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결정, 준비하는 ‘문화답사’

맞벌이 부부에게 가장 큰 고민은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안타까움을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거나 물질로 보상할 때가 많다. 같은 건축분야에서 일하는 최성호(46, 산솔건축설계사무소 소장), 김정선씨(42, CROSS구조연구소 소장) 부부도 여느 맞벌이 부부처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아이들에게 부모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가능한한 시간을 내려고 노력한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주중 출퇴근 길과 주말. 아침이면 여의도(아내 사무실), 신촌(아이들 학교), 반포(남편 사무실)로 각각 가야 하기 때문에 최씨네 가족은 아침 6시면 일어난다. 6시40분 온 가족이 한 차에 타고 출발해, 아내 김씨는 신촌역에서 내리고 아이들은 학교 가까이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갔다가 등교한다. 그리고 최씨는 자신의 사무실로 향한다. 퇴근은 반대로 아이들, 아내 순으로 태워서 돌아온다. 50분 가량 걸리는 이 출퇴근 시간에 부부는 아이들의 하루 일과를 듣는다. 그리고 주말에는 답사여행을 떠나거나 집으로 손님을 초대해 함께 지낸다. 문화유적답사는 김씨가 격주로 쉬는 토요일에 이루어지고 손님 초대는 출근하는 주말에 한다.

이들 가족은 89년부터 답사여행을 시작했다. 올해로 13년째 접어들다 보니 우리 나라 대표적인 유적지 중 안 가본 곳이 없다. 뿐만 아니라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지방의 향토문화재까지 속속들이 돌아보았다. 덕분에 딸 현정양(이화부속중 2년)은 옛 궁성이나 주춧돌만 봐도 어느 시대 유물인지 척척 구별하는 수준이다. 여행은 주로 1박2일 일정으로 떠나며 준비는 온 가족이 분담한다. 아버지 최씨는 답사일정과 답사지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고, 어머니 김씨는 여행을 하면서 먹을 음식 장만과 경비 지출에 대한 계획을 짠다. 아이들은 답사에서 돌아온 뒤 촬영한 사진을 슬라이드로 만들어 보관, 정리하는 일을 맡는다. 이렇게 아이들에게도 일을 분담시키는 것은 가족으로서의 소속감과 책임감을 키워주기 위해서다. 최씨는 놀이로 시작한 이 훈련이 훗날 자기 몫의 일을 스스로 찾아 하는 적극적인 사람으로도 키워주리라 믿는다. 이번 여행을 어디로 갈 것인지도 부모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의논한 후 결정한다.

이렇게 모든 걸 함께 참여해서 준비하다 보니 준비 그 자체가 공부일 뿐 아니라 서로의 생각도 알게 되고 취향과 고민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탓에 여행은 모두에게 만족을 준다. 최씨는 아이들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답사여행을 계속할 계획이다. 여행의 목적이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게 해주겠다는 의도보다 이런 문화를 접함으로써 사물을 보는 다양한 안목을 가지게 해주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답사지에 가면 딴청 부리고 흥미 없어 하는 아들 현우 (상서초등학교 3년)를 억지로 붙들지 않고 내버려둔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아들도 돌아와 보면 알건 다 아는 걸 보면 신통하다. 최씨는 문화유적에 대해 억지로 가르치려 하지 말고 일단 자주 유적지를 찾아가라고 조언한다. 그냥 자주 보다 보면 궁금해지고 궁금해서 자료를 뒤적이다 보면 알게 되고, 안목이 생기면 자연히 흥미를 갖게 되는 법이다.

이들 가족이 함께하는 또 하나의 즐거운 시간은 손님을 초대하는 날. 손님초대는 사람을 워낙 좋아한 최씨가 신혼 때부터 밖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집으로 불러들이는 게 습관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밖에서 만나면 경비지출도 만만치 않은데다 오랜 시간 편안하게 얘기도 나눌 수 없고 아이들은 그만큼 아버지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반면 집에서 만나면 아내와 아이들도 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할 수 있다.

물론 이 일은 아내 김씨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6년째 한 달이면 한두 차례씩 손님초대가 이루어지다 보니 사람 수에 맞춰 음식 양도 정확히 차려 나온다. 최씨는 음식의 마지막 단계는 색감내기인데 아내의 솜씨가 거의 이 수준에 달했다며 은근히 칭찬을 했다. 대신 최씨는 집안청소와 빨래 담당이다. 이것은 아내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한다. 이런 잦은 손님초대로 아이들은 어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낯선 사람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졌다. 최씨네 가족은 3년 전부터 축구에 재미를 붙여 요즘은 온 가족이 축구장에 가는 새로운 취미도 만들었다. 올 여름 휴가는 3박4일 일정으로 지리산 문화답사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