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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이 벌어진 이유

Posted March. 02, 2021 07:14   

Updated March. 02, 2021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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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벌어진 시위는 이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지방에서도 조직적인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필연적으로 과격해졌고 충돌이 발생했다.

 일본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4월까지 벌어진 시위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는 정확하지 않다. 일본 측 통계는 대략 사망 400∼600명, 부상자 900∼1400명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 군경, 민간인 희생자도 약간은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편찬한 사료집에 따르면 사망자가 7500여 명, 부상자는 1만5000여 명이다. 어느 쪽이 맞느냐보다는 어느 쪽이 진상에 가깝냐가 정확한 질문일 것이다. 임시정부의 통계는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조사 방법상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본의 통계는 축소 보고가 확실하지만, 얼마나 어떻게 축소되었는가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임시정부의 통계가 맞거나 더 많았다고 가정하면 국지전의 희생자를 상회하는 수치이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벌인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군 피해는 전사 649명, 부상 1038명, 영국군 피해는 전사 258명, 부상 444명이었다. 일본 측 통계를 따라도 아르헨티나군 피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피해였다고 한다면 한국 민중으로서는 그야말로 맨주먹과 돌, 목소리로 싸웠던 전쟁이었던 셈이다. 분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항거할 수밖에 없었고, 비극이 벌어졌던 이유는 간단하다.

 시위에 참가했던 어떤 여학생의 경험담이 남아 있다. 전차를 타고 시위 현장에 가던 그녀는 도중에 사전단속을 벌이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경찰이 물었다. “너는 독립을 원하느냐?” “그렇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립할 것이냐? 군대나 군함이 있느냐? 너희를 도와줄 우방국가가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