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정윤재]대한민국의 뿌리인 3월 1일을 ‘독립선언기념일’로
1920년 3월 1일 중국 상하이 올림픽대극장에서는 임정 관리들과 교민들이 모여 대한민국 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임정 지도자 안창호는 일제의 최대 관심사는 “이날을 무효로” 되돌리는 것이지만 “우리의 최대 의무는 이날을 영원히 유효하게 함”이니 “우리는 작년 3월 1일에 가졌던 정신을 변치 말자”고 다짐했다. 다음 해 2주년에는 마침 상하이에 잠시 왔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참석해 “우리 동포의 피와 살로 된 3·1을 기억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는 거족적 만세 시위와 독립선언서에 대해 “압제와 중세기적인 군국주의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와 평화”를 향해 투쟁하는 “새로운 아시아의 외침”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각지 한국인들은 이를 늘 3·1혁명이라고 불렀고 1944년 임시약헌에 ‘3·1 대혁명’이라고 명기했다. 이러한 관행은 1948년 제헌국회 때까지 지속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이어 1907년 대한신민회가 민주공화제의 ‘자유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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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