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민주화의 물꼬, 朴鍾哲 사건 보도
고문만큼 국가권력의
도덕성과 윤리성에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범죄도 없다.
고문은 한 개인의 폭력 행사라는 차원을 넘어 결국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저질러지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문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범죄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기본 인격가치인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박탈해 인간을 단순한 수단이나 대상물로 떨어뜨리는 것이 바로 고문이다.
고문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1987년 1월15일 오후 3시 경 동아일보 편집국 사회부가 술렁거렸다.
석간 중앙일보 2판에 실린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군이 서울시내 갈월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숨졌다.’는 짤막한 2단기사 때문이었다. 한 대학생의 죽음을 보도한 이 한 줄 기사가
바로 동아일보 취재팀이 철저히 파헤쳐 사회적 분노와 함께 6월항쟁으로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단초였다. 80년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외견상 평온을 유지해오던 전두환 정권은
집권말기로 접어들면서 정통성 시비에 휘말렸다.
정부는 86년
10월부터 신민당 유성환(兪成煥) 의원 구속, 야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촉진국민대회 원천봉쇄
등 강수를 연발하더니 87년에 들어서자마자 학원가 소요의 주동인물 일제검거에 나섰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21세의 박종철 군도 조사대상이었다.
여러 차례 시위를 주도했던 그는 당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사건으로 집행유예 처분을
받고 하숙집에 눌러 있었다. 박군이 연행조사를 받게 된 것은 자신이 관련된 혐의사실보다도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관련 주요 수배자인 친구의 소재수사 때문이었다. 박군은 수사를 위한 참고인에
불과했지만 운동권 학생이기 때문에 가혹한 조사를 받은 것이다.
|
|
강민창(姜玟昌)
치안본부장은 박군의 사망 사실이 보도된 날 기자회견을 갖고 ▲박종철이 1월14일 서울 신림동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수사대 형사들에 의해 연행됐으며 ▲연행된 뒤인 오전 9시16분경 경찰이 제공한 콩나물국으로
아침식사를 하다가 “전날 술을 마셔 갈증이 난다.”며 냉수를 청해 마셨다. ▲조사가 시작되고 30분쯤
지난 11시20분경 갑자기 “억”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차속에서 숨졌다고 발표했다. 강본부장은
이어 ▲외상이 전혀 없으며 가족들도 시체를 확인했다. ▲따라서 쇼크사로 본다. ▲부검결과가 나오면
경찰의 결백을 증명해보이겠다고 장담했다. 이른바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당시
유행어는 바로 강본부장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1월16일자 보도에서 박군의 삼촌
박월길의 증언을 인용해 ‘숨진 박군은 두피하 출혈과 목, 가슴, 하복부, 사타구니 등 수십군데에
멍자국이 있었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의 죽음이 단순한 쇼크사가 아님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다. 이어 17일자부터는 박군의 시체를 처음
본 중앙대학교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吳演相)과 부검에 입회한 한양대학교 부속병원 박동호(朴東皓)의
증언을 상세히 보도했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특히 오연상의 증언 가운데 박군이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기던 도중 숨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대공수사2단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져 있었고,
사망원인이 호흡곤란으로 판단됐으며,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조사경찰관으로부터 들었으며, 변을 배설한
채 숨져 있었고 복부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 수포음이 들린 점,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던 점
등에 관한 것은 박군이 혹독한 고문으로 숨졌을 개연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이 날자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제하의 ‘김중배 칼럼’은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