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봄은 아직도 멀었다”

20개 넘는 군벌 저마다 검문소 설치하고 통행세에 구호식량도 빼앗아 … ‘무력의 일상화’로 종족갈등·굶주림 해결 ‘머나먼 길’

공습으로 파괴된 탈레반 대공포진지 앞에 선 필자.

<< 23년 내전을 거친 아프간에 봄은 올 것인가. 포화는 멎었지만 치안과 민심 모두 불안정한 상태다. 척박한 아프간에 법질서가 뿌리내리려면 한두 해론 어림없을 듯하다. 가난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도 간단치 않다.
뿌리 깊은 종족갈등도 아프간 평화의 복병. 언제든 또 다른 내전으로 번질 수 있다.
현지취재를 통해 아프간의 내일을 점검했다. >>

유엔 비행기로 이슬라마바드를 출발,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65km 떨어진 바그람 공항에 내렸을 때 받은 첫 느낌은 스산함이었다. 갈색 잡풀 투성이인 황량한 들판에 세워진 바그람 공항은 본래 옛 소련군 비행장. 군사공항이라 대합실조차 없다. 출입국 관리를 맡은 북부동맹 요원들이 총을 멘 채 활주로에 쭈그리고 앉아 여권에 도장을 찍어준다. 입국비자는 외무부에서 따로 받아야 했다. ‘선 입국, 후 비자 취득’이란 기묘한 절차.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뒤 대외창구 노릇을 해온 파키스탄 주재 아프간대사관이 문을 닫은 탓이다.

아프간의 관문 카불국제공항은 그동안 탈레반에 대한 유엔의 제재조치로 문을 닫았다가 지난해 10월 미국의 공습을 받았다. 11월 중순 카불이 함락된 뒤로도 폭탄 및 지뢰제거 작업으로 문을 열지 못했다. 외부 방문객들은 바그람 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1시간 반을 달려야 카불에 닿는다.

군벌들 지역별 세력 형성 … 국군 편성 시급

바그람 공항을 경비중인 미 특수부대원

아프간은 오랜 내전을 겪으며 ‘힘이 곧 법’인 나라가 됐다. 아프간으로 떠나기 앞서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만난 세계식량프로그램(WFP)의 실무자 조르단 데이. 그는 “기아에 굶주리는 아프간인들에게 줄 식량이 트럭째 지방군벌에 빼앗기거나 창고마저 습격당해 식량이 제대로 배급되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북부동맹 지역사령관들이 사병(私兵)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전리품’처럼 식량을 나눠주고, 그 식량이 다시 시장으로 흘러들어 현금화된다는 것.

아프간 곳곳엔 여러 파벌이 무장세력을 거느리고 소왕국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파키스탄 국경에서 카불로 통하는 교통요지인 잘랄라바드에선 알리 장군이 거느리는 일단의 무장군인들이 위세를 부린다. 그들은 도로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지나가는 차량을 세워 금품을 갈취한다. 특히 외국기자들을 겨냥해 통행세를 뜯는 것으로 악명 높다. 1인당 100달러, 적어도 50달러쯤 건네지 않으면 이런저런 시비를 걸어 앞길을 막기 일쑤다. 문제는 이런 검문소가 한둘이 아니란 점. 카불에서 만난 한 기자는 “돈을 주지 않자 타이어에 총을 쏴 펑크를 내려 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프간은 지역별ㆍ종족별로 사실상 쪼개진 나라다. 카불대학 아지즈 아흐메드 라흐만드 교수(역사학)는 “파키스탄 국경도시 케타에서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에 이르는 도로엔 무려 20개가 넘는 세력이 저마다 검문소를 설치해 놓고 통행세를 뜯는 상황”이라고 전한다. 때문에 치안유지, 종족화합, 경제회복의 3대 과제를 안고 출발한 하미드 카르자이의 과도정부가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아프간 국군 편성이다. 아프간 국방부는 모병위원회를 설치, 다양한 인종과 지역을 바탕으로 25만명 규모의 아프간군을 편성할 계획이다.

그러나 지방군벌의 무장병력들을 아프간 국군으로 재편성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은 일이다. 지방에선 여전히 군벌들이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장 강력한 군벌은 북부의 마자르 이 샤리프를 근거지로 한 압둘 라시드 도스툼 장군(타지크계)이다. 과도정부 국방차관 직함을 지닌 도스툼의 말 한마디는 자신의 근거지에선 법이나 다름없다. 이스마일 칸은 헤라트를 비롯한 아프간 서부 5개 주를, 아프간 남부에선 굴 아그하, 동부에선 압둘 카디르가 각기 독자세력권을 이룬다. 일단 카불을 벗어나면 중앙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도정부 라헨 마크흐둠 문화공보부 장관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지방군벌들이 기득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한 아프간군 재편성은 쉽지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군벌들을 제압하려면 국제사회의 권위, 구체적으론 미군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분석도 그래서 나온다. “군대 재편성과 관련해 최악의 경우 또 다른 내전이 일어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고 마크흐둠 장관은 토를 달았지만, 전쟁은 군벌들에게 익숙한 ‘해법’이다. 이미 곳곳에서 소규모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차라카르에서 만난 북부동맹 병사들.

