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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순간 만난 ‘랄프 로렌’의 의미

Posted April. 22, 2017 07:02   

Updated April. 22, 2017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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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 실력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자네는 잘했어. 단지 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뿐이야.”

 미국 유학생활 도중 종수는 대학원 지도교수에게서 이별 선언을 듣게 된다. 탄탄대로를 걸어오던 28년 인생 중 최악의 순간을 맞은 그는 술을 퍼마시며 온 방안을 파괴적으로 헤집는다. 망치로 내리쳐 서랍을 열자, 눈에 띈 청첩장 하나.

 열여덟 살 여름, 난데없이 찾아와 “랄프 로렌에게 보낼 편지를 번역해 달라”던 수영이 보낸 청첩장을 계기로 옛 기억을 더듬어나간다. 수영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려 했던 이유는 황당할 만큼 간단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 로렌 브랜드로 걸치고 싶은데, 오직 ‘시계’만은 랄프 로렌에서 만들지 않아 재촉하고 싶다는 거였다. 종수는 그 후 랄프 로렌이 시계를 만들지 않는 이유를 찾아 나선다. 그에 대한 자료를 끝없이 찾아 읽고, 랄프 로렌을 아들처럼 키웠던 조셉 프랭클과 이웃 할머니, 입주 간호사 등 주변 인물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는다.

 랄프 로렌을 추적할수록 종수는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어느덧 시계 이야기는 더 이상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우연히 떠오른 옛 기억은 지금의 종수를 변화시켜 나간다. 10년 전 수영과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쓸 당시 아무 의미 없는 관용적 표현이라며 지나친 ‘디어 랄프 로렌’이란 첫 문장의 의미도 이제야 비로소 알 것만 같다.

 소설에서 랄프 로렌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대로 미국의 입지전적 디자이너이자 열한 살에 야반도주를 해 뉴욕으로 건너와 구두를 닦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실존 인물인 랄프 로렌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모두 팩트는 아니다. 1939년생인 랄프 로렌은 실제론 생존해 있지만 소설에선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그려지는 등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졌다.

 책은 2009년 등단 이후 젊은작가상 대상, 한국일보 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작가의 첫 장편이다. 계간 문학동네에 2015년 여름부터 지난해 봄까지 연재됐다.



장선희 sun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