를 더 원하는 것이다. 또 실제 선수들에게 국가의 구속력은 별로 강하지 못하다.

포르투갈의 주앙 핀투는 한국전에서 퇴장당했다. 따라서 다음 국가대항전의 첫 게임에는 출전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 선수의 활동에 지장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여전히 유럽 리그에서 아무 문제 없이 돈을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을 맡은 후 그들에게 감동했다고 한다. 자신이 국가를 대표한다는 데 높은 자긍심을 갖고 헌신의 노력을 보이는 선수들의 태도가 낯설기도 하거니와, 유럽의 축구 관계자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순진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월드컵은 지구 전체 규모의 국가대항전이라기보다 유럽 선수들의 경연장으로 평가되어야 할지 모른다. 상황이 그렇게 되면 월드컵에 국적이나 국가 등의 기호는 그다지 필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월드컵이 만약 점점 국가주의에 오염돼 간다면 오히려 이런 사태가 더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은 많은 경우 예의 선수들의 타산성과 영악함을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축구에 민족과 국가의 갑옷을 입히는 것보다 그런 것이 더 낫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래저래 월드컵은 복잡한 카니발이다.

일본 언론 FIFA 문제점 연일 보도

‘축구정치’에서도 중심 되고픈 욕망 반영

벨기에의 결선 토너먼트 진출에 대한 감회는 남다르다. 아시아의 저주로부터 풀려나왔기 때문이다. 벨기에는 작은 나라지만 유럽에서는 상위권에 속하는 축구강국. 그런데 이 강국이 아시아와는 악연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조 예선 마지막 경기. 가장 약한 팀으로 평가되던 한국과 일전을 앞둔 벨기에는 같은 조의 네덜란드나 멕시코보다 수월하게 결선 토너먼트에 올라가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한국의 올무에 걸려 동반 탈락. 아시아팀에 봉욕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94년 미국 월드컵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에 패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개최국 일본과 한 조. ‘아시아 콤플렉스’에 빠진 그들로서는 영 기분 좋지 않은 조 편성이었다. 결과는 무승부. 분명히 실력은 모두 한 수 아래인 아시아팀인데 막상 만나면 도무지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사히 조별 예선을 통과함으로써 아시아 축구에 대한 무력감에서 일단 벗어날 수 있었다.

벨기에와 함께 일본이 조 1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하자 일본열도는 가히 혼절상태에 빠져들었다. ‘1억인이 취했다’는 스포츠신문의 헤드라인처럼 일본인들은 거의 만취상태에 이르렀다. 사실 월드컵이 시작되고 나서도 일본은 여전히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의 선전은 잠자고 있던 그들 특유의 집단적 흥분 유전인자를 깨웠다. 그로부터 일본열도는 흥분의 가열상태로 돌입했다. 때문인지 도쿄의 시부야나 오사카의 도톰보리 주변은 흥분을 이기지 못한 ‘일본식 훌리건’(사실 그들을 훌리건으로 부르면 원단 훌리건들이 명예훼손 소송을 걸지 모르지만)들에 의해 잠시 점령되었다. 비록 6명이 연행되기는 했지만.

같은 날, 같은 상황이 도쿄 번화가 신주쿠 근처에서 벌어졌다. 한국-포르투갈전을 앞두고 도쿄에서는 ‘신주쿠 아부나이’(신주쿠는 위험하다)라는 경보가 내려졌다. 한국이 이기든 지든 한국인 거리가 있는 신주쿠 바로 옆의 쇼칸도리는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경기가 가까워지자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다소 흥분된 상태로 이 거리에 모여들었고, 그에 대응해 도로 한쪽에는 경찰 버스 3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도 잘 보지 못하던 풍경이 난데없이 도쿄 한복판에서 재현된 것이다. 경기가 끝나자 예상대로 이 도로는 한국인들로 뒤덮였고, 일본 경찰은 그 상황을 그냥 놓아두는 선에서 타협하는 듯했다. 한국과 일본의 만취상태는 오래갈 것 같다.

이번 대회를 통해 나날이 적나라해지는 FIFA의 문제점은 관심의 사정권에서 얼마간 비켜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신문들은 FIFA의 문제점을 연일 보도한다. 일본이 FIFA에 강한 대응을 못하는 것은 정치력 부재 때문이라는 진단하에 한국의 사례를 든다. 한국은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의 나라여서 FIFA의 문제에 강력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들려오는 풍문과 보도는 오히려 그 반대다. 일본 언론이 부회장 나라 운운하는 것은 아마 16강 진출만이 아니라 축구정치에도 일본이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심의 표현일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와 별개로 FIFA의 횡포에 별다른 대응을 못하고 있다는, 혹은 한국의 주류 언론들은 그런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는 등의 소식은 자꾸 세계 축구의 앞날을 걱정하게 만든다. FIFA의 문제 인물들은 이미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찜 쪄먹을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FIFA를 계속 농단하는 한, 이미 시작된 축구의 ‘연예화’는 더욱 가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