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베컴에 열광하는 이유

외모·실력 갖춘 데다 일본의 ‘유럽 동경심’ 작용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견인했던 소크라테스는 의대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그의 얼굴을 보면, 의사보다는 사유 깊은 철학자의 인상이 더 강했다. 이건 절대 그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선입견 때문이 아니다. 그의 음영 깊은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주억거릴 것이라 믿는다.

작년까지 박찬호가 활동하던 LA다저스의 에이스는 케빈 브라운이었다. 그를 가리켜 철마라 했다. 그 별명을 풀어 쓰면 쇠로 만든 말이 되는 셈이니, 이는 그의 완투능력과 놀라운 체력을 두고 한 말인 셈이었다. 종목을 축구로 돌려 그 철마를 찾으면 우리는 66년 우승팀 잉글랜드의 보비 찰튼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그라운드의 노동자로, 또 때로는 달리는 기관차로 불리던 보비 찰튼은 경기 내내 폭주 기관차처럼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는 선수였다. 그의 외모 역시 어깻살 탄탄한 기차의 화부를 닮아 있었다.

이처럼 특정한 이미지가 강하게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는 요인이 된다. 이번 월드컵에서 그런 강한 이미지를 지닌 선수를 찾는다면 누구보다 먼저 베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델 이미지도 철학자, 기관차 등에 못지않게 그에 대해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까닭이다. 보비 찰튼이 자신의 후계자라고 말할 만큼 강력한 체력의 소유자인 그는, 그러나 그보다 말끔한 꽃미남의 이미지로 더 부각된다.

베컴이 일본열도에 들어올 때부터 일본 대중매체의 초점은 온통 그에게 집중되었다. 연습 장면이 공개되지 않자 헬리콥터까지 띄워 구보를 하고 있는 베컴의 예의 부상한 왼발을 렌즈에 담았다. 이런 열광은 이해할 만하다. 현대의 ‘스타 시스템’ 논리에서 보면 베컴은 완벽한 대중적 스타다. 잡지 모델까지 하는 수려한 용모, 강인한 체력, 그리고 축구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의 일희일비를 주도하는 주인공이며, 게다가 백인이다.

이야기가 이쯤 오면 일본인들이 유독 베컴에 열광하는 이유가 따로 있음을 말해야 한다. 축구 기량으로만 치면 브라질의 히바우두나 호나우두가 한 수 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호나우두를 좋아하는 것과 베컴을 좋아하는 것은 한참 다른 맥락이다. 그들은 우선 서양인이 아니다.

베컴에 대한 열광은 유럽에 대한 일본의 뿌리 깊은 동경심과 기원에서 비롯된다. 그 동경심의 목록에는 하얀 피부, 세련된 귀족문화, 우월한 인종성 등의 이미지가 인각된다. 베컴은 잘생겼고 앵글로색슨이며 공을 잘 찬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대 일본이 그렇게 복제하려고 애쓴, 다시 말해 일본 근대문화의 한 원형을 이루는 영국 문화의 적자인 것이다. 이만하면 일본인들이 그에게 빠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가. 그러니 베컴을 좋아하는 일이 호나우두나 프랑스의 ‘유색인’ 트레제거를 좋아하는 일과 얼마나 다른 차원인지 쉽게 설명된다.

베컴이 완쾌되어 평소 기량을 보여줄 수 있을지 여부가 계속 일본 월드컵의 이슈가 되었지만, 그는 스웨덴전에서 칼날같이 날카로운 코너킥을 날려 득점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다시 한번 일본팬들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그런 활약과 상관없이 그는 그에게 감동하고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일본 문화의 축복을 이미 넘칠 만큼 받고 있는 중이다.

바티스투타, 득점왕 오를까

월드컵 최다 골 신기록에 ‘-5’

바티스투타가 대 나이지리아전에서 골을 넣으면서 월드컵에서의 열 번째 골을 기록했다. 나이지리아전부터 바티스투타는 이번 월드컵 득점왕 후보에 회자되면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카메라의 초점이 되었다. 월드컵 개막 전 J리그 챔피언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연습경기에서 4골을 몰아넣자 그 기대감은 더욱 부풀어올랐다.

