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염 ‘꾀병’으로 몰려 자살한 육군 훈련병의 부치지 못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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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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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귀가 아파 죽을것 같아… 나중에 안들리면… 미치겠다”

“귀 때문에 가슴이 너무 답답해 죽을 것 같다”며 중이염 증세를 호소하다 자살한 훈련병 정모 씨의 미발송 편지. 논산=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귀 때문에 가슴이 너무 답답해 죽을 것 같다”며 중이염 증세를 호소하다 자살한 훈련병 정모 씨의 미발송 편지. 논산=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중이염 증세를 호소해온 육군 훈련병이 훈련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군 수사당국이 수사에 나섰다. 유족은 군이 아픈 훈련병의 호소를 꾀병으로 취급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 일이 벌어졌다며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오전 11시 26분 충남 논산시 연무읍 육군훈련소 생활관 화장실에서 훈련병 정모 씨(21)가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동료 훈련병이 발견해 부대에 신고했다. 1월 24일 입대한 정 씨는 8일 일선 부대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숨진 정 씨는 최근 중이염 증세를 호소해 치료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씨의 옷 속에서 발견된 메모지에는 ‘고통스럽다. 식물인간이 되면 안락사를 시켜주고 화장을 해 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또 정 씨 사물함에서 발견된 편지에는 중이염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0, 13일 두 차례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는 발송은 되지 않았으며 정 씨가 숨지고 나서 유족이 돌려받은 유품 중에 포함돼 있었다.

정 씨는 이 편지에서 “설 연휴기간 동안 급성 중이염에 걸렸어. 엄마한테 걱정 안 끼치려고 일부러 말 안하려고 했는데 너무 답답하고 속상해서 말하게 됐어. 오른쪽 귀가 먹먹하고 물이 들어간 것처럼 그렇게 들려. 나 체력도 (좋아서) 오래달리기(를) 100명 중에 3등 했고 힘도 좋아서 훈련도 정말 잘 받을 수 있는데 중이염에 걸려서 너무 속상하고 마음고생 하고 있어. 귀 때문에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아…”라고 호소했다. 또 “외부에서 약 보낼 수 있는 방법도 알아봐. 의무실은 항생제 정도밖에 안 주고 외래진료는 잘 안 보내줘. 이러다가 (중이염이 심해져) 귀 병신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나중에 아예 안 들리면 어떡하지…. 미치겠다”고도 했다. 정 씨는 또 “귀만 괜찮아지면 훈련, 금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데…”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유족은 군이 정 씨의 호소를 소홀히 취급해 일이 벌어졌다며 훈련소 측의 훈련병 면담 관찰 기록 등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를 이날 공개했다.

면담 관찰기록(2월 15일자)에 따르면 훈련소 측은 ‘(2월) 7일 우측 귀 중이염(사실상 중이염이라 보기 힘드나 본인이 아프다고 하니 중이염으로 판정함-군의관) 재진료 후 투약 5일 조치’라고 적혀 있다. 또 16일자에는 ‘이제는 우측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함. 간호장교 통화 결과 귀에 전혀 이상이 없다. 꾀병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상 없다고 군의관이 말을 해도 (정 씨가) 민간병원에서 진료 받고 싶다. 더 큰 병원에 보내 달라. 못 믿겠다고 항의하고 우는 등 소란을 피움. 육군대전병원 이비인후과 진료 예약을 급하게 하고 분대장을 통해 인솔시켰으나 (정 씨가) 치료를 거부. 정신과 진료를 받겠다고 함’이라고 쓰여 있다. 정 씨 유족은 “중이염이 심각하다는 호소를 군이 묵살해 전문 병원에서 치료받게 하지 않은 결과”라며 “(숨진 정 씨는) 편지에서 보듯 중이염을 제외하고 군 생활도 잘했는데 진료 요청을 꾀병 취급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군 당국은 “정 씨의 중이염 및 이명 현상에 대한 호소를 받아들여 10여 차례의 진료를 받게 했고 논산과 대전의 군 병원 이비인후과 군의관에게 치료 받게 했다”며 “하지만 정 씨가 군 의료진을 불신했는지 처방해준 약을 별로 먹지 않아 차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군 관계자는 “군 의료진은 집에 연락할 정도로 정 씨의 증세가 심각하다고는 판단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논산=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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