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문재인의 채무 김정은의 채권

박제균논설실장 입력 2017-06-26 03:00수정 2017-06-2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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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김정일 합의 10·4선언… 文엔 遺業, 김정은엔 채권증서
외교안보라인 人事 지향점… 연내 남북정상회담 개최
10월 4일까진 제의할 듯
文, ‘임기 내 평화체제’ 구상… ‘정상회담=돈’ 金과 동상이몽
박제균 논설실장
사람은 비슷하다. 자기가 꾼 돈은 잊어도 꿔준 돈을 잊는 사람은 드물다. 돈을 갚을 때 꿔준 사실을 잊었다고 하는 사람도 기실 잊은 척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국가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구나 세습체제라면 권좌를 물려받은 자식에게 아버지의 채권은 반드시 챙겨야 할 유산이나 다름없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은 일종의 유업(遺業)이다.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을 없애고 항구적인 평화를 달성할 모든 방안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보는 듯하다. 정권 말 합의여서 생명력을 갖지 못한 것이 당시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문 대통령에게는 통탄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에게 10·4선언은 아버지가 남겨준 채권증서다. 선언 5항에는 구체적인 채권목록이 나온다. △남북경협 투자 △기반시설 확충과 자원개발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한강하구 공동 이용 △문산∼봉동 간 철도화물 수송 △개성∼신의주 철도,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안변 남포 조선협력단지 건설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협력사업 등이다. 사실상 북한의 사회간접자본(SOC)을 깔아주는 것으로 수백조 원이 소요될 수도 있는 사업이다. 물론 그 돈은 남측이 내는 것이다. 끝나는 남쪽 정권과 정상회담을 해준 대가였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북측에서 ‘남북 합의를 지키라’는 반응이 연달아 나오는 이유는 자명하다. 빚을 갚으란 얘기다. 북한당국 발표의 문면(文面)을 들여다보면 ‘먹튀’한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배신감이 짙게 깔려 있다. 노무현 정권을 계승한다는 새 정권이 들어섰으니, 본전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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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국가정보원장을 비롯해 집권 이후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라인 인사는 하나의 분명한 목표를 가리킨다. 연내 남북정상회담 개최다. 10·4선언이 정권 말 합의여서 무위로 돌아간 만큼 정권 초 정상회담을 열어 이를 부활시키고 임기 내에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의 방미 중 그를 접촉한 패트릭 크로닌 미국신안보센터 아시아태평양안보 소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워싱턴에선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부터 10월 4일 전후를 주목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문 특보는 귀국 후 “문 대통령이 10·4남북정상회담 10주년이 되는 10월 4일 북한 문제와 관련해 큰 그림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의 주목이 근거 없는 게 아니란 얘기다. 문정인이 문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 멘토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문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북핵 동결 검증 시 한미훈련 축소’를 말한 것도 애초에 문정인의 구상에서 나온 것이다.

문 특보가 말한 ‘10월 4일 큰 그림’과 관련해 문 대통령 측이 원하는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개최다. 이를 위해 8·15 광복절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8월 15일까지 회담 제의 여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10월 4일에는 제의하겠다는 복안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문 대통령 측과 김정은의 계산이 엇갈린다. 정상회담 하면 남측 정부로부터 받을 돈부터 떠올리는 김정은은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는 태도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도 이를 모를 리 없다. 문 대통령이 6·15남북선언 17주년 기념식에서 ‘남북합의 법제화’를 말한 것은 빚 갚을 의향이 있음을 1차로 확인한 것이다. 청와대는 향후 정상회담 공식 제의 또는 북측과의 직·간접 접촉을 통해 ‘남북 기존 합의 이행’을 강조할 것이다. 빚을 받고 싶으면 정상회담에 응하라는 뜻이다.

문제는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사석에서 “당신이 김정은이라면 핵·미사일의 고도화가 거의 완성된 마당에 포기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려도 핵·미사일 문제에는 별 진전 없이 김정은으로부터 청구서만 잔뜩 받아온다면 국내 여론이 가만있을 리 없다.

남쪽에서 뭐라고 하든 오로지 미국만 쳐다보는 북한이야말로 친미 사대주의자가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북한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이유다. 그런 북을 향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며 남북만 합의하면 한반도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을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짝사랑은 대개 실패한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10·4선언#문재인 정권#10·4남북정상회담#북핵#북한 친미 사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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