그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락없이 예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의 행실이 예수 같다는 게 아니라, 그의 얼굴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얼굴 초상화와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지만 그는 그라운드에서 예수는커녕 거의 폭력배에 가깝다. 이 역시 그가 완력을 휘둘러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그의 플레이가 지닌 파괴력이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월드컵이 개막되기 전 바티스투타에 대한 팬들의 태도는 기대 반 의심 반이었다. 켐페스, 마라도나, 카니자 등 아르헨티나의 골잡이 계보를 잇는 적자이기는 했지만, 올해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겨우 6골밖에 못 넣은 처지이다 보니 그에 대한 이전의 전폭적인 기대는 상당부분 유예된 실정이었다. 더구나 새로운 기라성으로 크레포스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전에서의 한 골로 그런 모든 우려와 동요를 진압했다.

이날 그는 그라운드의 터미네이터 같았다. 상대편 페널티 에어리어를 파헤치고 질주하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발이면 발 머리면 머리, 그의 몸을 닿으면서 동선을 바꾸는 볼은 날카로운 직진성 운동물체가 되어 나이지리아 골문을 파고들었다. 그가 18분에 넣은 골은 특히 미려하고 난이도가 높았다. 베론이 코너킥 한 볼이 날아오자 그는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자랑하는 득의의 에어점프처럼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허공에 뜬 상태에서 허리축을 뒤로 젖힌 채 이마로 되받아치는 미기를 보여준 것이다. 이 골로서 월드컵 출전 통산 10골을 기록한 그는 새로운 기록을 앞두게 되었다. 게르만 폭격기 게르트 뮐러가 기록한 통산 최다 14골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것이다,

이런 페이스라면 그는 득점왕(공식 명칭으로는 ‘골든 슈’)에 오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지난 몇 대회까지의 일종의 징크스, 다시 말해 6골만 넘으면 득점왕이 되는 징크스를 반복만 해도 그는 월드컵 사상 최다골을 넣은 선수로 기록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득점왕에 관한 한 묘한 기록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크로아티아의 다보르 수케르 6골. 94년 미국 월드컵, 러시아의 살렌코, 불가리아의 스토이치코프 6골.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탈리아의 스킬라치 6골. 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의 리네커 6골. 82년 스페인 월드컵, 이탈리아의 파올로 로시 6골.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마리오 켐페스 6골.

요컨대 78년부터 98년까지 일곱 번의 월드컵이 치러지는 동안 득점왕은 모두 6골의 고지를 넘어서 본 적이 없다.

이번 월드컵의 관심거리 중 하나가 6골을 넘느냐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득점왕 후보로는 바티스투타를 비롯해 브라질의 호나우두, 스페인의 라울, 이탈리아의 토티 등이 꼽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상이다. 지난 대회까지의 득점왕 중 애초의 예상에 적중한 인물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한데 득점왕 기록을 깰 주인공은 일견 예의 유망주보다 ‘피버노바’일 가능성이 높다. 피버노바는 이번 대회 공식구의 이름. 신택틱 폼(syntactic foam)이라는 신소재로 만든 이 볼은 이전의 대회 공식구보다 탄력성이 더욱 좋아졌다. 탄력성이 좋다 보니 볼 끝이 살아 움직이는, 야구로 치면 ‘무브먼트’(운동성)가 좋아지는 것이다. 운동성 좋은 볼이 타자를 곤혹스럽게 하듯, 이 피버노바의 운동성은 골키퍼를 공포에 빠지게 한다. 미국 메이저리그 콜로라도 로키스 홈구장의 낮은 기압이 수시로 승패를 갈라놓는 주인공이 되듯, 이번 대회의 득점왕의 요인은 피버노바라는 축구공이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궁합이 잘 맞아야 일이 제대로 되듯, 결국 이 신소재 볼과 자기 발끝이 잘 맞는 선수가 ‘골든 슈’를 신게 됨은 당연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