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 직지사

김천 사람들은 직지사를 ‘지끼사’라 부른다. ‘직’자에 힘을 주고 한자 한자 읽어야 제대로 발음되는데, 그러다 보면 입과 혀가 불편해진다. 세 글자를 뭉뚱그려 발음하다 보니, ‘직’자의 받침과 ‘지’자가 뒤엉켜 ‘끼’가 되었다. ‘지끼사’로 발음하는게 훨씬 편하다. 국어 문법으로 따지면 역구개음화 현상이다.

‘지끼사’는 숲과 산과 계곡이 잘 어우러진 도량이다. 절 터는 계곡 옆에 넓은 평지에 자리잡았다. 큰비라도 올라치면 절 마당으로 작은 물길들이 생겨나는데, 군데군데 그 물길을 잡으려고 수로를 만들어 놓은 게 눈에 띈다. 이 넓은 평지에 예전엔 절 집들이 가득 차 있었다. 태조 왕건의 도움을 받아 936년에 불사를 크게 일으켰는데, 그때 250여 채의 건물에 2500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가히 동방 제일의 도량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에 대부분 불타고, 영조 때에 중창했으나 예전의 위용을 회복하지 못했다. 옛 명성을 좇아 1960년대 중반 이후로 절 집을 많이 지었다.

경상도 밀양에서 태어난 사명대사는 할아버지에 이끌려 15세에 이 절에서 출가하고, 18세에 선과(禪科)에 장원 급제했다. 그리고 30세에 ‘지끼사’ 주지로 부임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에 승군을 이끌어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에 건너가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포로가 된 조선인 3500여명을 데려오기도 했다. ‘지끼사’에서는 사명대사를 기려 사명각을 짓고 영정을 모셔놓았다.

절을 굽이도는 계곡물을 따라 황악산을 올라가면 군데군데 암자가 나온다. 출입금지 표지판을 세워놓았지만, 널다랗게 뚫린 길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중에서 노스님이 계신 운수암은 매월 음력 24일만 개방한다. 운수암은 산 중턱에 걸터앉아, 마치 정원을 잘 가꾼 가정집 같은 암자다.

김천에 시원한 계곡을 낀 유명한 절이 또 있다. 수도산 청암사다.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가 장희빈에 밀려 서인(庶人)의 신분으로 머물렀던 절이다. 청암사를 가려면 김천 시내를 거쳐 3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가다 보면 구성면 상원리 원터가 나온다. 이 마을에는 연안 이씨 종갓집이 있는데, 마을에 200년 된 방초정과 배롱나무를 심은 연못이 있어 인상적이다. 방초정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는 선홍빛 배롱나무꽃과 연못 위의 초록 개구리밥의 어우러짐은 한여름의 진경이다.

원터에서 3번 국도를 타고 다시 내려가다 보면 지례마을이 나온다. 토종 돼지고기로 유명한 동네다. 고기가 찰 지고, 쫀득쫀득한 게 입 속에 들어가면 사르르 녹는다. 절을 찾아가는 길에 고기 이야기를 해서 궁색하긴 하지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술 이야기까지 꺼내겠다. ‘지끼사’가 있는 대항면 면사무소가 있는 삼거리에서 977번 지방도를 타고 황간 쪽으로 막 꺾어지면 과하주(過夏酒) 술도가가 나온다. 한여름을 난다는 술이다. 약주와 증류소주를 섞어, 소주처럼 톡 쏘는데 맛은 약주인 특별한 술이다. 지레 돼지고기를 먹거들랑, 과하주도 잊지 말기 바란다.

수도산 청암사는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올라가야 나온다. 절은 한적한 산 속에 묻혀있다. 절로 들어서는 불영동천 계곡은 좁지만 사람이 그다지 눈에 많이 띄지 않아 소문내지 않고 몰래 와서 쉬어 가고픈 곳이다.

청암사는 비구니 절이어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름학교를 연다. 청암사는 위압적이지 않고, 잘 정돈된 느낌을 주는 따뜻한 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