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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연형묵

Posted October. 24, 200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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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은 남에서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으려 한다고 불신한다. 1990년 9월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서울에 온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는 솔직한 말투로 화제를 모았다. 여기에 세련된 매너, 당당한 체구, 서글서글한 외모 덕에 요즘 같으면 연짱 신드롬이라도 낳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유머 감각도 뛰어나, 김광진 당시 인민군 대장이 군복만 입고 모자를 안 쓴 채 엘리베이터에 타자 모자를 안 쓰는 것도 군축이라고 말해 주변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군축문제로 난항을 겪던 협상 상황에서의 위트였다.

그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고위급회담 중단 직후인 1992년 12월 자강도당비서로 쫓겨 간 것도 서울을 오가며 파악한 남한 실정을 김일성 부자에게 보고하면서 북한 사회의 제한적 개방을 건의했다가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강도를 방문했을 때는 인민이 굶어죽고 있으니 대책을 세워 달라고 말해 호위병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김 위원장은 오히려 그의 충직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민주사회인 남에서조차 이처럼 대통령에게 목을 걸고 직언할 참모가 있을까 싶다.

자강도당비서 시절 그는 식량난이 심해지자 금지됐던 화전()을 주민들에게 허용하기도 했다. 또 중소형 발전소 건설을 통해 전력난 극복에 앞장섬으로써 김 위원장에게서 직접 경제 살리기의 본보기라는 칭찬을 받았고, 이런 신임을 바탕으로 2003년 넘버 3의 자리인 국방위 부위원장에까지 올랐다.

동아일보는 1991년 말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의 주역인 남의 정원식, 북의 연형묵 총리를 올해의 인물로 공동 선정했다.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해서다. 이듬해 9월 평양에서 열린 8차 고위급회담 때 본보 편집국장이 기념패 전달을 위해 방북했으나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의 제지로 불발됐다. 그가 22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기념패의 의미를 다시 새겨 본다.

이 동 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