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응원 열기

한국 입국 거부당한 재일교포도 한국 응원

일본과 벨기에전이 열리던 날, 일본 사학의 명문 와세다대학에서는 일종의 대규모 동원 사태가 벌어졌다. 대규모 동원이라면 일본 사람들에게 낯익은 것이다. 과거 군국주의 시절 일본은 국민 총동원령, 총력전 체제를 국가 운영의 근간으로 삼았고, 국민을 그런 식의 체제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세대에게 그런 이야기는 외계의 전설일 뿐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요즘 대학생들에게 ‘동원 명령’이 시달된 것이다. 교내 곳곳에는 동원을 고지하고 독려하는 포스터가 붙었다. 거기에는 포효하는 ‘사나이’의 얼굴과 ‘겁먹은 자들은 다 가라’는 선동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이미지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베트남전 당시 인상 쓰고 있는 ‘샘 아저씨’가 포스터 보는 사람을 가리키며, ‘조국이 널 부른다’는 식으로 형상화한 포스터와 흡사한 구도다. 그리고 그 글자 밑에는 ‘6월4일 벨기에전. 장소: 오오쿠마 강당’이라고 쓰여 있다.

오오쿠마 강당은 와세다대학 창설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강당이다. 서양식과 일본식이 절충된 이 건물은 일본 근대화 초기, 서양에 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젊은 세대를 향한 당대 일본 식자들의 피 어린 권고를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구조물이다. 서양 학문을 배워 그것을 뛰어넘으라는 간청이 이 건물의 유구함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한데 난데없이 이 강당이 축구 관람석으로 변했다. 강당 앞의 광장에는 많은 학생들이 경기 시작 전부터 모여들어 분위기를 돋우었고, 입장이 시작되자마자 금세 자리가 채워진다. 700여명을 순식간에 빨아들인 이 강당은 그때부터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준 훌리건’의 난무장으로 돌변했다. 학문으로 서양을 넘으라는 것이 창설자의 유훈이었지만, 와세다대학 학생들에게는 서양(벨기에)을 이기는 게 중요할 뿐, 그것이 학문이든 축구든 별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본-벨기에전의 열풍이 일본열도를 한 번 쓸고 지나가자, 이제 한국 차례가 되었다. 신주쿠, 쇼칸도리, 신오쿠보 등은 도쿄의 ‘리틀 코리아’라 불리는 곳이다. 수많은 한국 관련 가게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이날 밤이 깊어지기 시작하자, ‘대사관’이라는 상호를 단 음식점 주변에 한국인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어떻게 준비했는지 풍물소리가 분위기를 달구어 나갔다. 이 음식점에서는 한국-폴란드전에 대비해 주차장에 임시 식당과 관객석을 차린 것이다. 종이박스로 상을 만들어 바닥에 놓고, 벽에는 큰 스크린을 쳤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유학생, 재일교포, 현지 주재원 등이 와서 한데 뭉쳤다. 빨간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은 풍물을 열심히 쳐댄다. 재일교포와 유학생들로 구성된 ‘시나위’라는 모임이다.

특히 재일교포 학생은 자신의 국적이 한국이 아니어서 한국 입국을 거부당하는, 요컨대 문전박대를 받으면서도 한국을 열심히 응원한다. 한 학생은 자신의 국적은 기타조센(북조선)도 아니고 대한민국도 아니라 ‘조선’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는 단순한 민족 동일성에 대한 감상적 강조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국적법을 따지면 그렇다면 것이다. 그는 전공이 법학이라고 한다.

흥미롭게 파란색 일본대표 유니폼을 입은 일본 서포터들도 여기저기 심심찮게 끼여 있다. 일본-벨기에전이 끝나자 여기로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하는 말, “한국과 일본이 함께 16강에 올라갑시다.” 외교적인 수사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그들의 진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한국 방송국의 카메라가 포즈를 부탁하자 그들은 선선히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을 연호하고 손뼉을 친다.

이날 이 식당은 대목을 맞았다. ‘기획의 승리(!)’였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이 음식점은 도쿄의 한국인 사회에서 순식간에 대중화되었다. 그리고 이날 올린 매상은 손가락이 마비되어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음직하다.

‘TV신기술’이 월드컵 업그레이드

초대형 TV가 ‘거리응원’ 만들었다

다방 문에는 ‘오늘 7시 축구 우주중계’ 라고 쓰여진 도화지가 붙어 있다. 다방 안을 들어가자 담뱃불에 구멍난 낡은 의자들은 모두 17인치 흑백TV를 향해 도열해 있다. 마치 소극장처럼 배치된 것이다. 주방에는 평소보다 많은 커피잔과 계란 등이 쌓여 있고, 여느날보다 분주했다. 중계시간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다방 안 분위기는 팽팽히 긴장되기 시작한다.