지난해 11월 탈레반이 카불에서 물러난 직후 카불은 한때 권력의 진공상태에 빠졌었다. 로켓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북부동맹 병사들은 카불 거리를 활보하며 예전 버릇대로 약탈을 일삼았다. 현재 카불 시내엔 영국이 주도하는 다국적 보안지원군(ISAF)이 아프간 경찰을 보조원 삼아 수시로 순찰을 돈다. 그러나 3000명의 과도정부 경찰은 마크흐둠 장관의 말대로 “숫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말이 경찰이지 교통정리를 하는 수준”이다. ISAF의 배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1월 말까지 4500명의 ISAF군이 배치됐지만, 워낙 적어 카불의 치안공백을 메우기엔 한계가 있다. 더구나 ISAF는 아프간 과도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활동지역이 카불로 제한돼 있다. 북부동맹 주도세력 입장에서 ISAF는 반갑지 않은 손님. 그래서 북부동맹과 ISAF 간엔 신경전이 날카롭다.

시장엔 각종 무기 나돌아 … 권총 한 자루에 50달러

아프간에선 법보다 총이 가깝다. 카불의 시장에서 총을, 그것도 헐값에 사들이는 건 일도 아니다. 탈레반 세력이 카불에서 물러난 뒤 석 달 가까운 동안 강도, 차량절도, 강간 등 강력사건이 탈레반 시절보다 훨씬 늘어났다. 카불대학 모하마드 아크람 무크히르 교수(사회학)는 “탈레반의 엄격한 통제가 갑자기 사라진 다음 중앙권력의 일시 공백과 북부동맹군의 도덕적 해이 등으로 탈레반 시절 한동안 잠잠했던 범죄들이 다시 기승을 부린다”고 지적한다.

카불 시내 암시장에서 공공연히 거래되는 총기.

카불의 시장엔 권총과 AK-47소총은 물론 로켓추진 총류탄, 기관총까지 거래된다. 값도 비싸지 않다. AK-47 한정은 50달러에서 100달러. 돈만 있으면 어떤 무기든 구입할 수 있다. 필자가 아프간인 통역을 세워 흥정을 시작하자 한 상인이 막판에 부른 값은 권총 50달러, AK-47은 30달러였다. 총기거래는 불법이지만 단속은 못 미치는 형편이다. 카르자이 수반이 취임 후 첫 TV 연설에서 “아프간의 평화와 안녕을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는 길거리에 널린 총기류”라며 총기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오는 6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아프간을 통치하는 카르자이 과도정부의 어깨는 무겁다. 사회 인프라 건설과 주택재건 사업이 가장 긴급하다. 마크흐둠 장관은 “전체 예산의 절반은 난민 송환과 정착, 교육, 주택재건 등 공공부문에 집중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한다. 전 카불대 정치학과 교수로 문교부 장관인 라술 아민은 “파괴된 학교를 새로 짓는 것도 급한데 문제는 재원”이라며 걱정한다. 결국 과도정권이 믿고 기댈 곳은 국제사회의 원조뿐이다.

재건비용 태부족 … 유일한 희망은 국제원조뿐

카불대 타지 모하메드 아크바르 교수(55ㆍ경제학)는 “일부 서방 전문가들은 아프간 재건비용으로 향후 10년간 150억 달러를 투입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의 액수일 뿐 실제론 훨씬 많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제사회는 아프간인들의 이런 기대치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다. 1월21∼22일 도쿄에서 열린 아프간 지원 국제회의는 아프간에 45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앞으로 5년간의 재건비로 계상한 100억 달러엔 턱없이 모자랐다. 탈레반 정권 말기부터 아프간 공무원들의 월급은 6개월째 밀려 있다. 카불 중앙은행 금고가 텅 비어 지급능력이 떨어진 것.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미군 공습이 시작된 뒤 탈레반 정권의 몰락을 내다본 최고 지도자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43)가 다 챙겨갔기 때문이다. 마크흐둠 장관은 필자에게 “오마르가 1억 달러의 돈을 갖고 도망중인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카불 사람들 사이에선 피신중인 오마르에겐 돈자루들이 큰 짐이 될 것이란 말까지 나돈다. 과도정부는 오마르가 체포될 경우 미국에 넘긴다는 입장이다.

아프간 과도정부 청사들은 한국의 읍ㆍ면 사무소만도 못한 낡은 건물. 책상ㆍ의자 등 집기는 몇 십년이 됐을 법한 것들이다. 장관 집무실조차 컴퓨터 한 대 없다. 바닥에 깔린 낡은 카펫엔 구멍이 나 있다. 그나마 압둘라 외무장관이 근무하는 외무부 청사는 보기엔 번듯하지만 화장실엔 변기 뚜껑이 날아간 상태다.

아프간에 세계 각국의 재건자금이 제대로 들어올지, 또 들어온다 해도 민생이 나아질지는 의문이다. 카불대 아크바르 아키브 교수(행정학)는 “행정경험이 없는 과도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행정의 투명성이 약하다는 점이 국제사회가 현금을 건네는 걸 주저하게 하는 한 요인”이라 지적한다.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가 관리를 맡는다 해도 소비주체는 어차피 아프간 행정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다르고 속셈이야 각자 있겠지만, 어쨌든 국제사회는 아프간을 돕기로 약속했다. 아프간의 때늦은 봄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