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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장 잔혹사

Posted June. 04, 2014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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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KBS 최초의 민선 사장이다.

서영훈 전 KBS 사장(1988년 11월1990년 3월)은 재임 시절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의 성과로 KBS엔 자율적 의결기구인 이사회가 생겨나 사장의 임명 제청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서 전 사장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친 최초의 사장이었다. 집권당이 KBS 사장을 내려보내는 관행을 끝내려는 의미 있는 제도 변화였다.

그러나 최초의 민선 사장은 최초로 해임된 민선 사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물러났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약 17억 원의 수당을 부당 지급한 것이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났다. 그는 KBS가 정부에 비협조적이어서 일어난 일로 보고 사임 압력을 느껴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사표를 냈고, 이사회는 사장의 해임안을 의결했다.

서 전 사장부터 지금의 길환영 사장까지 KBS의 민선 사장은 모두 9명이다. 이 중 3년 임기를 다 채운 사장은 서기원(1990년 4월1993년 3월), 김인규 전 사장(2009년 11월2012년 11월) 둘뿐인데 이들도 험한 꼴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노조는 친정부적 인물이라며 사장의 출근길을 막아섰고, 서 전 사장은 경찰의 무력 진압과 직원 연행에 힘입어 출근할 수 있었다. 노조는 36일간 제작 거부를 했다. 김인규 전 사장도 같은 이유로 노조의 출근 저지를 당했고, 임기 후반엔 노조가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93일간 총파업을 벌였다.

홍두표(1993년 3월1998년 4월) 박권상 전 사장(1998년 4월2003년 3월)은 연임에 성공했지만 정권이 바뀌자 자진 사퇴했다. 연임된 정연주 전 사장(2003년 4월2008년 8월)은 정권이 바뀐 뒤로도 임기를 채우려다 쫓겨났다. 그는 이사회가 해임한 두 번째 사장이다.

이번엔 길 사장 차례다. 양대 노조가 파업 중인 가운데 이사회는 5일 길 사장에 대한 해임 제청안을 논의한다. 해임 사유는 사장의 보도 통제 논란으로 KBS의 공신력을 훼손했고, 세월호 부실 보도의 최종 책임자이며, 올 3월 감사원 감사 결과에서 드러났듯 경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KBS 사장의 잔혹사가 27년째 되풀이되는 이유는 민선 사장제가 도입된 후로도 정치권이 방송으로 재미 보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야의 추천을 받아 구성된 이사회는 국민을 대신하는 감독자가 아니라 정치적인 대리인 역할을 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 돌아온다. 지난달 19일 시작된 방송 파행은 3일까지 16일째 이어지고 있다.

KBS 구성원들이 자인했듯 재난이 돼 버린 재난 주관 방송사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는 정부라면 더욱 그렇다. 민선 사장이 임기를 채우기 힘들고, 노조가 시청자를 볼모로 연례행사처럼 파업하고, 부실 방송을 보면서도 수신료는 꼬박꼬박 내야 하는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KBS 문제는 국정 개혁 과제가 돼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공영방송이 꼭 있어야 하나. 만약 공영방송이 필요하다면 사장은, 그리고 이사회는 어떻게 뽑는 것이 정치적 독립성을 담보하는 최선의 방법인가. KBS의 방만 경영과 무책임한 파업을 수신료 거부운동으로 견제할 수 있도록 수신료와 전기료 통합 징수제를 폐지할 필요는 없는가. 막장 드라마보다도 더 막나가는 KBS 사장 잔혹사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