우주중계? 흑백TV? 물론 지금은 볼 수 없는 70년대 풍정이다. 이때나 그때나 축구는 한국인의 피돌기를 평소보다 더 빠르게 하는 가속제였다. 월드컵 예선이나 올림픽 예선 최종전 등이 있으면, 다방은 때아닌 대목을 만나게 된다. 어떤 때는 심지어 살기까지 치솟는다. 경기가 안 풀릴 경우에는 우리 선수들, 가령 박이천이나 김정남 혹은 정규풍 등은 다방 안 관객들에게 수십번은 죽었다 부활한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하이 소프라노에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그에 맞춰 커피잔은 몇 개씩 깨어지게 마련이었다.

6월6일 프랑스는 절체절명의 승부에서 우루과이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챔피언 디펜스’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절망감과 피로감에 휩싸인 드사이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되었다. 클로즈업, 다시 말해 접사 촬영은 보는 이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를 좁혀놓아 피사체에 대한 동정이나 동일화의 정서를 강하게 만들어놓는 촬영법이다. 한국의 개고기 문화에 주야장창 시비를 거는 브리지트 바르도에 대한 악감정을 가진 한국 시청자라 해도 클로즈업된 드사이의 그 절망스러운 표정을 정녕 모른 척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바로 그 장면을 한국의 거의 반대편에 있는 파리의 시청 앞에 모인 수많은 군중이 보고 있었다. 비행기로 10시간 넘게 걸리는 한국에서 벌어진 경기가 파리 군중의 코앞까지 당겨진 것이다. 때문인지 수많은 파리 군중은 자신들이 경기가 끝난 경기장의 관중석에 앉아 있는 듯, 너무나 생생한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 선수들의 절망감을 함께 나누는 중이었다. 사람이 모이면 몸의 온도만 상승하는 게 아니다. 감정과 심리의 온도도 상승한다. 집에서 보았으면 조금 덜했을 프랑스인들의 그 절망감과 슬픔이 군중과 함께 있으니 더욱 상승하는 것이다. 사우나에 들어가면 모두가 공평하게 체온이 올라가듯. 그 시청 앞에 모인 수많은 군중, 그들은 이전 같으면 제각각 떨어져 집에서나 TV 시청을 하던 사람들이다.

지난 6월4일 일본-벨기에전이 벌어진 경기장은 사이타마 스타디움만이 아니었다. 사이타마에 모인 6만7000명의 관중에 버금가게 도쿄의 국립경기장에는 5만명의 관중이 같은 시각에 운집했다. 초대형 화면이 5만명의 사람을 모이게 했다. 5만명이 모여 경기를 볼 때와 5명이 모여 볼 때의 분위기는 당연히 다르다. 애당초 열광하기로 ‘작정’하고 경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그런 수만의 무리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몸을 한창 데우는 한증탕이다. 일본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일본 전 열도에서 마을의 문화센터 등 사람들이 모여 경기를 볼 수 있는 시설들을 손 빠르게 설치한다.

일본만이 아니라 광화문이나 파리의 시청 앞, 런던 곳곳에서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어 거대한 화면 앞에 선다. 사람들의 집중은 곧 분위기의 상승을 이끌어내게 마련이다. 월드컵에 대한 유례없는 이런 집중을 성공하게 한 공로자는 결국 디지털 기술로 대변되는 신기술이다.

월드컵이 오늘날처럼 전 세계인을 한몫에 결박할 수 있었던 까닭은 TV 기술에서 왔다. 70년 멕시코 올림픽 때부터 위성중계가 가능해지자, 월드컵은 세계인들을 단박에 동시간대의 동일한 장소에 모이게 하는, 그런 집중의 동일한 경험을 만들어냈다.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의 얼굴 표정과 흘리는 땀방울까지 화면에 나타나자, 시공간의 거리감과 상관없이 40억 지구인들은 그 화면에 한몫으로 묶이게 된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은 한 단계 더 진화한 월드컵이 되었다. 신기술, 뉴미디어의 발달로 해상도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 거대 화면의 등장, 실시간 관전기와 토론, 정보의 흐름이 수시로 왕복하는 인터넷의 일상화 등은 월드컵에 대한 집중도를 이전보다 몇 단계는 더 상승시켰다. 다음 월드컵에서는 모르긴 해도 경기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직접 들어가서 보는 것 같은, 혹은 선수들과 같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나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