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석 게이트’냐 단순 도박죄냐

골프장 인수 사업 확장 잇단 무리수 … ‘여론 악화’ 사정 당국 경고 무시하다 구속 수감

중앙 일간지 경제부 P기자의 경험담 한 토막. 현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8년 중반 무렵의 일이다. 평소 안면이 있던 박순석 신안그룹 회장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인터뷰나 한번 하자”고 제의했다. 평소 언론 인터뷰를 기피하는 것으로 유명한 중견 그룹 오너가 직접 그런 제안을 하자 P기자는 솔깃해졌다. 잔뜩 기대하고 박회장과 마주앉은 P기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박회장의 얘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P기자, 신안그룹이 부도날 것 같다는 기사 한번 써주면 안 되겠소?”

“….”

기업인들이 언론을 접촉할 경우 자사에 불리한 기사는 빼달라고 부탁하게 마련이다. 특히 자금문제에 관한 기사는 더욱 그렇다. 특정 회사의 자금난 소문이 돌면 금융기관들이 너도나도 대출금 회수에 나서는 등 자금난 관련 기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룹 오너가 직접 ‘자기 회사가 어렵다’는 내용의 기사를 써달라고 요청하다니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다. P기자는 “무엇 때문에 그런 기사를 부탁하느냐”고 물었다. 망설이던 박회장은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요즘 골치 아픈 일이 많아. 정부 실세들도 전화를 해오고….”

그제서야 P기자는 박회장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신안그룹이 어렵다는 얘기가 퍼져야 정치권의 ‘후원’ 요구가 줄어들 수 있다고 판단한 박회장이 그런 ‘묘안’을 생각해낸 것. 설사 자금난 소문이 난다고 해도 박회장이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런 모험을 해도 문제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후 P기자는 박회장의 ‘주문’을 담은 기사를 출고했다.

맨주먹으로 상경, 돈에 강한 집착

이 일화는 9월26일 상습도박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골프장 재벌’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의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돈에 관한 한 ‘짜기로’ 소문난 박회장의 진면목이 잘 드러난 것. 그의 한 주변 인사는 “그가 전남 신안 비금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 직후 상경, 막노동으로 시작해 철근 도소매업과 주택사업으로 큰돈을 번 탓인지 돈에 대한 집착만 있고 쓸 줄은 몰랐다”고 평가했다.

박순석 회장의 전격 구속 배경을 둘러싸고 여야간 공방이 이는 가운데 여권에서는 억울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들은 과거 야당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고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박순석 회장에게서 큰 도움을 받은 게 없다는 것이다. 사정 당국 관계자들도 “박회장이 구속된 이유는 도박혐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여전히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용호 게이트에 대한 수사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중견 그룹 회장을 전격 구속한 것은 ‘박순석 게이트’로 번지는 것을 사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주장이다. 박회장 자신이 구속 직후 “도박 혐의를 인정할 수 없으며, 터무니없는 짜맞추기 수사” “이용호 사건 때문에 내가 당했다”는 등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해 이런 의혹이 증폭되기도 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한때 박회장 구속 배경을 두고 동교동계 내부 갈등설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최근 ‘마이 웨이’를 선언한 한화갑 최고위원 견제 차원에서 그의 ‘후원자’로 알려진 박회장을 친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파문이 확산되자 한최고위원은 박회장 구속 이후 “정권교체 이후 박회장이 후원금을 가지고 찾아온 적은 있으나 되돌려보냈다”고 해명했다. 박회장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설명이다.

과연 박순석 회장 구속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박순석 게이트’ 꼬리 자르기인가, 아니면 단순한 도박혐의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박회장은 스스로 무덤을 팠다고 보아야 한다. 정권교체 직후 사업 확장 과정에 무리수를 두면서 그에 대한 여론이 악화돼 사정당국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 문제였다는 얘기다.

박회장은 정권교체 이후 잇따라 골프장과 호텔을 준공하거나 인수해 ‘골프장 재벌’로 불렸다. 99년 2월 경기 안성군 뉴안성컨트리클럽을 개장한 데 이어 작년 6월에는 경기 광주군 곤지암그린힐컨트리클럽을 준공, 개장했다. 올 1월에는 과거 대농그룹이 소유했던 관악컨트리클럽을 인수, 리베라로 이름을 고쳤다. 2003년 개장 예정으로 제주도에도 골프장 건설 공사를 하고 있다.

알려진 대로 그의 구속은 상습도박이 직접적인 발단이었다. 그는 주로 자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하청업자들과 내기 골프를 해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딴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한 주변 인사는 “내기 골프에 응하지 않으려고 하면 사업에 불리한 것처럼 얘기해 울며 겨자 먹기로 내기 골프에 참여하게 한다”면서 “이들을 상대로 자기 골프장에서 돈을 따놓고도 그들에게 캐디피와 그린피까지 똑같이 분담시키곤 했다”고 말했다.

‘비신사적’ 골프 매너가 그의 구속의 직접적 이유라면 원인(遠因)은 사업 확장 과정에서 저지른 무리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 1월 관악컨트리클럽 인수 이후 기존 회원들의 반발을 많이 샀다. 일부 회원들 사이에서는 “박회장이 이들에게서 받은 입회금으로 골프장을 거저 인수하려고 하는 등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아무런 탈이 없는 것은 박회장 뒤에 막강한 실세가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소문은 사정당국에도 입수되었다.

박회장 스스로 판 무덤

관악컨트리클럽 기존 회원들 가운데는 우리 사회의 여론 주도층이 적지 않다. 이들 사이에 정권과 관련한 루머가 나돈다는 것은 대단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때문에 사정당국 관계자들은 작년 말 이후 박회장에게 몇 차례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박회장이 이를 무시하자 여권 입장에서는 과거 빚진 것도 없는 박회장 때문에 ‘덤터기’를 쓸 필요는 없다고 판단, 언제든 걸 수 있는 내기 골프를 문제 삼아 전격 구속했다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이렇게 보면 박회장이 신안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의 내기 골프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앞서의 사정당국 관계자도 “박회장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그럼에도 일부에서 박회장의 더 큰 문제를 덮기 위해 그를 구속했다고 말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억울해했다.

박회장 주변 인사는 “그가 정말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를 ‘변호해 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향 사람들 사이에서 별 인심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와 동향인 모 부장검사도 “서울로 올라온 고향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만나지 않은 사람이 박순석 회장이다”고 얘기할 정도라는 것.

박회장 주변 인사들은 박회장이 인맥 관리도 지나치게 속보이게 했다고 말한다. 현 정권에서 장관을 역임한 모 인사와의 관계가 대표적 케이스. 박회장은 이 인사가 YS 정권에서 공직에 있을 때 그의 동생을 계열사 사장으로 영입했으나 그가 공직을 떠나자 가차없이 내보내 이 인사를 민망하게 했다는 것. 그러나 DJ 집권 후 이 인사가 장관으로 화려하게 컴백하자 다시 ‘줄’을 대느라 법석을 떤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