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5월 4일 정몽주 피살, 선죽교 ‘팩트 왜곡’의 전말[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 불린다. 공민왕 9년(1360년)에 스물네 살의 나이로 장원급제해 정계에 등장했다. 공민왕 13년에 이성계의 여진족 정벌에 따라갔다. 이후 이성계와 동지가 됐다. 성리학에 해박하여 남들을 압도했다. 고려 말 대학자인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의 해석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뒤에 성리학 책이 중국에서 들어온 뒤 정몽주의 주장이 다 맞는 것을 보고 승복했다. 정몽주는 몸을 사리지 않는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 사신으로 명나라로 떠났다가 배가 침몰하는 비운을 맞았다. 정몽주는 바위섬에서 마구를 베어 먹으며 열사흘을 버틴 끝에 구조되었다. 이런 일을 당하면 다시 바다로 나가기가 꺼려질 만도 한데, 그는 일본에 가는 것도 서슴대지 않았다. 정몽주를 핍박하던 권신들이 일부러 그를 사신으로 뽑은 것이다. 당시 왜구가 극성해서 많은 백성이 잡혀간 상태였다. 정몽주는 험난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 잡혀갔던 백성 자세히 보기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