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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문화다

Posted June. 13, 2018 07:18   

Updated June. 13, 2018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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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년 동안 중국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인도로 탈출한 티베트인 승려가 있었다. 달라이 라마가 그에게 물었다. “감옥에 있을 때 가장 큰 걱정이나 위험이 무엇이었습니까?”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중국인에 대한 동정심을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는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20만 명의 티베트인을 죽인 나라의 국민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달라이 라마가 이 얘기를 전한 것은 ‘나치 전문가’라 불리는 시몬 비젠탈이 ‘해바라기’라는 책에서 제기한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였다.

 비젠탈은 전쟁 중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어 다른 동료들과 함께 군 병원의 폐기물을 치우는 일을 했다. 어느 날이었다. 간호사가 그를 어떤 환자에게 데리고 갔다. 그 환자는 폭탄 파편에 눈이 멀고 얼굴과 상반신을 다쳐 죽어가는 스물한 살의 나치 친위대원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건물에 몰아넣고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사람들을 기관총으로 난사했다고 고백하고 참회했다. 그러면서 당신이 유대인이니 나를 좀 용서해 주면 안 되겠냐고 애원했다. 비젠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왔다. 다음 날, 그 젊은이는 죽었다.

  ‘당신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것이 비젠탈의 질문이다. 유대인들은 비젠탈이 그 젊은이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나치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고, 희생자들을 대신하여 용서할 권리가 그에게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용서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한가운데’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친숙한 가톨릭 신자 루이제 린저는 “참회하는 젊은이를 한마디 용서의 말도 없이 죽게 놔뒀다니 무섭다”라고 말한다. 불교도인 달라이 라마도 린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티베트 승려의 이야기로 답변을 대신한다.

 의견이 갈리는 것을 보면 용서도, 용서에 대한 태도도 문화의 일부다. 우리는 어떤 문화 속에 살고 있으며,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