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연수보다 값진 해외문화 체험

초등학교 5학년인 딸(박진경)과 4학년인 아들(박우석)을 둔 김숙희씨(38)는 지난해 두 아이를 데리고 한 달 간 미국여행을 했다. 방학 때면 해외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의 자랑에 기가 죽어 있던 딸이 “우리도 한번 가자”며 성화를 부려 어려운 형편에도 용기를 낸 것. 처음에는 아이들만 보낼 요량으로 해외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살펴봤으나 2~3주일에 1인 당 경비가 보통 400만~500만 원이 드는 데다 내용도 별것 없는 것을 보고 김씨는 직접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기회에 아이들과 유대감도 만들고 살아 있는 문화체험을 함께하자는 생각이었다.

여행 기간은 한 달로 잡고 6개월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두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냈다. 그냥 남들이 다니니까 보낸 게 아니라 이번에는 목표가 분명했다. 미국에서 한 달 간 지내려면 기초적인 영어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씨 자신도 선교단체에서 하는 무료강좌를 찾아다니며 기초생활영어를 배웠다. 집에는 커다란 미국지도를 붙여놓고 여행할 곳을 찾아보고 책과 인터넷을 통해 여행지에 대한 사전학습도 했다.

김씨 가족은 호텔여행이 아니라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의 문화체험을 하기 위해 방 하나를 빌려 현지인처럼 살아보기로 했다. 여행지도 렌터카를 빌려 직접 운전하며 찾아보는 쪽으로 정했다. 떠나기 한 달 전부터는 여행에 필요할 물건들을 하나하나 준비했다. 비행기 티켓은 논스톱으로 가는 것보다 3분의 1 정도 값이 싼 일본 경유편을 택했다. 짧지만 아이들에게 일본에서의 하룻밤을 경험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여행에서 돌아온 뒤 아이들이 “일본에도 다녀왔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 하루 늦춰가며 미국에 간 것도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시간에 쫓길 것 없는 여행객에겐 이같은 경유여행은 덤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출발. 비행기 안에서부터 아이들은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우석이가 화장실을 갔다가 ‘vacant’란 단어만 있지 화장실이 없다며 돌아온 것. 그것은 ‘비어 있다’는 뜻이라고 하자 아이는 다시 갔다 또 금세 돌아와 이번엔 ‘occupied’라고 되어 있는데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사람이 있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 아이는 화장실을 자유롭게 이용하였다.

떠나기 전 아이들에게 영어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를 갖게 해주고 싶었던 김씨는 여행지에서 아이들에게 달러를 손에 쥐어 주고 필요한 것은 직접 사도록 했다. 돈을 들고 간 아이들은 다른 사람이 사는 걸 듣고 “Coke please, how much is it ?”하는 것을 배웠다. 한국에서 배운 긴 문장 영어가 아닌 간단한 말로도 통한다는 걸 경험한 아이들은 영어가 쉽다며 무엇이든 스스로 해보려고 했다. 역시 체험만큼 소중한 교육은 없었다.

김씨 가족은 한 달간 LA를 비롯 워싱턴, 뉴욕, 보스턴 등을 돌며 책에서만 본 유명한 곳들을 직접 방문했다. 한 달간 소요경비는 1000만 원. 결코 적잖은 돈이지만 아이들에겐 그만큼 값진 여행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김씨는 여행을 떠나기 전 준비과정부터 돌아올 때까지의 이야기를 ‘아이와 함께 미국여행 31일－발 닿는 곳마다 영어교실’이란 책으로 펴냈다.

해외여행에 대한 김씨의 조언. “먼저 여행의 목적을 확실히 정해라. 영어공부를 목적으로 간다면 경비가 싼 다른 영어권 국가를 택하라. 미국을 아이들의 교육적 목적으로 간다면 서부보다 동부를 택하라. 렌터카로 여행하려면 지도 보는 법과 도로표지판 보는 법을 미리 배워라. 돌아볼 여행지는 반드시 사전에 학습하고 떠나라.”

김씨는 이번 미국여행을 하고 돌아와 아이들에 대한 교육적 방향이 확실히 정해졌다. 그 동안 아이들의 어학연수나 유학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는데 현지에 가본 뒤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확신한다. 아이들만 보내는 연수나 조기유학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여행의 또 다른 수확은 우리 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남의 나라 국립묘지, 기념관들은 인터넷 뒤지고 공부해 가며 돌아보면서 정작 우리 문화유적은 하찮게 여기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김씨는 올 봄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 있는 유적지들을 하나하나 돌아보고 있다.

“200여 년 밖에 안 된 미국의 유적지를 둘러보며 감탄하는 내 모습이 우습더군요. 한국에 돌아온 후 서울에 가볼 만한 유적지를 찾기 시작했죠. 아이들 숙제 때문에 우리 고궁에 간 적은 있지만, 공부하면서 보러 간 적은 없었어요. 역시 준비한 후에 가니까 다르게 보이더군요. 그리고 ‘궁궐 도우미’를 꼭 이용해 보세요. 요즘 사극에 나오는 장면까지 예로 들며 설명을 아주 잘 해줍니다. 남산 생태공원에 가보셨어요? 외국인들은 많은데 정작 우리 나라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아요. “

김씨는 올 여름 휴가에도 서울유적 답사를 계획하고 있다. 한번 해외여행 맛을 본 아이들은 또 가자고 조르지만 좀더 우리 것을 아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번 여름휴가 준비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라면 늘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여행에서 빠지는 남편을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