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지순]현장에서 다시 시작하는 노동시장 개혁

동아일보 입력 2015-06-20 03:00수정 2015-06-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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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한민국의 국민은 힘들고 고단하다. 작년 이맘때는 세월호의 비극으로 모두가 죄인인 양 자중하면서 고통을 견뎌냈는데, 올해는 비슷한 시기에 메르스라는 지독한 바이러스 때문에 모두가 불안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정부의 무능을 되풀이하여 지적하는 것도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두 발 앞서 문제를 제기하고 한발 앞선 해법을 만들어 최악을 예방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선진행정’, ‘선진국가’의 모습이지만 이번에도 이러한 기대는 빗나갔다. 그래도 우리 사회가 이겨낼 수 있는 건 의료현장에서 이뤄지는 감동적 투혼과 진정한 직업정신 때문이다. 동탄성심병원 김현아 간호사의 편지는 정부의 그 어떤 설명과 홍보보다 위기 극복의 메시지를 국민에게 진솔하게 전달하고 있다.

노동시장 개혁도 마찬가지다. 지금같이 혼돈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국가도 개인도 명확한 미래상을 그리기가 쉽지 않다. 낡은 제도를 가지고 계속 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새로운 길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 경제의 현실과 미래를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청장년에게 안정적 일자리와 합리적인 근로조건이 부여될 수 있도록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선진정치’가 해야 할 기본 과제이다. 그렇지만 우리 정치의 현실은 개혁하는 것은커녕 개혁을 꿈꾸는 것조차 어렵게 한다. 국민이 부여한 책무를 수행해야 할 정치세력은 저마다 자신의 단기적 이해관계에 시곗바늘을 맞추고 산다. 정부는 국회의 입법권 횡포에 허둥지둥한다. 낡은 제도와 법규 때문에 산업현장의 위기가 코앞에 다가오고 있는데도 입법부는 이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근로시간과 통상임금 말이다.

정부가 작년 말 노동시장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그 방향과 내용은 국민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다. 노동시장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어내지 못한 탓이다. 최근 정부가 다시 노동시장 개혁의 시동을 걸긴 하였지만 노사정이 순조롭게 타협할 것으로 보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다시 갈등과 대립의 홍역을 치를 것으로 대부분 예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가뭄의 단비처럼 두 가지 기쁜 소식이 최근에 있었다.


5월 21일 롯데그룹은 재벌사로는 드물게 그룹 전체적으로 협력적 노사관계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기업의 경영권과 근로자의 노동권을 상호 존중하고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통해 실질적인 노사 상생의 길을 추구하는 자율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협력적 노사관계를 기반으로 사회적 가치 창조를 위해 지속적으로 고용을 창출하고 협력사의 동반성장을 강화하겠다는 다짐이다. 협력사를 공평하고 공정하게 대우하고 협력사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롯데그룹의 노사가 천명하였다는 것은 앞으로 대기업 노사관계의 과제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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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 6월 17일에는 SK하이닉스가 노사 합의로 이른바 임금공유제라는 창의적인 분배 시스템을 선보였다. 임직원의 임금인상분 중 20%에 해당하는 금액을 노사가 갹출하여 협력사 근로자의 복지와 근로조건 개선에 사용하겠다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노사가 자신의 기득권을 양보하여 원청-하청 상생을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실제 격차를 해소하는 데는 아직 미흡할지 모르나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정치가 부진하고 무기력할 때, 노동계와 경영계의 지도부가 소신과 리더십을 상실한 채 우왕좌왕할 때 현장의 노사는 스스로 그 해법을 찾아낸다. 사실 노동시장 개혁이 반드시 법과 제도의 변화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 기업은 더욱 세분화, 전문화됨에 따라 협력사와 파트너십 없이는 지속성장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원청과 협력사의 노사가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노동시장 개혁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롯데와 SK하이닉스 노사의 결단이 더 많은 기업들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의 상생을 위한 노사 협력의 거대한 물결을 만드는 발원지가 되기를 기대한다. 정부와 노사 지도부도 국가가 누란지계의 위기에 있을 때 이제라도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신발 끈을 단단히 고쳐 매기를 당부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임금공유제#노동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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